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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상양혈 (2)
정규는 입을 뗐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거칠게 한숨만 내쉬며 의자 손잡이를 쳤다.
“사전 준비 없이 경솔하게 성을 공격하는 것은 목숨을 갖다 버리는 짓이지요.”
고월의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백 대장군이 이런 일을 벌일 리 없습니다. 7일의 약속이란 것이 영무예를 불안하게 만들기 위한 의병(疑兵)1)술은 아닐까요?”
식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내일 분명 공격할 것이오. 백 대장군의 생각을 한 번도 이해해본 적은 없으나 내가 지금까지 알아온 바로 백의는 말한 것은 반드시 실행하고 행동하면 반드시 결과를 내는 사람이오. 적을 상대로 할지라도 예외는 없지. 리국공에게 이레를 약속했으니, 내일 자정 전에 그는 반드시 상양관 꼭대기에 오를 것이오. 다만…….”
“다만?”
고월의가 캐물었다.
“이것이 그간의 선례를 깨는 첫 실수가 아니라면 말이오.”
식연이 양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대답했다.
“누구에게나 첫 실수는 있는 법이지요.”
비안의 말에 식연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비 장군 말씀 잘하셨소. 양군 진영 앞이 아니었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내기나 할까 싶소만. 백의가 이번에 동륙 제일 명장의 명성을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에 한번 걸어보시겠소?”
비안이 미간을 치켜뜨며 식연을 흘끗 쳐다보았다.
고월의는 흠칫했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식 장군께서는 여전히 백 대장군 쪽에 걸겠다는 뜻 같군요?”
“오랜 우정을 생각해서라도 난 이번 판은 반드시 도와야 하오.”
식연이 무심하게 말했다.
막사 휘장이 걷히고 하얀 의갑을 걸친 초위국 군사가 등을 구부리고 나무 쟁반을 받쳐 든 채 들어왔다. 쟁반 위는 흰색 삼베로 덮여 있었다.
“장군들을 뵙습니다.”
주위를 한 번 훑어본 군사가 예를 올리자마자 물러가려 했다.
“백 대장군을 찾아왔느냐?”
식연이 큰 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식연은 군의관 통령이자 검시관을 겸직하는 그 군사를 알아보았다.
“무슨 냄새야? 뭔데 이리 역하지?”
정규가 눈살을 찌푸리며 코앞에서 세차게 부채질을 해댔다.
모두가 그 검시관의 몸에서 풍기는 짙은 악취를 맡았다. 불안해질 정도로 역한 냄새였다. 정규처럼 투박한 사람도 토악질이 날 것 같았다.
“며칠 전 난입한 괴상한 사람들이 남기고 간 부러진 팔입니다. 저는 부상을 당해도 아무런 감각을 못 느끼는 듯한 이들의 행동이 괴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 동료들과 검시를 해보고자 부러진 팔을 주워와 석회를 발라두었지요. 한데…….”
검시관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상한 일?”
고월의가 물었다.
“본래 석회에 묻어두면 몇 달간 아무 문제없이 보존되는데, 오늘 다시 보니 이미 말도 못하게 썩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 대장군께 보고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검시관의 말에 고월의가 역한 냄새를 꾹 참으며 앞으로 다가갔다.
“뭐라? 어디 한번 보세.”
검시관은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쟁반 위의 흰색 삼베를 걷었다. 순간 강렬한 악취에 혼절할 정도로 숨이 막혔다. 진중한 강무외도 좌석 손잡이를 꽉 붙잡고 일어나 자리를 피하려 했다. 쟁반에 놓인 부러진 팔은 이상하게 굵직하고 튼실했다. 보통 사람의 팔과 비교해 길이도 반쯤 더 길었다. 그런데 지금은 뼈가 보일 정도로 부패한 상태였다. 뼈와 암홍색 근육이 분리되고 썩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이리될 수 있지?”
고월의는 의아하면서도 불안해졌다. 석회에 묻은 시체는 수분이 빠져나간다. 더구나 지금처럼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는 이렇게 빨리 부패할 수도 없었다. 그날 밤 검은색 옷을 입은 종복이 떠올랐다. 고작 다섯 명에게 진을 짓밟힌 터라 그 일이 있은 후 모든 군 장령들의 위신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들 그리된 연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리군에서 비술을 쓰는 도사를 숨겨두었다는 소문은 진즉부터 있었다. 팔록원 대전에서도 리군이 비술로 풍장(風障)과 염화(炎火)를 사용해 대비가 안 되어 있던 제후국 연합군은 크게 고생했더랬다.
“저녁 못 먹게 하려고 썩은 고깃덩어리를 가지고 들어온 것이냐?”
불쑥 식연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어느새 고월의 옆에 선 식연이 고월의의 어깨를 토닥이며 손을 휘휘 내둘러 검시관을 물렸다.
“정말 이상하군요.”
고월의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은 굳이 생각할 필요 없소.”
식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자후가 휘장을 젖히고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외투의 쓰개를 벗고 살짝 몸을 떨었다. 귀신 울음소리처럼 거센 바람이 막사 밖을 휩쓸었고 땅은 이미 쇠처럼 꽝꽝 얼어붙어서 우단(羽緞) 겹옷으로도 냉기를 막을 수가 없었다. 목탄 화로가 지펴진 막사 안은 불길이 매우 세서 더운 느낌이 들었다. 백의는 철갑을 입지 않고 탁자 앞에 앉아서 흙이 가득 찬 도자기 화분을 열심히 만지고 있었다.
“대장군.”
사자후가 다가가 화분을 살펴보았다.
그는 백의가 모형에도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형 모형이나 공성 기구 모형을 자주, 직접 만들곤 했기에 또 새로운 장난감을 만드는구나 생각했다. 물론 백의가 만드는 것이 항상 공성용 무기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한데 그 도자기 화분은 너무 볼품이 없었다. 저잣거리에서 동치(銅錙) 몇 푼으로 살 수 있는 흙 화분과 비슷했다. 사자후는 백의의 막부에서 수좌(首座)를 맡은 지 근 5년이었기에 스스로 무기에 남다른 안목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화분의 용도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자후. 장군들은 아직 안 갔느냐?”
화분에 몰두한 백의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을 뿐 사자후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아직입니다. 다들 본부 막사에서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다. 장군을 못 뵙고 자리를 뜨려니 영 못마땅한 것 같습니다.”
“내버려두어라.”
백의가 무심하게 말을 툭 뱉었다.
백의의 손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사자후는 숨을 죽였다. 백의는 맨처음 화분 안의 흙이 느슨해지게 파더니 돌을 골라내고 맑은 물을 뿌렸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한 포 뿌리고 그 위로 다시 흙을 한 층 깔았다.
백의는 열 손가락이 흙투성이가 되었음에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대장군. 이것이……?”
사자후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백의는 살짝 놀라며 대답했다.
“식연이 가져온 가을장미 씨앗이다. 벌써 두 화분이나 심었고 나머지는 여기에 있지. 날씨가 정말 추워지기 전에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싶구나.”
어리둥절해진 사자후를 보고 백의는 숯불 아래에서 다른 화분 두 개를 집어 들어 그의 앞에 놓았다.
“이건 며칠 전에 심은 것이다. 이리 빨리 싹을 틔울 줄은 몰랐지. 하당의 가을 장미는 역시 남다른 품종이로구나.”
그제야 백의가 정말 꽃을 심었다는 사실을 믿게 된 사자후는 쓴웃음을 몇 차례 짓고는 절을 올렸다.
“대장군. 예서 꽃을 심고 계시면 방문을 사절하는 저희만 고생입니다.”
“나를 못 만나서 장군들의 불만이 심하더냐?”
사자후가 고개를 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입이 닳도록 좋게 말씀드렸지만, 장군들은 대장군께서 오수에 들어 아직 안 깨셨다는 말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성미가 불같은 순국 정 장군은 우리 군이 전쟁을 두려워하며 대장군께서는 겁을 먹었다 했지요. 저희를 거의 뭐 역적을 비호하는 한패라고 말하더군요.”
“정규는 솔직한 사람이지. 그가 뭐라 욕을 하든 걱정할 것 없다. 순간적으로 욱해서 뱉는 말일 뿐이야. 내가 걱정되는 이는 비안과 강무외다. 비안은 성격이 음험한 데다 우리 군을 내내 주시하고 있지. 강무외 장군은 수십 년 명장으로 그가 정말 우리를 무례하다 여기면 수습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백의가 담담하게 말했다.
“장군께서는 원래 사람들에게 일부러 오만하게 굴지는 않으시잖습니까. 비안과 강무외가 불만을 품을 것을 걱정하시면서 왜 피하고 만나지 않으시는 겁니까?”
백의가 잠시 침묵했다.
“위엄을 보이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불안한 마음이 들게 해야지 너무 친해져서는 안 된다.”
“어째서인지요?”
사자후가 절을 올렸다. 가르침을 청한다는 뜻이었다.
“머지않아 상양관을 함락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제후국 대군은 반드시 천계성으로 밀고 나가 황제를 알현하고자 하겠지. 한편으로는 황성에 자신의 세력도 만들고, 또 한편으로는 황실 앞에서 공적을 자랑하고 싶어서다. 그러나 황실에서는 말 타고 칼을 든 우리가 황성에 들어가려는 것을 곱게 볼 리 없다. 제후국 중에서는 아군의 병력이 가장 강하고 황실과도 가장 친밀하다. 그러니 황실 세력은 반드시 우리 군을 등에 업고 제후들을 무마시켜 천계성의 평안을 지키려 하겠지. 그러면 우리와 제후국 군대의 관계가 더 미묘해질 것이다.”
백의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기보다는 그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우리 입장을 잘 고수하는 편이 낫다. 우리 군을 경계하는 마음이 들면 더 조심하게 되어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이니.”
“만약 황실에서 연합군은 퇴각하라는 교지를 내리면 전군이 응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절대 응할 리 없다. 대윤 왕조 역사상 처음으로 황성에 자기 세력을 이룬 제후가 영무예이지만 그는 혼자였다. 우리가 이제 영무예를 몰아낼 것이나, 황성에 들려 하는 제후국은 도리어 여섯이 되지. 통찰력 있는 황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사자 한 마리가 나을지 늑대 여섯 마리가 나을지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 만약 내가 황실에서 일을 무마시키려 나온 사람이라면 반드시 제후들 사이를 맴돌 것이다. 결국 가장 좋은 책략은 우리 초위국과 연합해 나머지 제후를 위협하는 것이지.”
한동안 잠자코 있던 사자후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께서는 과연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생각이 깊으십니다. 다만 내일이 약속한 기한인데, 공성은 어찌…….”
사자후는 주저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경험으로 볼 때, 상양관을 강공하려면 반드시 호흡을 맞춰보는 사전 훈련이 필요했다.
상양관은 성벽이 높고 험하여 타고 오르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며 물과 불도 제 몫을 다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서각충 같은 공성 기구를 강제로 부딪쳐 성문을 여는 수밖에 없다. 그럼 군사들은 분명 화살비와 굴러떨어지는 돌 아래 노출될 테니 적절한 배치와 이동이 사상자를 줄이는 관건이다. 그러나 지금 바로 군사들을 나열해 진을 세워본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백의는 흙투성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앉아라. 아는 길도 물어가라 했다. 전장 앞에서 냉정해지지 못하는 것은 군 통솔자에게 크나큰 금기다. 내 계획에 조금만 착오가 생겨도 진 앞의 수천 명이 죽는다. 너는 하당의 십리상홍을 아느냐?”
사자후는 백의의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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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적의 눈을 속일 의도로 꾸며낸 군사 또는 그런 군 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