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47화 (14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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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신의 사자 (8)

끝음에 힘이 빠져 거의 신음에 가까웠다. 최전방에서 횃불을 던진 군사들은 얼이 빠진 듯, 몸을 몇 차례 휘청이더니 잇달아 땅에 무릎을 꿇으며 서남향으로 머리를 조아려 절했다. 이어 궁수들 차례였다. 일부는 이미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지만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을 수가 없었다. 끝내 군사들은 몸을 통제하지 못했고 우전은 비스듬히 땅에 쏘아졌다. 흙바닥에 꽂히기도 하고 날아가기도 했으며 동료가 맞고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울부짖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난공불락의 방원진은 큰 바다가 갈라지듯 길을 만들어 내며 흑마가 지나갈 길을 내주었다. 길 양쪽의 군사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올렸다. 심지어 군마도 바닥에 엎어져 고분고분하게 머리를 숙였다. 후방의 군사들이 그들을 넘어 흑마를 막으려 했으나 달려 나가던 이들은 별안간 의지를 상실한 듯했다. 얼굴의 흉악한 표정이 사라지며 맥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후방의 군사들은 돌격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제자리에 선 채 물끄러미 불가사의한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

정규도 그 말이 다가오던 순간의 위엄을 느꼈다. 천하를 군림하는 황제 같았다. 정규는 태청궁에서도 이런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정규도 어쨌든 군을 통솔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왼손의 칼자루로 등허리의 급소를 쳤다. 통증의 힘을 빌려 이를 악다물고 큰소리로 외쳤다.

“젠장, 전부 안 일어나! 어디 무릎을 꿇느냐! 이 금수만도 못한 놈들!”

식연이 정규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정 장군의 용맹함은 가상하나 저자의 서슬은 피하는 것이 좋겠소.”

식연은 말을 몰아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며 흑마를 탄 사람과 정규 사이를 가로막았다.

멀리서 흑마에 탄 노인이 고개를 들어 이쪽으로 눈빛을 건넸다. 식연의 곁에 있던 고월의는 상대의 훑어보는 한 줄기 눈빛에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전율이 일었다.

말에 탄 노인은 방원진을 지나고 있었다. 종복들도 흙먼지를 밟고 나는 듯이 달렸고 철갑옷에서는 쟁그랑쟁그랑 소리가 울렸다. 노인은 그림자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고월의는 멀찍이 있는 백의를 보았다. 백의는 묵묵히 흑마를 탄 기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규와 비안, 강무외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못마땅했지만 그자의 위엄에 감히 맞서려는 자는 없었다.

군을 통솔하는 자가 그자의 앞에 나갔다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무릎을 꿇게 된다면 전군 앞에서 다시는 위엄을 보이지 못할 것이다.

고월의는 다시 제 옆의 식연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식연은 이미 말 등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황급히 방원진 쪽을 보았다. 검은색 도포를 입은 자가 우두커니 넋을 놓고 있는 군사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갔다.

방원진에서 식연 혼자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발소리도 나지 않았으며 검은 번개처럼 매우 빨랐다. 그가 스치고 지나가는 군사들만이 겨우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숙부!”

식원이 다급하게 소리쳤으나 식연은 돌아보지 않았다. 식원은 식연이 한 손으로는 칼자루를 단단히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검집을 꽉 움켜쥔 것을 보았다. 검은 아직 검집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고월의는 아주 짧게 침묵을 지키다가 돌연 말을 잡아당겼다. 군마의 긴 울부짖음과 함께 고월의가 당당하게 출격했다. 그의 군마가 인파를 통과해 드넓은 길을 훌쩍 뛰어넘으며 곧 빠져나가려는 흑마를 쫓았다. 흑마에 탄 노인과 네 명의 종복은 놀라 질주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공격!”

고월의가 활을 쏘았다. 화살이 번개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의 화살은 궁수 대대의 보통 사병과는 현저하게 달랐다. 화살 위에 구멍이 나 있어서 활시위를 떠난 화살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웅장한 힘의 화살은 검은 도포를 입은 노인의 등으로 곧게 쏘아져 나갔다. 종복은 무거운 구리 방패를 휘두를 틈이 없었다. 마지막 한 사람이 돌연 급하게 멈추어 섰다. 꼿꼿하게 선 그는 고월의가 쏜 화살을 향해 손을 뻗더니 철갑을 휘감은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쳤다.

화살은 정확히 손바닥에 맞았다. 철갑의 방어를 뚫고 화살의 절반이 손바닥을 관통하고서야 화살의 힘이 전부 소모되었다.

종복은 미동도 하지 않고 죽은 듯이 서 있었다. 흡사 부상의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잠시 후 그가 손을 거두어들이더니 다른 한 손으로 앞부분 화살대를 부러뜨려 던져 버렸다. 그리고 박혀 있는 화살 뒷부분 반절도 뽑아내 묵묵히 흙바닥에 내던졌다.

그때, 흑마와 다른 세 명의 종복이 멈추었다.

노인은 멀리서 고월의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제법이군. 보통 사람치고는 매우 강한 편이구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고월의가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타고 있던 군마의 몸에 힘이 빠지며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노인은 흠칫하는 듯했다. 이어 검은색 인영이 노인의 지척에서 훌쩍 날아올랐다. 공중에서 동종(銅鐘)을 두드리는 듯한 검의 울림이 일었다. 노인에게 가까워지자 기습하는 자의 허리춤에 있던 고검도 더 이상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검이 검집에서 나오면서 푸른 쇳빛이 반호를 그리며 흩뿌려졌다. 속도와 시기, 위치 모두 방어하기 힘들 정도로 정확했다. 고월의의 화살이 종복의 주의를 끈 덕분에 식연은 이 찰나의 순간을 잡을 수 있었다.

노인의 금 소리가 멎었다. 흑마가 일어서며 힘차게 앞발로 발길질을 했다. 말 주인의 마음을 읽은 듯 식연을 공격하려 했다.

부상을 입은 종복이 식연과 동시에 뛰어올랐다. 그는 노인의 말 등에서 검을 뽑았다.

그의 검의 길이는 식연의 검의 두 배였다. 검등은 도마처럼 두꺼웠고 널따란 검신은 성인의 손바닥만 한 너비였다. 광택을 보니 순수한 청동으로 주조된 검이었다. 절대 한 사람이 휘두를 수 있는 무게로는 보이지 않았다. 북극성 사당 안의 무신에게 제를 올리는 도구 같았다. 그러나 그 종복은 체구가 거대했다. 식연에 비하면 몸집이 우람한 전신(戰神)이었다. 그는 이렇게 무시무시한 검을 휘두르면서도 식연 못지않게 빨랐다. 두 자루의 검이 공중에서 맞부딪치며 챙 소리가 났다.

식연은 그 힘을 받아 몸을 뒤집으며 종복의 무거운 몸 반대로 튕겨져 나갔다. 착지와 동시에 검끝으로 땅을 짚었다. 검등을 따라 흘러내린 검은색 피가 천천히 흙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거대한 검을 휘두르던 종복의 팔과 끔찍한 청동검이 그의 발아래 떨어졌고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종복은 여전히 아픈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는 피가 과도하게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다른 손으로 잘려나간 팔오금 부분을 틀어막더니 고개를 숙이고 흑마 옆으로 물러났다.

“저자보다 강하군. 누구시오?”

노인이 위엄 있게 물었다.

“그런 멍청한 질문은 관두시오. 안하무인인 당신들은 아직도 이것이 사소한 패배일 뿐이며 승산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전방을 보시오!”

식연이 일어나 검을 가로들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식원은 제 숙부가 이렇게 살기를 완연하게 드러내며 말하는 것을 난생처음 보았다.

노인이 고개를 들어 전방을 보았다. 둘러싸인 횃불의 중심에 백의가 백마를 타고 서 있었다. 그는 활시위를 바짝 당긴 은회색 장궁을 들고 노인의 미간을 겨누고 있었다. 백의는 무표정했고 두 팔은 무쇠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노인과 그의 종복들은 압도된 듯했다. 아까 고월의가 화살을 쏜 거리가 노인에게서 더 가까웠지만, 종복은 여전히 한쪽 손을 다쳐가면서도 수월하게 막아냈다. 그러나 지금 백의는 그들을 그곳에 선 채로 감히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화살촉의 은회색 선득한 빛이 그들의 혼백과 용기를 뽑아가 버린 듯했다. 주위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쥐 죽은 듯한 적막 속에서 불꽃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소리만 들렸다.

노인이 고개를 숙이고 검을 가로든 식연을 흘긋 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검 정도. 그렇다면 우전우장군 식연 각하겠군.”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백의를 보았다.

“장궁 추익. 저 멀리 있는 이는 어전월장군 백의 각하겠고.”

식연과 백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절묘한 전술의 조합이로군. 장궁 추익에 걸려들면 어찌되는지 들어보았소. 방어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활이라지. 식 장군이 존귀한 몸으로 크나큰 위험을 무릅쓰고 내 제자들과 필사적으로 겨룬 것이 내 뒤편에 있던 제자들의 시선을 분산시켜 백 대장군이 나를 조준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군. 참으로 대단한 전술이오.”

뒤편의 제자들이 느릿느릿 서로 시선을 맞추었다. 눈짓으로 말을 주고받는 듯했다.

“장신전(長薪箭) 앞에서 괜한 모험하지 마라.”

노인이 작은 목소리로 제자들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백 대장군. 그대는 나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이 확실하오. 하지만 이런 안개 속에서도 그 화살이 나를 죽일 수 있다 자신하시오?”

노인이 물었다.

“자신이 없다면 이 전쟁은 훗날로 미루는 게 어떻소?”

식연도 고개를 돌려 말에 탄 백의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적막만이 흘렀다. 백의는 활을 당겨 상대를 조준한 뒤로 마치 한 덩이 바위처럼 숨도 쉬지 않았다.

“절대적인 자신은 없소.”

마침내 백의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내 이번에는 백 장군에게 감사드리겠소. 장군의 운이 좋다면 우리는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세 사람을 하루에 다 보다니. 정말 기쁘구려.”

백의가 천천히 활을 거두며 말했다.

“다시 만난다면 그때 우리는 별로 운이 좋은 것이 아닐 게요. 이만 가도 좋소.”

“백 대장군에게 남기는 작은 선물이오.”

노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돌연 손을 휘둘러 공후 현을 뜯었다. 그의 공후 연주는 시종 느리고 은은했는데 지금은 세찬 천둥처럼 모든 현이 일제히 울렸다. 처량하고 날카로운 금 소리가 칼처럼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의 금 소리가 닿는 곳마다 짙은 안개가 엷어지기 시작했다. 넋을 잃고 꿇어앉아 있던 군사들도 잇달아 정신을 차리고 망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칼을 쥔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칼자루가 온통 축축해진 것을 느꼈다. 면갑(綿甲)을 걸친 병사들은 갑주가 온몸에 들러붙어 몹시 무거웠다. 한바탕 가랑비를 맞으며 행군한 것 같았다. 무겁고 음습했던 공기가 돌연 맑고 촉촉해지며 사람들의 머릿속 혼돈이 걷혔다. 모두가 막연한 꿈을 꾼 것 같았다.

노인은 진영의 한가운데에 말을 세우고 멀리 백의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다시 군사들을 둘러보고는 말을 몰아 떠나갔다.

감히 그를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그의 눈빛은 고결하고 위엄이 넘쳐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상양관 성문이 열리고 수백 명의 뇌기가 말을 몰아 성을 나왔다. 노인의 대오와 뇌기군의 대오가 만났다. 뇌기군은 흑마를 에워싸고 그를 중앙에 두고 보호하며 성문을 향해 빠르게 퇴각했다. 팔을 잃은 종복은 흑마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여전히 발걸음이 유성처럼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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