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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상양혈 (5)
세찬 바람이 남쪽의 들판에서 휘몰아쳤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었다.
상양관의 성벽 위에는 수천 더미의 모닥불이 지펴져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역풍에 수척 길이로 늘어지며 전체 성벽을 붉게 물들였다. 보병들은 빈 장궁을 잡아당긴 채 성가퀴 옆에 숨어 있었다. 켜켜이 포개진 이들이 1장 남짓한 너비의 성벽에 쫙 깔렸고, 투석기와 상노도 이미 자리를 잡았다. 영무예는 뇌단영의 비호 아래 성벽에 올랐다. 훈련이 잘된 적려 군사들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들은 영무예가 성벽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도록 쥐 죽은 듯 조용하게 길을 비켰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상양관 주위로 10리 초원이 개미가 빽빽하게 들어찬 듯했고, 이 개미떼가 기어감에 따라 전체 지면이 오르락내리락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무수한 불빛이 반짝였다. 먼 곳에서는 예닐곱 장 높이의 거대한 공성기가 소에 이끌려 천천히 전진하고 있었다.
“무슨 투석기가 저리 크지?”
장박이 놀라 낮게 외쳤다.
보통 투석기는 높이가 두세 장에 지나지 않아서 돌을 던져도 400에서 500보 밖에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제후국 대군 뒤편에서 천천히 전진 중인 투석기는 높이가 족히 예닐곱 장은 되어 상양관의 거대한 성벽에 비견할 만했다. 사현이 입을 열었다.
“진국의 투석기입니다. 천근 이상의 석재를 쏠 수 있지요.”
“백의가 투석기로 성벽을 무너뜨리려는 것인가?”
영무예가 물었다.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백의가 쳐들어오지는 못할 겁니다.”
“어째서?”
“우리 적려는 동륙 최고의 보병이라고 할 만합니다. 연합군에 순국 풍호, 초위 창병, 휴국 장사 모두 실력이 걸출한 강병이겠으나 근접전으로 성을 함락할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은 백의 수하에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백의의 수완을 지켜봐야겠군.”
영무예가 고개를 저었다.
투석기가 800보 남짓한 거리에 멈추었다. 그 앞으로 일련의 불더미가 타올랐고, 진국 기계 부대의 군사들이 상반신을 훌렁 벗은 채로 커다란 단지의 채유와 소기름을 불더미에 뿌리는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사나운 불이 하늘로 치솟으며 가을밤의 한기를 물리치고 초원을 환하게 밝혔다. 네 마리 수소가 한 조가 되어 천천히 투석기의 긴 팔을 잡아당겼다. 긴 팔의 다른 한쪽은 평형추로 천 근짜리 무쇠였다. 그리고 기계 부대의 군사들은 손에 부삽을 들고 거대한 불덩어리를 퍼내 투석 바구니에 놓았다.
진 앞의 부장 하나가 붉은 깃발을 휘둘러 거세게 지면을 내리쳤다. 파도처럼 둔탁한 울림이 일고 수십 대의 투석기가 일제히 가동되었다. 순식간에 불빛이 공중에서 떨어져 내렸다. 수십 개의 불덩어리가 새카만 밤하늘을 가르며 상양관 성벽 위를 향해 쏘아졌다.
“왕야!”
사현이 외쳤다.
그중 불덩어리 하나가 영무예와 공주를 향하고 있었다. 사나운 불덩어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화구(火球) 같았다. 영무예와 공주의 인영을 전부 뒤덮을 수 있을 듯한 정도의 이글대는 열기가 덮쳐왔다.
장박은 옆에 있던 보병 하나의 무거운 방패를 빼앗아 달려 나갔다. 장박이 한 걸음 내딛자마자 누군가가 방패를 재빨리 빼앗아 갔다. 이글대는 강풍에 붉은색 전포가 펼쳐지고 영무예가 30근에 달하는 쇠 방패를 휘둘렀다. 그는 거대한 신처럼 고함을 지르며 한 걸음 내디뎠다. 방패 측면과 불덩어리가 충돌했다. 맹렬한 불덩어리가 방패 위에서 부서졌다. 불타는 파편은 어마어마한 여력을 지닌 채 성안에 흩뿌려졌다. 한바탕 불비가 내린 듯했다. 영무예도 거대한 힘에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연도술(煙濤術)입니다!”
사현이 말했다.
영무예는 방패를 던지고 몸에 묻은 재를 털어냈다.
“짐작했네. 백의가 바람의 기세를 빌렸군. 7일을 약속하고 바람을 기다린 것이었어! 이런 강력한 바람은 정말 얻기 어렵지!”
그 불덩어리가 붉게 달아오른 돌이었다면 영무예의 힘이라 해도 벌써 으스러져 형체를 알 수 없는 핏덩어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오르는 파편들은 그저 장작이었다. 뭉게뭉게 검은 연기를 피워냈고, 그 연기 속에는 눈물을 유도하는 유황 냄새가 섞여 있었다. 수백 근의 땔나무가 타들어 가며 피어난 짙은 연기가 주변 수장 거리의 공간을 뒤덮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궁수들이 조준할 수가 없습니다.”
사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준할 필요 없네. 그냥 쏘라 해!”
영무예가 외쳤다.
“화살을 있는 대로 쏴라!”
투석기가 계속해서 발사되었다. 수십만 근의 장작더미가 성벽 주위에 쌓이며 타들어 갔다. 짙디짙은 검은 연기가 공중으로 피어올랐다. 검은 장막이 하얀 돌로 쌓아 올린 커다란 성을 완전히 가린 듯했다. 궁수들은 밖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데다 짙은 연기 속에서 매캐한 냄새까지 참아야 했다. 연기에 쏘인 두 눈이 붉게 부어오르고 눈물이 흘러내린 탓에 그들은 눈을 감고 화살을 쏠 수밖에 없었다.
온 하늘을 가득 채운 불덩어리에는 새카만 구형(球形)의 보따리도 끼워져 있었는데, 그것들은 전부 상양관 성문을 향했다. 그 보따리들로 인해 성문 밖의 천근이나 되는 갑문이 잇달아 갈라졌고 보따리 안에 든 누런 기름이 성문 틈새로 스며들어 갔다. 부대를 이끌고 성문을 지탱하던 백부장이 누런 기름을 슥 만져보았다. 손이 온통 미끌미끌해졌다. 그는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고는 소리쳤다.
“소기름이다!”
불화살 십수 발이 일제히 성문에 꽂혔다. 사나운 불길이 일고 곧 성문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며 위아래로 난 틈에서부터 타들어 갔다. 성문에 바짝 붙어 있던 군사 몇 명은 아차 하는 순간 몸에 소기름이 묻었고 삽시간에 갑옷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막 물을 끌어오려던 군사들은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글대는 열기가 엄습해 왔다. 누구도 성문에 다가갈 수 없어 그저 사나운 불길 속에서 성문이 비틀어지고 모양이 변하는 것을 멀뚱히 지켜볼 뿐이었다.
“왕야. 불길이 너무 셉니다. 잠시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사현이 영무예를 상기시켰다.
영무예는 고개를 저었다.
“피할 것 없네. 궁수가 조준할 수 없으니 성문을 지킬 수도 없어. 백의는 이제 보병들로 성을 공격해올 것이네. 내가 직접 성을 나가지 않는다면 말이야.”
“정면 대결을 준비하시는 겁니까?”
사현이 물었다.
“자네와 같은 책사들이 내놓은 백중세의 책략을 다 쓰고 나면, 결국에는 무사들의 대결만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지.”
영무예가 손가락으로 푸른 ‘절운’을 튕겼다. 칼에서는 맑고 힘찬 소리가 울렸다.
영무예가 칼을 세우고 짙은 연기가 섞인 세찬 바람을 들이마셨다.
“이것이 무사의 방식이다! 다소 어리석어 보이기는 해도 아주 통쾌한 편이지!”
진한 연기가 목으로 들어가자 영무예는 허리를 숙이고 격하게 기침을 토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몇 걸음 물러나 기침을 하면서 흘러나온 눈물을 닦아내야 했다.
“왕야!”
장박은 몹시 놀랐다. 그는 무쇠 같은 주상이 기침을 하느라 몸을 펴지 못하는 것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제기랄!”
영무예가 몸을 일으킨 뒤 호되게 욕을 한마디 뱉었다.
“이리 큰 연기를 뿜어내다니 설마 취사병 출신인가?”
일순 어리둥절했던 장박과 사현은 시선을 맞추고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영무예도 눈꼬리를 닦아내고는 그들과 함께 웃었다. 주위의 군사들은 군을 통솔하는 세 사람이 생사의 기로에서 너털웃음을 치는 것을 보고 그만 얼떨떨해졌다.
“역시 왕야십니다!”
사현이 공수를 올렸다.
“생사는 그저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거늘 두려울 게 뭐 있는가? 죽을 것 같았으면 산전수전 다 겪은 우리 셋은 죽어도 벌써 죽었어야지. 구원에서 시골 제후가 되었을 때도 우리는 생사를 앞에 두고도 이리 크게 웃으며 나아가지 않았던가?”
영무예가 짧은 구레나룻을 매만지고는 돌연 크게 외쳤다.
“장박! 말은 든든히 먹였나!”
“먹였습니다!”
장박이 목청 높여 대답했다.
“그럼 줄을 세우게!”
돌아선 장박은 빠른 걸음으로 성 아래로 내려갔다.
영무예는 짙은 안개 너머로 멀리 연합군의 진을 바라보며 딸의 손을 꼭 잡았다.
“옥아. 내가 너를 여기 데려와 이 대전을 보여줄 수 있어 무척 기쁘구나. 전장의 칼과 창에는 눈이 없으니 어쩌면 너도 살아서 리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이 바로 네 아비가 거침없이 누빈 영토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구나! 커다란 전장을 보아라. 6국 연합군은 우리 리국의 적이다. 아비는 지금 군대를 이끌고 나가 수많은 영웅들과 싸울 것이다. 무서우냐?”
영옥이 고개를 저었다. 옥처럼 투명한 얼굴은 의연했다.
“무섭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좋구나. 아주 우렁차!”
영무예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너는 왜 무섭지 않으냐?”
영옥이 손가락으로 성벽 뒤편의 빽빽하게 모인 적려 보병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또 한쪽에 검을 쥐고 서 있는 사현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사 장군과 장 장군, 그리고 아버지의 부하들 모두 아버지를 따라 전력을 다해 싸울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무섭지 않습니다!”
“대답은 더 훌륭하구나!”
영무예가 미소를 지으며 딸의 얼굴을 가볍게 꼬집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구나. 왜 너는 사내가 아닌 것이냐?”
영무예가 걸음을 옮겨 성 아래로 내려가려 하자 사현이 돌연 한 걸음 앞서 나와 그를 막았다.
“국사가 백의의 대군을 전멸시킬 수 있는 책략이 있다 하였지요. 이미 최후의 고비에 이르렀으니, 감히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국사가 왕야께 올린 책략이 대체 무엇입니까?”
영무예가 담담하게 웃었다.
“내 칼이 이미 울부짖고 있네. 결전을 앞둔 지금, 그런 자를 신경 써서 무엇 하겠는가?”
사현은 크게 놀랐다.
“국사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시었는데 설마 아무 결론도 나지 않은 것입니까?”
“책략은 있네. 나도 국사에게 그리 실행하라 허락하며 함께할 인력도 배치해 주었지. 하지만 자네는 국사를 믿는가?”
영무예가 사현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사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소신은 국사의 정체와 의도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한데 왜 내게 묻는 것이지?”
“왕야께서도 어느 정도는 국사를 의심하십니까?”
사현은 깜짝 놀랐다.
“내력도 알 수 없고 목적도 알 수 없는 데다 이해할 수 없는 비술까지 지니고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신을 천지간의 가장 신성한 주재자로 여기며 전도하려는 자를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영무예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뇌벽성은 내 바둑판 밖의 바둑알일 뿐이네. 그자가 있든 없든 뇌기군은 여전히 뇌기군이고 영무예는 여전히 영무예지! 무사는 평생 자기 손에 쥘 수 있는 것만 믿네!”
영무예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 휙 휘둘렀다. 장도 절운이 그의 앞에 가로놓였다. 사나운 불길이 비치며 한 줄기 고운 빛의 호선이 그어졌다.
영무예가 몸을 돌려 성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그의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온몸이 붉은 탄화마가 불안하게 울부짖었다. 말을 기르는 군사 두 명이서도 꽉 붙들 수가 없었다. 영무예가 다가가 손바닥으로 말을 세게 쳤다.
“무서운 것은 아니겠지?”
탄화마는 여전히 경계하며 두 귀를 쫑긋 세웠지만, 명백히 진정되어 보였다. 몸을 돌려 말에 올라탄 영무예가 무거운 참마도를 들었다. 칼날이 주위 불빛에 붉게 비쳤다. 그가 허공에 칼을 휘두르자 묵직한 바람 소리가 일었다. 사현은 뇌단영을 이끌고 공주를 보호하며 그의 뒤에 줄을 섰다. 점점 많은 뇌기가 장박의 지휘 아래 갑옷을 갖추고 말에 올랐다. 그들은 가지런하게 뇌단영 뒤로 줄지어 섰다. 뇌기병의 적홍색 가죽 갑옷은 사나운 불길에 비쳐 더욱 피처럼 붉어 보였다. 전체 성벽이 이미 불바다가 되었는데도 백의는 계속 수십만 근의 장작을 상양관으로 던져 목재로 짓지 않은 성에 불을 붙였다.
“백의는 정말 내 적수로구나.”
영무예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가 천천히 참마도를 들어 올렸다. 창기병들은 창대로 지면을 두드리고 칼을 든 기병과 궁기병은 무기로 말안장을 두드렸다. 수천 뇌기군이 일제히 나직하게 으르렁댔다.
“와! 와! 와! 와!”
도통인 사현과 장박도 예외가 아니었다.
차츰, 외침이 모여 나직하고 무시무시한 함성이 되었다. 지면도 창기병의 두드림에 서서히 진동했다. 그때 진국은 이미 투석기를 불에 달군 돌을 발사할 수 있도록 개조하고 무거운 돌을 달군 후 성안으로 던졌다. 돌이 바닥에 내리쳐지며 으스러졌다. 그곳에 있던 병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고 그 주위의 병사들도 부서진 돌에 화상을 입거나 타상을 입었다. 그러나 뇌기군의 낮은 포효는 멈추지 않고 도리어 더욱 우렁차졌다.
이 포효성이 주위 흐름을 완전히 장악하자 군사 하나가 커다란 깃발을 높이 들고 휘둘렀다. 뇌열지화의 깃발이 허공에서 펄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