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49화 (149/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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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상양혈 (1)

팔월 스무이레. 막 해가 저물었다.

당양곡 어귀의 나무집에서는 화엽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향 연기 속에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원학이 문밖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군. 민양성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민양성에서?”

화엽이 눈을 떴다. 한참을 잠자코 있던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 싶지 않으니 돌아가라 해라.”

원학이 명령을 받고 떠나갔다.

잠시 후 원학이 되돌아왔다.

“장군. 손님이 군영 문밖에서 무릎을 꿇고서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나무집 안에서 화엽이 눈앞의 오래된 직도를 응시하며 말했다.

“이곳은 전쟁터이지 수행하는 곳이 아니라고 전해라. 피에 마음이 더럽혀지고 싶지 않다면 일찌감치 떠나라 해.”

“장군. 그자에게는 그런 말이 별 소용이 없을 듯합니다.”

원학이 나직이 고했다.

그는 문밖에서 기다렸지만 오래도록 집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원학이 어쩔 수 없이 뒤돌아 떠나려 하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전신에 철갑옷을 두른 화엽이 작은 등잔을 하나 들고 걸어 나왔다. 그것은 방 안에 있는 유일한 등잔이었다. 그가 나오자 방 안이 온통 깜깜해졌다.

화엽은 등잔을 들고 천천히 군영 입구로 걸어갔다. 풍호 정예병들이 근위병의 눈짓에 멀찍이 비켜섰고 주위가 텅 비었다. 어스레한 황혼 속에 인영 하나가 군영 문밖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등에 사람 키만 한 날이 넓은 중도를 짊어지고 있었다. 2척 길이의 칼자루는 멀리서 보기에도 매우 두껍고 무거웠으며 오래되고 삼엄한 것이 사람이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상주 땅의 거인, 과부들의 무기 같아 보였다.

원학도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화엽 혼자 군영 입구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청년에게로 걸어갔다. 청년이 고개를 들어 철갑에 뒤덮인 장군을 쳐다보았다. 장군은 자신과 청년 사이에 작은 등잔을 내려놓고 먼지 속에 앉았다.

마주 본 두 사람은 오랫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화엽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투구를 벗어 한쪽에 놓았다. 마침내 등불 아래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동륙의 호신(虎神)으로 유명한 이는 강직하고 용맹해 보이는 외모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반대였다. 언뜻 보아도 가슴이 철렁하고 오싹해지며 피부 아래로 개미가 기어가는 것처럼 견디기 힘들었다. 몹시도 못생긴 사람이었다. 본디 볼품없는 외모인데 태생적으로 거대한 모반이 거의 얼굴 절반을 뒤덮어 콧대를 기준으로 절반은 시커멓고 절반은 허옜다. 게다가 얼굴을 가로지르는 칼자국도 하나 있었다. 당초 칼날에 콧등이 베이면서 얼굴 근육까지 말려 올라간 것이 평생 회복되지 못한 게 분명했다.

반면 젊은이는 생김새가 매우 수려했다. 흰색 베옷을 입고 가슴을 반쯤 드러낸 청년은 거대한 칼을 묶은 넓은 가죽 띠를 튼실한 가슴 근육에 바짝 조여 매고 있었다. 표범처럼 흉맹한 체형이었으나 얼굴은 아이처럼 선한 젊은이였다.

“이리 하니 사사로이 만나는 모양새가 되었구나.”

화엽이 나직이 말을 꺼냈다.

“등을 가져왔다. 이 주위에서는 우리 대화를 아무도 듣지 못하니, 너와 나 사이의 전도(傳道)라 치자꾸나……. 그러나 화명, 너는 여기에 와서는 안 되었다.”

화명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저는 아이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떠나시고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전장에서 깨달음을 얻으시는데 왜 저는 민양에서 혼자 무력하게 삶의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까? 하여 아버지와 함께 전쟁을 하려 제 칼을 가지고 이곳에 왔습니다.”

“인생은 하나의 긴 문이다. 그것은 없는 곳이 없지. 전장에서도 민양에서도 똑같다. 나와 함께 전쟁을 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각기 다른 곳에 있어도 하나의 길고 긴 문이 서로가 있는 곳을 관통한다. 그 문을 넘을 수 있는지는 네가 탐욕과 미혹으로 생겨난 우매함을 버릴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그리고 그 길에서 내 정신은 언제나 너와 함께 하고 있다. 내 몸이 어디에 있든지 말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요? 머나먼 민양에서 아버지가 돌아와 함께 수행하며 깊은 깨달음을 얻을 날을 기다리는 저는요?”

화명의 물음에 화엽은 흠칫했다.

“내 죽음은 네 깨달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내 정신이 육신을 떠난다 해도 나는 우리가 함께 나눈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정신은 어쩌면 저를 보러 민양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바보처럼 매일 수행하며, 아버지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릴 겁니다.”

화명은 말할 때 목소리가 차분했으며 아무 표정도 없었다.

“방 안에서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아버지의 정신이 창밖을 지나가겠지요. 저는 아버지와 함께 눈밭에서 고생하며 수행하는 꿈을 꿀 겁니다. 한데 이튿날 아침에는 아버지께서 당양곡 어귀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받겠지요.”

화명의 얼굴은 폭풍우 직전 빽빽하게 구름이 낀 것처럼 돌변했다. 슬픔과 무력감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고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제게 남기는 해탈입니까?”

화명은 엎드려 대성통곡했다. 건장하고 용맹한 몸집으로도 가족을 잃게 되리라는 슬픈 예감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잠자코 있던 화엽은 한참 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잘못했다, 아이야.”

화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화엽을 보았다.

“나에 대한 네 의존과 사랑은 본디 잘못된 것이다.”

화엽이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살육에 혼란해하던 시절 네가 나를 구했지. 네 눈을 보았을 때, 나는 일말의 사심이나 잡념이 숨어 있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눈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여 민양성에서 너처럼 때 묻지 않은 마음을 가진 아이와 함께 살면 내 마음도 평온해질 거라고, 내가 죽인 영혼도 구원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너를 보호해 주겠다고 다짐했지. 네가 난세의 연이은 전쟁에 빠져들지 않도록, 범속한 것들이 네 마음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런데 결국 너를 괴롭힌 것은 나라는 아비였구나. 이 또한 탐욕과 미혹이 만들어낸 어리석음이겠지. 화명, 우리는 해탈한 적이 없다.”

화명은 물끄러미 화엽을 바라보았다.

“내 존재가 네게 그리 중요하냐? 네 존재도 내게 그리 중요하냐? 사실 우리는 그저 이 세상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기나긴 문을 통과하고자 하는 영혼들일 뿐이다. 그러나 끝내 우리는 함께 타락하겠구나. 공동의 수행이 우리 둘 사이에 근심의 끈을 묶어놓았기 때문이다.”

화엽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가장 강한 독은 외로움이다.”

화엽은 의갑의 먼지를 털며 일어났다.

“남도록 해라. 나라고 어찌 아들을 곁에 두고 싶지 않겠느냐? 내가 죽고 혼백은 달 아래를 거닐지도 모르는데 너는 민양에서 내가 돌아오길 기다릴 거라 생각하니, 그리고 네가 이리 통곡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감사합니다, 아버지!”

화명이 놀라며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위해 군도를 갈겠습니다. 민양성에서처럼 매일 아침 제일 먼저 아버지의 칼을 갈을 갈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칼 가는 기술은 계시지 않을 때도 쉬지 않고 연습했습니다!”

“화명. 잘못 이해했구나. 칼 가는 기술을 가르친 것은 심혈을 기울여 네 정신을 갈고 닦으라는 하나의 비유였을 뿐이다.”

화엽이 돌아서 천천히 떠나갔다.

“나는 네가 나를 따르며 칼 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화명이 몸을 일으켰다. 의부의 뒷모습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화엽이 불현듯 몸을 돌려 화명을 향해 웃어 보였다.

“사실 맨 처음에 나는 네가 요리사가 되길 바랐다. 안타깝게도 내가 요리를 할 줄 몰라 가르칠 수 없었지.”

화엽은 웃고 있었지만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처량하고 지친 웃음이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내 잘못은 너를 내 동행 수도사로 보지 않고 친아들로 여긴 데 있다. 네가 타락하면, 그것은 나의 죄다.”

같은 시각, 상양관 밖의 초위군 본부 막사.

제후국 대군의 통수들이 거의 모두 자리했는데 가운데 자리만 비어 있었다. 백의는 오지 않았다. 비안의 싸늘한 눈빛이 문 휘장의 틈새를 넘어 밖을 살폈다. 쏴아아 가을바람이 스며들어왔다.

겨우 며칠 사이에 상양관 아래는 날이 추워졌다. 며칠 내리 서리도 내려 늦가을 느낌이 났다.

눈이 마주친 강무외와 고월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규는 눈을 부릅뜨며 식연을 보았고 식연도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내일은 백의가 약속한 공성 날짜였다. 그러나 백의가 그동안 전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 아무도 그의 속내를 알아낼 수 없었다. 강무외는 각 제후국 장군들에게 함께 백의를 찾아가 물어보자고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백의 막사에서는 사자후가 나와 그들을 맞으면서 백 대장군은 오후에 쉬러 들어가 아직까지 깨지 않았다고 전했다. 장군들은 오랫동안 논의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백의의 오만하고 냉담한 태도도 불쾌했지만 그의 명성이 걸려 화를 내기도 곤란했다. 정규는 이를 악물고 의자 손잡이를 내리치며 눈을 부라렸다. 튀어나오려는 육두문자를 삼킨 지 벌써 수차례였다.

침묵을 깨트린 이는 역시 고월의였다.

“식 장군. 우리 중에 백 대장군과 오랜 벗은 장군뿐입니다. 백 대장군이 연일 사람을 만나주지 않는데, 아까 식 장군께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았지요. 내일 정말 성을 공격할 수는 있는 겁니까? 저희 군은 전혀 준비가 안 되어 병사들이 불안해합니다. 식 장군께서 저희의 의문을 좀 풀어주시겠습니까?”

그는 공손한 얼굴로 정중히 부탁하는 모습이었다.

식연은 더 이상 침묵하기 곤란했지만, 역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고 장군. 나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오. 말하지 않고 깊이 감추어두는 습관은 없지. 우리 모두 위험을 무릅쓰고 리국공에 맞서기 위해 이곳에 왔으니 생사를 의지하는 전우가 아니오. 내가 전투 전략을 숨길 이유가 없지. 애석하게도 나는 백 대장군을 알게 된 그날부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해본 적이 없소. 내게 의문을 풀어달라 하지만, 나 역시도 의문투성이라오.”

“상양관은 지세가 높고 험하며 리군 적려는 도보전에 강하지. 성 수비는 그들이 가장 강한 분야요.”

강무외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군사를 배치하고 진을 칠지 사전에 전략을 세우지 않으면, 성을 함락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오.”

“10만 대군의 공성전이 바로 내일이오. 지금 군사를 배치하고 진을 친들 이미 늦었소. 우리는 조용히 백 대장군의 기적이나 기다립시다.”

비안이 차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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