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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상양혈 (3)
백의는 미소를 띤 얼굴로 꽃씨를 심은 화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세상의 모든 장미가 따뜻한 봄날에 꽃을 피운다. 하당에서만 가을에 꽃이 피는 가을장미가 나지. 가을장미는 사실 국화의 한 종류다. 그저 꽃 모양이 장미와 비슷하며 희귀한 진홍색이지. 남회성에는 자량가라는 길이 있는데 강기슭 한편에 전부 이 꽃이 심어져 있다. 서리가 내릴 시기가 되면 십 리가 온통 서리 내린 후의 붉은 빛으로 물든다.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내려가며 보면 얼음과 불이 한데 어우러진 듯한 것이 남회성의 절경 중 하나다. 그러나 우리 초위국에서는 이런 가을장미를 심어서 키워낸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대장군께서 원예에도 조예가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백의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웃으며 말했다.
“자후. 나는 참 재미없는 사람이지 않으냐? 네가 나를 따른 5년간 늘 활시위에 걸린 화살처럼 바짝 긴장해 있었지. 딱히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고 이따금 퉁소를 불어도 근심 가득한 모습이고 말이야.”
사자후가 살짝 망설이다 몸을 굽히며 대답했다.
“네.”
“사실 처음에는 나도 이렇지 않았다.”
백의가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20년 전, 나와 식연이 벗이었을 때 말이다. 이름 없는 무사였던 우리는 황성 거리에 꽃가게를 열어 용돈을 좀 벌어볼까 했다. 그때 식연은 가게를 열려면 남들에게 없는 필살기가 있어야 인기를 끈다면서 여름 내내 연구해 테가 파란 장미를 피워냈고 해희람(海姬藍)이라 불렀다.”
백의는 차분하게 탁자의 일렁이는 촛불을 보며 넋을 놓고 말을 이어갔다.
“그때 나와 식연은 우리가 명장이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서로가 날카롭게 맞서는 날이 오리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 난세가 사람을 부득이하게…… 몰아가는구나.”
백의가 낮게 탄식했다.
“지금의 나는 동맹국까지도 예측하고 매사 한 걸음 앞서 나가야 하다 보니 이렇게 재미없고 지루한 사람이 되었다.”
“대장군께서는 국사를 돌보는 데 참으로 신경을 많이 쓰시지요.”
사자후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러나 명신과 명장의 우월성은 적재적소에 사람을 기용하고 부리는 것에 있다 생각합니다. 직언을 용서하십시오. 장군의 방식은 고생을 자처하는 일일 뿐, 장기적인 방법은 못 됩니다.”
백의가 빙그레 웃었다. 약간 지친 기색이었다.
“자후. 너는 모른다.”
백의는 잠시 침묵했다.
“남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을 찾기가 매우 어려워서다. 내가 초위국에 출사(出仕)한 것은 대윤을 지키겠다는 뜻을 품었기 때문이다.”
사자후는 깜짝 놀랐다.
“대장군께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어질고 의로운 군인이십니다. 제후국에서도 존경하고 우러르지 않는 이가 없지요.”
“자후. 너는 사람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천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백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황실에 진정으로 충성하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모두가 충군의 이름을 빌려 난세에 지위를 얻으려는 속셈을 품고 있지. 막사에 있는 저자들처럼 말이다!”
사자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후들의 호랑지심(虎狼之心)은 저도 들은 바 있습니다. 영무예가 사자라 한다면 저들을 흉악한 늑대에 비유하는 것도 결코 지나치지 않지요.”
“저들의 행동은 옳다.”
백의가 낮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후. 내 너를 막부의 수좌로 앉힌 것은 네 책략보다는 네 순진함을 중히 여겨서다. 이 시대에 낡은 황제는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
사자후는 몹시 놀랐다. 단연코 백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까닭이었다.
“나는 이런 대역무도한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으냐?”
백의가 살며시 화분들을 어루만졌다.
사자후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라 그저 멍하니 앉아 백의를 바라보았다.
백의는 담담한 표정으로 나직하고 느긋하게 말했다. 자기와 전혀 무관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정권 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계속 한 나라의 권력을 쥐고서 제후들의 주군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힘 있는 지도자여야 한다. 애석하게도 우리 백씨 가문의 혈족이 아무리 방대하다 한들 여전히 일개 가문에 불과하지. 한 가문에서 동륙을 공포에 떨게 할 지배자가 나오는 일이 말처럼 쉽겠느냐? 더구나 나처럼 분파한 가문의 자제들은 서서히 본가에서 멀어지게 되니 결국 본가에 남는 것은 호사를 부리며 안일하게 사는 황족 후손뿐이지. 그들은 검을 쥐어본 적도 없고 사람을 죽여본 적도 없다. 심지어 천하의 균형과 권력의 짓밟힘도 이해하지 못하지. 그들은 선조의 위용에 의지한 채 태청궁 옥좌에 앉아 통치를 이어간다. 그러나 10년, 100년, 1천 년이 지나면 선조의 위용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니 이 왕조는 썩은 나무가 부러지듯 쉽게 무너지게 된다. 온실 속에서 길러진 사람은 영원히 영무예처럼 산야에서 태어난 수사자와 싸워 이기지 못한다!”
백연이 길게 숨을 들이켰다.
“이것이 왕조의 운명이다. 풍염 황제 대까지 이른 장미 황제의 위용은 이미 최후의 찬란한 빛이었다. 그 빛은 이미 꺼졌고 더는 이어갈 방법이 없다. 새끼 양이 다스리는 나라와 사자가 다스리는 나라, 어느 나라의 백성이 행복하겠느냐?”
사자후는 망연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사자가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이 행복할 수 있다.”
백의가 대신 대답했다.
“사자는 그 백성을 먹어치울 수도 있으나 자기 백성을 지킬 수도 있다. 그들이 사자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천하가 크나큰 양떼라면, 양치기는 절대 양일 수 없다.”
사자후는 거대한 압력이 가슴을 고통스럽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숨이 막힐 듯했다. 그동안 백의는 그에게 속내를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사자후도 그를 그저 목숨 바쳐 나라에 충성하는 천하의 명장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진상(眞相)은 그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드러났다. 백의의 마음속에는 ‘충성’ 두 글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대 장군께서 그동안 황실을 지키신 이유가…….”
사자후는 간신히 여기까지 말하고는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엎드려 절을 올렸다.
“대장군께 다른 원대한 계획이 있다면, 저는 초야에서 장군께 발탁된 이로서 장군과 함께 하겠다고 목숨을 걸고 맹세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장군, 제가 마음 놓을 수 있도록, 죽어도 후회가 없도록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백의가 빙긋 웃으며 살며시 자후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자후. 나를 오해했구나. 내 오늘 갑자기 네게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오늘 밤 이후 내 생사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곧 결전이 시작될 것이다.”
사자후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오늘밤입니까?”
“그렇다.”
백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해 나와 식연이 처음 추엽 산성에서 영무예를 만났을 때, 그는 황실에 충성하는 젊은 제후였고 우리는 소년이었지. 그러나 나와 식연은 굳게 믿었다. 어느 날 이자의 붉은 깃발과 사나운 말이 밀물처럼 동륙을 휩쓸 것이라고. 쇄하산 팔록원 일전 당시 나는 국내의 압력에 직접 출정하지 못해 영무예와 결전을 치를 수 없었다. 나 역시도 그때는 그의 서슬에 맞서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자와의 결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이 일전을 계획하고 준비해온 지 오래되었다.”
백의가 고개를 쳐들고 탄식했다.
“남아로 태어나 영웅과 마주서는 일은 늦어도 한스럽고, 일러도 한스럽구나! 나는 이번 전쟁에 완벽한 자신은 없다. 어쩌면 결국 양쪽이 모두 크게 피해를 입을 수도 있지. 네게 부탁할 일이 있다.”
“황공합니다! 대장군의 분부라면 무엇이든 따를 것입니다! 이 한 몸 뉘일 곳 없이 비참하게 죽는다 할지라도 소신은 장군을 따르며 마음의 평안을 도모할 것입니다.”
백의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전사하면 분명 국내 정세에 변동이 일 것이다. 현재 초위국은 군신이 권력을 장악해 국주에게는 다스릴 힘이 없다. 이를 테면…… 로중개가 있지. 로중개는 나의 정적으로 내가 앞길을 막아 억눌려 있은 지 오래되었다.”
사자후가 당당하게 백의의 말에 응했다.
“저도 그래 보였습니다. 백일하에 드러난 로 재상의 야심은 장군의 위엄으로만 제압할 수 있지요. 이 일전에서 대장군이 돌아가시면 저는 목숨 바쳐 반드시 국주를 지키고 역신을 참할 것입니다!”
“아니. 로중개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그의 배후 세력은 덩굴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지. 지금 네 능력으로는 그를 꺾지 못한다.”
백의가 손을 내두르며 촛불을 응시했다.
“그러나 나도 준비를 해두었다. 초위국에 돌아가면 내 서재로 가라. 책꽂이 널판의 틈에 네게 남겨둔 서신이 있다. 서신에는 그 일을 어찌 처리할지에 대한 계획도 담겨 있다. 어떤 일들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한 단계, 한 단계씩 실행해야 한다. 순서에 조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 계획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네가 세상에 나아가 내 권력을 이어받고 국주를 지킬 절대적인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백의가 고개를 돌려 사자후의 눈을 응시했다.
“기억해라!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네게는 단 한 번의 기회뿐이다.”
사자후는 얼음이 등줄기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을 흠칫 떨며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알겠습니다!”
“좋다.”
백의는 몹시 지친 듯 의자 등받이에 기대 막사 지붕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결전이 곧 시작되겠구나. 벌써 소리가 들린다.”
“언제요? 무슨 소리입니까?”
사자후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귀에는 어떤 이상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들어보아라. 바람 소리다.”
백의가 낮게 말했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돌연 장막의 휘장이 젖혀지고 차가운 바람이 쏴아아 쏟아져 들어왔다. 백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흰색 전포를 걸치고 옷깃을 매만지더니 성큼성큼 휘장 옆으로 걸어갔다.
“근위병 대대는 전령을 준비하라!”
“네!”
휘장 밖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바람에 휘장이 다시 한번 젖혀졌다. 검은 옷을 입고 칼을 찬 군교들 한 무리가 소리 없이 반 무릎을 꿇고 막사 밖에 앉아 있었다. 백의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군교들이 즉시 흩어졌다.
백의를 쫓아 막사 밖으로 나온 사자후는 그와 함께 휙휙 몰아치는 한풍 속에 섰다. 바람은 더욱 맹렬해졌고 방향에도 변화가 생겼다. 해 질 무렵부터 서쪽으로 치우쳤던 바람은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불어온 바람은 차가운 칼로 몸을 베는 듯 날카로웠다. 백의는 군 막사 위의 깃발이 바람 속에 펄럭펄럭 나부끼는 것을 바라보았다. 언제든 찢겨나갈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자후는 그제야 백의가 소리를 들어보라 했을 때 정말 특이한 소리가 났었음을 깨달았다. 깃발이 말려 올라가는 소리가 삽시간에 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