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57화 (15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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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상양혈 (9)

식연과 고월의가 탑루 위로 돌아왔다. 멀리 뇌열지화의 깃발은 이미 두터운 포위에서 벗어났다. 고월의를 잃은 출운기군은 더 이상 효과적으로 적을 막아내지 못했다. 뇌기들은 곧장 물러가지 않고 3리 밖에 말을 주둔시켰다. 고월의가 견갑을 풀었다. 그제야 어깨 피부가 베여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을 발견했다. 장군들이 다가와 그를 에워쌌다. 모두 안색이 퍼렇게 질렸다. 적진 깊숙이 파고드는 사람들치고 자기 수중의 무기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는 드물었다. 그러나 영무예의 묵직한 칼의 위엄을 목도하자 그를 도발하고자 하는 충동이 사라졌다.

“영무예의 패도에는 천둥이 산을 가르는 힘이 있지.”

식연이 나직이 말했다.

“고 장군이 용맹하긴 하나, 그의 적수는 아니오.”

백의는 이제 이동할 수 있는 기성 병력이 없었다. 낯빛이 굳어진 그는 뒷짐을 진 채 영무예의 본진이 있는 곳을 아득히 바라볼 뿐이었다.

현재 중앙 전장에서는 적려가 여전히 연합군 보병과 고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미 포위를 뚫은 영무예는 천천히 참마도를 들어 올렸다. 참마도에 불빛이 비치며 찬란하게 빛났다. 그러자 뇌기 중에서 누군가가 전력을 다해 호각을 불었고 웅웅 호각 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짧게 세 번, 길게 한 번.

영무예가 칼을 들자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장의 판세가 돌연 크게 변했다. 악전고투를 벌이던 리군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모든 적을 버리고 한데 모이더니 동측의 빈틈으로 돌진해 갔다.

연합군이 뒤에서 어떻게 기습하든 리군은 돌아보지 않았다.

적조가 다시 한번 휘몰아쳤다. 리군은 급속도로 모이며 그 틈을 넘었다. 초위국의 산진이 애써 동측으로 틀며 틈을 막으려 했다. 그들과 스치며 지나가는 리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군마가 길게 울부짖으며 쓰러지고 군사들의 시체가 창끝에 걸렸다. 그러나 리군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억지로 적을 가르고 나아가 영무예의 본진에 합류하려 했다. 돌파한 대오는 잠시 정비하더니 동남쪽으로 흩어졌다.

영무예가 칼을 들어 올렸을 때, 그것은 밤하늘의 유일한 별처럼 그의 충성스러운 무사들을 소환했다. 지금 영무예는 이곳의 유일한 거인이었다. 그의 위엄이 온 평야를 뒤덮었다!

“사상자를 따지지 않고 어떻게든 포위를 뚫으려 하더군요!”

고월의가 통증을 참으며 나직하게 감탄했다.

“더는 막을 여유가 없으니 우리는 이미 패했소.”

강무외가 길게 탄식했다.

식연은 말이 없었다. 그는 휘말린 구름 같은 붉은 깃발을 바라보았다. 깃발 아래에서 영무예의 장도가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살짝 몸서리를 쳤다. 그러고 보니 손바닥이 온통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란정 역참. 하당군 치중 부대.

“리국공을 보니까 내가 줄곧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나 같은 사람은 그냥 북륙의 양치기 감이었어.”

여귀진이 희야의 침대가에 앉아 멍하니 촛불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형님들이 그래도 나를 위협으로 생각한다는 거야. 내가 아버지 아들이기 때문이지. 가끔 삶의 경로는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한낱 인간일 뿐이야. 다른 많은 사람이 우리를 가기 싫은 길로 가게 떠밀지. 달아나고 싶어도 소용이 없어.”

“모르겠다. 나는 그런 생각 안 해. 난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사람으로 살면서 남들에게 무시당하고 구박당하기는 싫다는 것밖에 모르겠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떠밀든 내가 가기 싫은 길은 절대로 안 갈 거야! 장군께서는 내가 영무예 같은 난세 패주의 목을 딸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 아소륵, 난 그 말을 믿어. 난 뇌운정가나 방기소, 팽련운, 창야보다…… 그들 누구보다 강한데 어째서 내가 최후의 승자가 되면 안 될 이유가 뭐야?”

희야는 반듯하게 누워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막사 지붕을 쳐다보았다.

“사실 나도 있잖아. 예전에는 정말 아버지처럼 모두가 경외하는 사내대장부가 되고 싶었어. 그런데 전장에 나와 죽은 사람들을 보니까 불현듯 슬퍼지더라.”

여귀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장군께서 그러셨지. 한 장군의 공훈은 수많은 병졸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어쩌면 너도 어느 날 무척 강해져서 수많은 적을 물리치고 리국공마저도 네 창으로 죽이고 장군처럼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되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일까?”

여귀진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장군을 보면 장군도 무척 외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희야는 묵묵히 제 벗을 바라보았다. 한참 뒤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아소륵. 너는 적이 뭐라고 생각해?”

여귀진은 일순 아연해져 고개를 저었다.

“누구와 누가 진짜 적일까?”

“방기소와 팽련운은 우리 적일까?”

여귀진은 또 한 번 멍해졌다.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방기소와 팽련운, 뇌운정가 그리고 영원한 비밀로 지하궁전에 묻혀 있을 유은까지, 마치 유령처럼 여귀진의 가슴을 뒤숭숭하게 했다. 그러나 여귀진은 그들이 자신의 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비록 그들이 남회성에서는 운명으로 정해진 원수처럼 어느 때고 무시무시한 얼굴로 불쑥 튀어나와 귀찮게 할 것 같지만 그래도 사생결단으로 맞설 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방기소라고 해도 단칼에 죽이라면 여전히 못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들이 적이 아니라면, 전장에서 희야가 죽인 사람들은 더더욱 적이라고 할 수 없다. 심지어 그들은 처음 만났는데 단지 전장에서 만났다는 이유로 죽기 살기로 싸워야 했다.

희야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거만하고 냉정한 웃음이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제 벗을 돌아보며 부러진 오른팔을 들어 제 얼굴을 가리켰다. 그리고 한 글자씩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나는 걔들이 내 적이라고 생각해. 내가 맞서지 않으면 놈들은 내 얼굴을 짓밟을 거야.”

몹시도 차가운 희야의 까만 눈을 마주한 여귀진은 흠칫했다. 희야와의 두 번째 만남을 기억하고 있었다. 동궁의 아무도 모르는 골목 안이었다. 달빛이 어둑했고 소년의 포효성은 목구멍 안에 억눌렸다. 아이들은 야수처럼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발을 들어 희야의 얼굴을 세게 짓밟았다.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그러나 새카만 눈동자의 소년은 빌지 않았다. 그는 내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무리를 뚫고 나온 눈빛은 온기 없이 타오르며 여귀진의 가슴을 온통 싸늘하게 불살라버렸다.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어.”

희야가 나직하게 말했다.

“놈들이 죽어 마땅하든 아니든 나랑 상관없어. 난 남에게 얼굴을 짓밟히고 싶지 않아. 그래서 걔들이 내 적인 거야. 전장에서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마주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네가 무자비하지 않으면 놈들이 널 죽이려고 달려들 거야.”

여귀진은 고개를 숙였다. 마음속에 슬픔이 뒤엉켰다. 벗의 마음에 내재된 분노와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달빛이 비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혼자 짓무른 상처를 핥는 한 살배기 어린 늑대 같았다. 사방으로 털이 뽑힌 늑대는 더 이상 이런 굴욕과 고통을 당하지 않겠노라 맹세한다. 이렇게 깊숙이 숨겨진 분노가 여귀진을 불안하게 했다. 그러나 희야의 말이 옳다고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날 밤 동궁의 격투가 희야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더라면, 유은과 그의 똘마니들은 정말 희야의 늑골을 부러뜨리고 슬개골을 으스러뜨리고 그의 눈을 으깨놓았을까? 여귀진은 희야를 향한 방기소 무리의 흉악한 심보를 너무 잘 알았다. 보는 눈이 없을 때 그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으리란 법도 없었다. 음흉하게 우연도 데려가겠다고 요구하는 놈들인데 싫어죽겠는 희야 하나쯤 없애 버리는 것도 불가사의할 일은 아니었다.

그 생각이 미치자 여귀진은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돌연 불안해졌다. 제 가장 친한 벗이 늑골이 부러지고 슬개가 부스러지고 눈이 으깨지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희야가 이런 모습으로 제 앞에 누워있다면 자신도 분노에 차 복수하러 뛰쳐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이지만 여귀진의 마음속에서 불안이 사라지고 결연함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난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

여귀진이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

“하지만 우리는 친한 친구니까. 나 여귀진 아소륵 파소이에게 마지막 숨이 남아 있는 한 그들이 네 얼굴을 짓밟게 두지 않을 거야!”

여귀진의 진지한 모습에 희야는 잠시 얼떨떨했지만 불현듯 약간 웃고 싶어졌다. 연약하고 착하기 그지없는 벗이 모든 책임을 떠안는 말도 할 줄 안다니. 청양 세자라는 자기 자리도 지키지 못해서 고향으로부터 먼 곳에 보내져 자기 뜻대로 하지도 못하는 인질이 된 몸이 아니던가. 정말 여귀진이 그리 생각한다고 해도 그가 과연 자신을 얼마나 도와줄 수 있을까?

그러나 희야는 비웃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약속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막사 입구로 걸어간 여귀진은 막사의 청회색 모전(毛氈)1) 휘장을 마주했다. 멀리 지옥의 사형장 같은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오래 들으니 그것도 5리 밖이 아니라 아주 멀리 떨어진 세상 끝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전쟁터의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 말 울음소리, 비명이 바람에 휘말려 푸른 하늘로 올라갔다가 또 바람을 타고 자신의 귓가로 불어온 것 같았다.

여귀진은 이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게 될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막사 문의 휘장도 젖히고 싶지 않았다. 두꺼운 모전 휘장이 겨우 남은 한 겹의 보호막 같았다. 여귀진은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그는 살며시 휘장의 안쪽에 손을 댔다. 맞은편 전쟁터의 스산한 기운과 비애, 절망이 느껴지는 듯했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매우 빠른 속도였다. 여귀진은 흠칫 놀랐다. 현재 치중 부대에는 전장에 나갈 수 없는 마바리뿐이었다. 하지만 천둥 같은 저 말발굽 소리는 괴력을 지닌 사나운 말이 확실했다.

뭘 어찌할 새도 없이 청회색 모전 휘장 전체가 한쪽 성벽이 무너져내리듯 툭 떨어져 나가며 여귀진의 머리를 눌렀다. 그와 거의 동시에 여귀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쇠 빛깔의 군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무쇠 칼빛이 문 휘장에 휘감긴 채 여귀진의 이마를 향해 전력으로 내리쳐졌고 적홍색 군마의 두 발이 허공에 드리워진 문 휘장을 밟았다. 말 등에는 적색 갑옷을 입은 무사가 타고 있었는데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순간 허공에서 진짜 악귀로 변한 것 같았다.

“뇌기다!”

희야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는 치중 부대 병사들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뇌기다! 뇌기!”

밖에서 누가 고함을 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외침은 돌연 목구멍에 걸리며 끊어졌다.

* * *

1) 짐승의 털, 특히 양모(羊毛)에 습기, 열, 압력, 마찰을 가하여 섬유를 서로 얽어서 짠 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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