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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상양혈 (10)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여귀진은 전력을 다해 몸을 틀었다. 그를 한가운데에서 반으로 가를 뻔했던 칼은 그의 어깨 옆을 스쳐 지나갔다. 여귀진은 중갑을 갖춰 입지 않았던 터라 늘 입고 있던 가죽 갖옷의 어깨 보호대와 함께 피투성이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극심한 통증에 여귀진의 혈관 속 괴력이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 여귀진은 주먹으로 군마의 목 옆면을 쳤다. 감당할 수 없는 거센 힘을 뇌기도, 미쳐 날뛰는 준마도 버텨내지 못했다. 여귀진의 주먹에 맞아 1척만큼 밀려 나간 말은 한 차례 미친 듯이 울부짖고는 흰 거품을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여귀진은 쫓아가 무릎치기로 말에서 떨어진 뇌기병을 기절시켰다.
그는 고개를 돌려 막사 밖을 보았다. 멀리서 뇌기병이 산발적으로 질주해 왔다. 그들은 아무런 방비가 되어 있지 않은 치중 부대로 발을 들였고 그 수는 점차 많아졌다. 용맹한 뇌기병은 붉디붉은 준마를 타고 있었으며 위아래 할 것 없이 전신이 핏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그들은 다수가 화살에 부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칼등으로 말 엉덩이를 치며 질주해 왔다. 달아나는 하당 군사들을 만나면 몸을 낮추어 칼을 휘둘렀고 그런 후에는 돌아보지도 않고 병영을 지나 남쪽으로 달아났다.
명령을 전하는 뇌기가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질주해 나가면서 말 등에서 우각으로 힘껏 군호(軍號)를 불었다.
“우리가…… 졌나?”
여귀진은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는 상양관 아래가 이미 리군에 완전히 패했다고 생각했다. 백의와 식연의 필살진이 리군을 막지 못해 리군 전선이 아무런 막힘없이 5리 밖의 란정 역참까지 돌파한 것 같았다.
그러나 떨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뇌기 몇 명이 벌써 여귀진이 있는 막사를 발견했다. 여귀진의 옷차림은 다른 하당 군사와 달랐기에 즉시 뇌기의 주의를 끌었다. 뇌기들은 일제히 군마를 돌려 여귀진을 향해 덮쳐왔다.
여귀진은 고월의가 뇌기를 맞닥뜨렸을 때처럼 냉정하고 날카롭지 못했다. 뒤돌아 달아날 기회도 없었다. 뇌기들은 반원의 진형으로 덮쳐오며 여귀진이 달아날 일체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여귀진은 몇 걸음 물러났다. 거의 절망적이었다. 최후의 순간 그의 머릿속이 전광석화처럼 번득였다. 그는 훌쩍 뛰어올라 막사 지붕 덮개를 붙잡고 확 잡아당겼다. 막사 전체가 완전히 무너졌다. 떨어져 내린 막사 지붕이 거대한 청색 막처럼 여귀진의 인영을 가렸다.
뇌기들이 얼른 말고삐를 잡아 올리자 군마가 뛰어오르며 무너진 막사 위를 훌쩍 넘어갔다. 군도가 잇달아 발아래 막사를 베었다. 칼빛 한 줄기가 거의 여귀진의 코끝을 바짝 지나가며 장막을 갈랐다.
칼의 한기가 코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여귀진은 막사 아래 몸을 웅크린 채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손이 파르르 떨렸다.
손에 어떤 물건이 느껴졌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무기였다. 불길한 장도 ‘영월’. 사람을 죽이는 순간에만 보름달처럼 빛난다는 칼. 칼을 쥔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말발굽 소리가 어지러웠다. 막 지나간 군마들이 말머리를 돌려 다시 질주해 오는 것 같았다.
뇌기는 남들과 신분이 다른 소년을 쉽게 놔주려 하지 않았다. 돌아와 말발굽으로 짓밟으면 아래 숨어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편자를 박은 발굽이 주위를 미친 듯이 짓밟았다. 몸 어디든 밟히면 곧장 뼈가 부러질 터였다. 여귀진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그는 흙을 움켜쥐고 몸을 지면에 바짝 붙였다. 저도 모르게 뛰어오를까 봐, 그래서 위치가 들킬까 봐 걱정하면서.
“죽여라!”
뇌기 중 우두머리인 십장이 돌연 명령을 내렸다.
“죽여?”
여귀진은 아연해졌다. 그는 자기가 이미 발각되었다고 생각했다.
일순 멍해진 그는 돌연 십장의 말뜻을 깨달았다. 여귀진은 줄곧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막사 안에는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 이곳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희야가 있었다!
여귀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체내에 막혀 있던 식은땀이 수문이 열린 듯 순식간에 배출되었다. 그는 벌떡 뛰어올라 달빛 아래에 섰다. 마침 붉은 말 한 마리가 앞발을 높이 들어 올리고 막 아래를 밟으려 하고 있었다. 그 쇠발굽 아래는 칠흑처럼 새카만 눈동자를 가진 소년의 얼굴이었다!
그날 동궁의 협소한 골목에서 만났을 때와 몹시도 비슷했다. 그 장면이 다시 펼쳐진 듯했다. 희야의 눈에서는 차디찬 불이 타올랐다. 여귀진은 그 눈빛에 얼어붙은 것 같았다.
“이것이 적인가?”
여귀진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것이 적이다!’
여귀진은 마음속에서 외치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조금 전 자기가 한 약속도 기억했다. 그 약속을 누군가가 그의 마음속에서 크게 낭송하는 듯했다. 그 소리는 거대한 종소리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친한 친구니까. 나 여귀진 아소륵 파소이에게 마지막 숨이 남아 있는 한 그들이 네 얼굴을 짓밟게 두지 않을 거야!”
무겁게 뛰던 심장 박동이 돌연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칠흑처럼 달콤한 혈기가 등줄기에서부터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여귀진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달려갔다.
돌격하고! 칼을 뽑고! 포효했다! 그러나 귀청이 터질 듯한 여귀진의 포효성은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 울림에 가장 먼저 놀란 이는 뇌기군 십장이었다. 그는 그것이 칼집에서 빠져나온 무기임을 빠르게 감지했다. 이어 무시무시한 으르렁거림이 뒤통수에서 전해졌다. 적의 뇌장(腦漿)이 터지는 모습을 보려는 참인데 포효성에 놀란 군마가 공중에서 두 발을 튕기며 아래를 내딛지 못했다. 십장은 몹시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고개를 쳐들고 하늘의 밝은 달을 쳐다보았다. 거의 보름달에 가깝게 둥근 달 속에서 커다란 매와 같은 형상이 떨어져 내렸다.
그자가 손에 든 무기는 은은한 청색 광채를 띠었다. 보름달 같은 빛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저리 높이 뛰어오를 수 있지?’
그 생각이 십장의 뇌리를 번득 스치는 순간 그의 머리는 이미 몸과 분리되었다. 거대한 말의 머리도 함께였다.
군마와 사람의 시체가 묵직하게 희야의 곁으로 고꾸라지면서 희야의 온몸에도 피가 튀었다. 반듯하게 누워 있던 희야는 칼을 들고 선 여귀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
뜨거운 피가 손에 묻었다. 온몸이 끈적끈적한 느낌이었다. 십장의 머리는 눈도 감지 못한 채, 아직 여귀진의 발아래에 있었다. 여귀진은 세차게 몸을 떨더니 천천히 손에 든 장도를 보았다. 칼은 뜨거운 피에 뒤덮여 있었다. 이 괴이한 무기는 무시무시한 달빛을 띠는 듯했다.
“사람을 죽이는 게…… 이리 간단하다니…….”
여귀진이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두려워서도, 좋아서도 아니었다. 여귀진은 더 생각할 힘이 없었다. 영원히 바닥에 닿을 수 없는 캄캄한 심연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소륵! 등 뒤!”
희야가 고함쳤다.
여귀진은 번득 정신이 들었다. 5년간 청양의 대벽지도, 식연의 쌍수도검술, 대나무 발 뒤의 스승이 가르쳐준 절옥경까지 수련했다. 이미 마음속 깊숙이에 심어진 냉혹한 살인 기술은 서서히 자라나는 요괴 같았다. 일단 장애물을 무너뜨리고 나면 더 이상 무엇도 그것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여귀진이 몸을 회전하며 칼을 휘둘렀다. 평참이었다. 장도가 매섭게 뒤편 기마병의 말 복부를 파고들었다.
여귀진은 인정사정없었다. 감정을 가라앉힌 그는 두 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온 힘을 다해 밀었다! 군마의 배가 완전히 갈라졌고 뇌기의 종아리가 떨어져 나갔다.
“아소륵!”
희야의 외침에 여귀진은 영월도를 들고 매처럼 다시 날아올라 허공에서 다음 적을 베었다.
그는 돌격해 나갔고,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여귀진은 발로 앞의 시체를 걷어찼다. 핏빛을 머금은 장도가 시신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조금도 멈추지 않고 몸을 돌렸다. 두 손으로 칼을 쥐고 전력으로 밀어냈다. 칼날이 순식간에 등 뒤에서 달려오던 군마의 가슴으로 돌진했다. 아직 관성이 남아 있던 군마는 멈추지 못하고 장도에 제 가슴을 그대로 꽂아 넣었다. 칼을 든 여귀진은 말 힘에 1장 뒤로 밀려났다. 여귀진은 칼자루를 놓고 바닥의 창 한 자루를 집어 들어 한 팔로 내던졌다. 창날은 그대로 뇌기의 목구멍을 꿰뚫었다.
“희야! 희야!”
여귀진이 좌우를 둘러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멀리 내다보았다. 수많은 적홍색 형상이 그를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해 왔다가 또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철수하는 뇌기가 말 등에서 세 번은 짧게, 한 번은 길게 호각을 불었다. 기병이든 보병이든 모든 리군이 호각 소리에 전력을 다해 동남향으로 전진했다. 란정역의 하당군 진영은 이미 짓밟혀 너덜너덜해졌다. 울타리가 쓰러졌고 막사도 잇달아 무너졌다. 뇌기가 던진 횃불에 탈 수 있는 모든 것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로 변했다.
절망과 함께 공포가 여귀진을 뒤덮었다. 그는 자신이 몇 명이나 죽였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한 명을 죽일 때마다 공포가 옅어지는 듯했다. 치중 부대의 수비군 수백 명은 모두 전사한 것 같았다. 마초를 운반하던 이들과 수레를 수리하던 인부들도 자취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적, 온통 적뿐이었다!
여귀진은 희야를 찾고 싶었지만 아무리 외쳐도 희야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여귀진은 고개를 휙 돌렸다. 말 등에 탄 뇌기가 평평하게 창을 들고 있었는데 그 창끝이 여귀진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길이가 1장 2척에 달하는 긴 창이 횡포한 팔 힘에 따라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부채꼴 모양으로 쓸려왔다. 여귀진은 전력을 다해 칼을 휘둘러 창대를 베었다. 창머리가 선회하며 날아갔다. 허공에서 한 차례 멈칫했던 머리 없는 창대가 반대로 휘둘러져 왔다. 그때 여귀진은 벌써 신속하게 한 걸음 내디디며 장도를 들어 올렸다.
여귀진의 판단 착오였다. 내디딘 한 걸음이 공교롭게도 적의 공격 아래에 그를 데려다 놓고 말았다. 창대가 쌩 소리를 내며 여귀진의 등을 쳤다. 여귀진은 갖옷 연갑 아래의 호심경이 동종처럼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비린내 짙은 피를 한 움큼 토하며 창대에서 전해진 강한 힘에 의해 굴렀다.
여귀진은 자기가 드디어 죽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아직 희야를 찾지 못했다. 희야가 아직 살아 있는지도 모르는데.
“아소륵! 아소륵!”
누군가가 귓가에서 그의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목소리는 가늘고 작았다.
여귀진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가 주위를 차단한 듯, 모든 것이 그것의 밖에 가려진 느낌이 들었다. 가슴속의 무시무시한 박동이 다시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이따금 맹렬한 심장 박동 외에도 모종의 괴상하고 강렬한 박자가 점점 그의 몸을 장악해나갔다.
대체 뭘까? 심장처럼 뛰지만 심장 박동 소리보다 훨씬 끔찍했다. 두 개의 완전히 다른 박자의 흐름이 여귀진의 몸을 찢어발기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다른 빈도로 주먹을 휘두르며 안에서부터 세게 그의 가슴을 으스러뜨리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가 여귀진의 얼굴을 호되게 후려쳤다. 그 고통에 끔찍한 박자의 흐름이 돌연 진정되었다. 온몸이 많이 가벼워졌다. 여귀진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희야!”
여귀진은 제 벗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희야가 그의 바로 옆에 있었다. 두 사람은 거대한 마초 더미에 기대 있었다. 미친 듯이 내달리는 리군 부대는 이 두 소년까지 신경 쓸 겨를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들은 말을 타거나 발로 빠르게 뛰면서 풀더미 옆을 번개처럼 스쳐 갔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희야와 여귀진도 그들의 뒷모습만 보았다. 두 사람은 마치 암초 뒤에 숨어서 세찬 조수가 이 암초 앞에서 부서졌다가 뒤편에서 다시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을 지켜보는 듯했다.
“너…… 여기 있었구나…….”
여귀진의 가슴이 세차게 들썩였다.
“팔 하나가 있으니까 길 수 있잖아.”
희야가 물었다.
“아까 너 불렀는데, 왜 듣지도 않아?”
“날…… 불렀어?”
여귀진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서 너 불렀어. 얼마나 크게 불렀다고. 근데 넌 저기에서 쳐다보지도 않더라.”
희야가 영월에 앞가슴이 꿰뚫린 군마가 있는 전방을 가리켰다. 1장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나…… 못 들었어…….”
여귀진은 망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보니 당시 그와 희야는 1장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여귀진은 희야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전장의 떠들썩한 소리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의 외침을 압도할 만큼 크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때 여귀진은 분명히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와 휘둘러진 군도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또렷하게 들었다. 말을 벨 때는 심지어 말의 심장 박동 소리까지 느낄 수 있었다.
힘이 빠진 손에서 장도가 툭 떨어졌다. 여귀진은 마초 더미에 털썩 기댔다. 아까 희야는 끔찍하리만치 텅 비었던 여귀진의 눈을 보았다.
희야는 조심스럽게 영월을 가져다가 풀 더미 속에 꽂아버렸다. 여귀진이 다시는 그것을 잡지 못하도록. 스스로도 왜 그리했는지는 몰랐다. 그저 희야는 여귀진이 저 칼을 뽑았을 때 사람이 완전히 변했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