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54화 (154/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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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상양혈 (6)

성 밖의 들판에서는 돌을 던지던 투석기가 잠시 멈추었다. 상양관 위로 빽빽하게 퍼붓던 화살도 돌연 그쳤다.

성벽에서 500보 거리에 진을 치고 수비하던 보병들은 조심스럽게 후퇴했다. 동륙에서도 유명한 휴국의 장궁수, ‘자형장사’가 이미 최전방에 대열을 이루었고 그들 앞으로는 방어용 나무 울타리가 세워져 있었다.

궁수들은 빈 활을 당기고 있었다. 날카로운 화살은 언제든 뽑아 쓸 수 있도록 옆의 흙에 전부 꽂아두었다. 그들은 군에 들어온 첫날부터 정교한 장궁을 받았다. 사고로 파손되지 않는 한 이 자형목으로 만든 장궁은 그들이 퇴역하거나 전사할 때까지 함께했다. 그들은 정성을 들여 자기 활을 조율하고 손질했으며 활시위에 기름을 발랐다. 자기 손가락처럼 활이 익숙해지도록 매일 100대 이상의 화살을 쏘는 연습을 했다. 자형목궁의 사정거리는 놀랍게도 300여 보나 되었는데, 철갑옷을 꿰뚫을 정도로 힘도 충분했다. 이 자부심 강한 궁수들은 말없이 기다렸다. 그들은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타오르는 성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궁수들은 곁눈질로 시선을 맞추었다. 주위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전우의 격렬한 심박 소리도 들릴 것 같았다.

하당군 병사들은 손바닥 두께에 사람 키만 한 쇠 방패를 높이 들고 머리 위를 가렸다. 방진 하나가 천천히 상양관 아래로 전진했다. 방진 중앙에는 120명이 밀고 있는 공성 기구인 서각충이 있었다. 통나무로 만든 거대한 추가 전진하면서 축바퀴가 굴러 우르릉 소리가 났다. 추에는 쇠로 만든 거대한 머리가 박혀 있었는데, 코뿔소의 커다란 뿔처럼 날카로웠다.

그 어떤 성문도 개량된 이 대형 무기 앞에서는 산산이 조각날 것이었다. 무쇠로 만든 천계성의 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거대한 방패로 형성한 거북이 등딱지 같은 수비는 방패 아래에서 서각충을 미는 병사들이 우전에 다치지 않도록 보호했다. 유일한 위협이라면 성 위에서 수백 근의 돌이나 뇌목을 내던지는 것이었다. 그 끔찍한 무게에 방패 아래에 있는 사람은 다진 고기가 될 수도 있었다.

자형장사가 하늘을 향해 장궁을 반쯤 잡아당기며 서각충을 위협하는 적을 향해 화살을 쏠 준비를 했다. 하당 군사들은 자형장사의 최전방 대오 속에 뒤섞여 자루가 나무로 된 쇠갈고리로 상노의 쇠시위를 잡아당기고 화살촉이 쇠로 된 대형 화살을 얹었다. 화살 하나의 길이가 사람만 했다. 모든 화살이 휙 소리를 내며 활시위를 떠나면, 그 순간에는 성벽 위의 누구도 감히 머리를 내밀지 못할 터였다.

서각충이 완만하게 성으로 접근해 갔다. 추의 긴 뿔은 어느새 상양관의 종잇장처럼 약해진 수비를 뚫었고 이제 백병전(白兵戰)1)을 펼칠 일만 남았다.

그러나 리군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화살을 쏟아붓지도 않고, 우려했던 뇌목과 돌덩이를 던지지도 않았다. 사나운 불길에 타들어 가고 있는 성벽 위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뇌열지화의 커다란 깃발도 이미 내려갔다. 서각충이 성문 아래에 도착했다. 군사들은 기다란 밧줄 수십 개를 이용해 쇠사슬에 매달린 거대한 추를 힘껏 잡아당겼다가 일제히 힘을 뺐다. 수천 근의 거대한 추가 성문을 세게 쳤다. 성문은 곧 쪼개질 듯한 굉음을 내며 힘겹게 버텼다. 군사들은 포기하지 않고 재차 긴 밧줄을 잡아당겼다가 다시 힘을 풀었다. 이번 충격은 효과가 있었다. 날카로운 우각이 숙철로 감싼 문을 찔렀고 성문 전체가 진동했다. 성벽 위에서는 석회 부스러기가 바스스 떨어졌다.

서각충이 다시 한번 성문을 가격했다. 주위에서 거대한 방패를 든 군사 250명이 서각충을 엄호했다. 성문이 붕괴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식원이 제 숙부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몇 번 더 치면 성문은 무너질 겁니다. 리국공은 우리가 이렇게 무거운 물건을 상양관까지 가져왔다고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식연이 담배를 피우며 고개를 저었다.

“병기는 작은 수단에 불과하다. 전쟁은 사람이 싸우는 것이야.”

그의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상양관 안의 고요가 돌연 깨지며 낮고 묵직한 포효가 흘러나왔다. 태곳적 거대한 짐승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포효하는 것 같았다. 서각충을 조종하던 군사들은 순간 멍해졌다.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의 가슴속에 공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짐승이 강철 족쇄를 벗어 던지고 혈관 속에 흐르는 흉포한 성질을 억누르지 못한 채 언제든지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 같았다.

포효성은 점점 더 강해져 거의 성벽을 부술 듯했다!

연합군의 장군들이 한쪽에 말을 세웠다. 여섯 장의 전기(戰旗)가 한데 모였다. 장군들은 말없이 서로만 쳐다보았다.

“리군이 성을 나와 전쟁을 하려나 봅니다.”

고월의가 나직하게 찬탄하며 말했다.

“백 대장군의 책략이 정말 뛰어납니다. 이런 강풍이 부는 날씨에 수십만 근의 장작을 상양관에 던져 넣으니 역시나 짙은 연기를 견디지 못하는군요.”

“성을 나온다고요?”

식원의 안색이 변했다.

“그럼 얼른 서각충을 철수시켜야지 않습니까! 리군이 성을 나오면 저희 방진 하나는 금세 집어삼켜지고 말 겁니다!”

식연이 조카의 어깨를 꾹 누르며 말했다.

“늦었다. 저 방진은 원래 탐색을 위해 내보낸 것이다. 전장에서 저런 부대는 생존 가능성이 본디 크지 않다. 저들이 상양관 성문을 여는 임무를 완성하게 두어라.”

백의는 잠자코 있었다. 그는 손에 든 대나무 퉁소 한 자루로 상양관 안에서 들려오는 포효성에 맞춰 말안장을 두드렸다.

“적려의 용맹함이라면, 저들이 성을 나와 결전을 벌였을 때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이 없소. 우리가 야수를 나오게 만들었으나, 야수도 제 흉포함을 한껏 드러낼 터인데 백 대장군은 양측이 공멸할 수도 있다는 걱정은 안 드시오?”

비안이 싸늘하게 말했다.

“비안 장군은 아직도 내가 사전에 공격 시기를 고지하지 않고 갑자기 공격을 감행하여 불만인가 보오?”

백의가 말안장에서 몸을 약간 숙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야수를 동굴에서 몰아내는 이 방법은 너무나도 쉽게 방어할 수 있소. 저들이 만약 성 안에 물을 충분히 준비해 두었다면 불은 금방 꺼졌을 거요. 병법가의 책략은 상대의 예상을 뛰어넘어야 하는 법, 비안 장군이 양해해 주시오. 깊은 밤 공성을 위해 장군들을 고생시킨 점, 예서 사죄드리겠소.”

“지금에 와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너무 늦지 않았소?”

강무외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내 이전에 팔록원에서 적려가 돌격하는 모습을 보았소. 우리는 궁수가 한참 부족하오. 저들은 분명 보병이 전방에서 돌격할 거요. 보병은 방패를 들 수 있는 데다 목표가 작아서 기병처럼 죽이기가 쉽지 않지. 백 대장군은 충분한 준비를 해두었겠지요?”

백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준비해 두었소. 더불어 술자리도 준비하였으니 함께 높은 곳에 올라 구경이나 하십시다. 장군들은 동륙의 명장들로 이곳에서 목숨 걸고 싸울 필요 없잖소.”

정규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혈전으로 명성을 얻은 그는 언제나 앞에서 군사들을 이끌었다. 또한 통솔자가 신망을 얻으려면 반드시 맨 앞에서 적진으로 돌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 백의에게 반박하기도 곤란했다.

“가십시다!”

백의가 손짓을 하고는 말머리를 돌려 떠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7만 연합군의 거대한 중진이 위치한 곳으로 벌써 우뚝한 목탑루가 세워져 있었다.

백의의 뒷모습을 본 장군들은 서로를 흘끔 쳐다보고는 잇달아 말을 몰아 백의의 뒤를 따랐다.

쌀쌀맞고 오만한 백의가 마음에 드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동륙 제일 명장의 위엄과 연합군 통수라는 지위 때문에 백의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곳에 와 오랜 시간 지내면서 이번에 처음으로 백의의 서슬을 느꼈다. 여전히 그는 별말 없이 조용했지만 고요함 속에 시퍼런 서슬을 품고 있었다.

식연은 여전히 검은 깃발 아래 말을 세우고 서 있었다. 그는 느릿느릿 담배를 피우며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바라보았다. 식원이 말을 몰아 제 숙부 곁으로 다가왔다.

“숙부. 분부하실 일이 있는지요?”

식원이 나직하게 물었다.

“적려와 뇌기에 정면으로 대항하지 마라. 목성루를 세우고 방어만 해. 네 수하들은 약한 병사들이다. 사자와 호랑이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식연은 식원을 보지도 않고 길게 연기를 한 모금 뱉어내며 말했다.

“지난번 리국공과 맞닥뜨렸을 때는 네가 어쩔 수 없이 지휘를 한 것이었다만 이번에는 정말로 대군을 지휘해 맞서야 한다. 멋지게 해보거라.”

“네!”

“리군 중에 포위망을 뚫는 작은 부대가 있는지 잘 살펴라. 만약 그중에 소주 공주의 흔적이 보이면 그 대오는 필사적으로 저지해야 한다!”

“네!”

“공주를 구할 수 없다면 개의치 마라. 단, 절대 리군이 공주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식연이 고개를 돌려 조카를 쳐다보았다.

식원은 순간 몸을 바르르 떨며 물었다.

“그 말씀은…….”

“어리석은 녀석. 내 이리 분명하게 말했는데도 못 알아듣다니.”

식연이 조카의 투구를 툭툭 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소주 공주는 황녀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도 반은 그 공주 때문이지. 공주를 리군의 손에 두면 끝없는 우환이 생긴다. 황성에서 공주에게 관심을 갖는 것도 꼭 희 황제 핏줄의 여황제를 보고자 함은 아닐 게야. 그러니 차라리 죽게 둘지언정 리국의 손아귀에 둘 수는 없다.”

식원은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제 숙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병법은 교활하다. 정치는 더욱 그러하지.”

식연이 말머리를 돌려 떠나가며 말을 이었다.

“전장 밖의 수많은 음모는 모두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아니 된다.”

서각충이 다시 가격을 시작했다.

상양관의 높고 커다란 성문은 활활 타오르는 사나운 불길과 강력한 충격에 벌써 비틀리고 변형되었다. 붉게 달궈진 쇠막대와 타들어 가는 나무 부스러기가 잇달아 떨어져 내렸다. 성 밖, 수만 명의 시선이 전부 이 성문에 모였다.

쿵 소리가 나고 서각충이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무거운 대문은 뜨거운 불길과 함께 와해되었고 불타던 거목이 무겁게 바닥을 내리찧으며 무수한 불똥이 튀었다. 흡사 지옥의 문이 열린 듯했다. 연합군 병사들이 “됐다.”라고 외치려는 찰나, 이글거리는 불길 속에서 웅혼한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불에서 태어난 괴수처럼 준마 한 필의 검은 윤곽이 높이 뛰어올랐다.

말이 거북 껍데기 같은 수비 위로 떨어졌다. 네 발에는 천근 이상의 힘이 실렸다. 방패를 높이 들고 있던 군사들은 이런 큰 압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내 무너지며 자기 방패에 눌려 뼈가 부러졌다.

* * *

1) 무기를 들고 적과 가까운 거리에서 맞붙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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