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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신의 사자 (7)
“풍염 황제 시대에는 천하 통일 자체가 하나의 꿈이었습니다. 북벌을 할 필요도, 회유를 할 필요도 없었지요. 북륙이 자립하게 두고 후손이 정벌하기를 기다렸어야 합니다. 풍염 황제의 능력이면 태평한 황제가 되고 그리하여 국력을 강성하게 키우는 것은 일도 아니지요. 풍염 황제의 잘못은 애초에 그가 천하를 통일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 후의 수단이 아무리 절묘했다 하더라도 목표가 잘못되었는데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소위 황제는 평생 한 번의 지략을 쓸 수 있을 뿐입니다. 태평한 황제가 되든가, 패주 황제가 되든가, 아니면 잔뜩 움츠러든 비겁한 황제가 되든가 잘 생각하고 천천히 선택해야지요. 머리가 느린 것은 나쁜 게 아닙니다. 동작이 빨라도 소용없고요.”
사현이 빙긋 웃었다.
“힘들게 황제가 되었는데 태평한 황제가 되거나 비겁한 황제가 되는 게 지략이라 한다면 어찌 달갑겠는가?”
영무예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역대 황제가 모두 장미 황제 같다면, 그 누가 양관 혈전을 치르는 데 군량과 마초, 병사를 거듭 바치겠습니까?”
사현이 손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왕야께서 두실 차례입니다.”
바둑판을 본 영무예는 흠칫 놀랐다.
이미 다음 수를 생각하고 바둑돌을 집어 들었는데 지금은 아무리 봐도 내려놓을 데가 없었다. 사현의 한 수는 정확히 두 집 사이의 요충지를 막고 있었다. 처음에 그 위치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영무예는 일순 허둥지둥했다.
사현은 잠자코 영무예를 쳐다보았다. 영무예가 손을 맞비비는 모습을 한참 보던 그는 결국 마땅찮아 하며 내려놓았던 바둑돌을 도로 가져와 손바닥에 쥐었다.
“자네는 여우야.”
영무예가 사현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다 알아차렸네. 내가 말하게 유도한 다음 천천히 이 수를 생각했겠지. 자네에게 속았으니 나도 천천히 생각해야겠네. 속임수를 썼으니 이번 판 승부는 무효야.”
사현이 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알아차리셨군요. 하지만 저는 그저 지장에 불과하니 속임수를 조금 써도 품위가 손상되지는 않지요. 왕야께 제왕의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천천히 생각하십시오. 저는 기다려드릴 인내심이 있습니다.”
“이번 패배는 인정할 수 없네. 아까 풍염 황제 이야기는 반은 인정하지.”
영무예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고개를 숙인 채 바둑판을 뚫어져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뇌단영 군사 하나가 소리 없이 막사 안으로 들어와 반 무릎을 꿇었다.
“왕야. 성 밖에 짙은 안개가 꼈습니다.”
“안개가?”
사현이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중추(仲秋)1)에 안개가 끼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더구나 10만 대군이 성을 포위하고 매일 밤낮으로 장작을 태워 재가 날리고 먼지가 일어나니 습한 날씨에는 안개가 일기 쉽지.”
“네!”
일어나 떠나려던 병사가 살짝 머뭇거렸다.
“하지만…….”
“안개가 엄청납니다! 엄청나요!”
막사 휘장이 젖혀지고 장박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는 연신 투덜거렸다.
“정말 괴상한 날씨야!”
“정말 그리 안개가 짙은가?”
사현이 깜짝 놀랐다. 성벽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그는 안개가 많이 짙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장박은 극히 보기 드문 날씨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성문 맞은편의 사람도 안 보이네. 성에서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우물 난간에 부딪칠 뻔했다니까.”
“정말 짙은 안개가 꼈는가?”
영무예가 진한 눈썹을 치켜 올렸다.
“바둑판은 그대로 두고, 나가서 보고 오도록 하세.”
세 사람이 나란히 막사를 나섰다. 문을 나서자마자 사현은 깜짝 놀랐다. 막사 주위는 엷은 안개가 떠다니는 정도였다. 그런데 상양관 남쪽 성벽으로 짙은 안개가 수렴(水簾)처럼 우뚝 솟아오른 성벽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넓디넓은 폭포 같았다. 성벽 위, 거의 만 명에 달하는 수비군의 인영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그들 손에 들린 횃불은 보였는데 따스한 빛살로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안개가 언제부터 꼈지?”
영무예가 미간을 구긴 채 내다보았다.
“방금요. 순식간에 성벽까지 불어왔다니까요?”
장박이 대답했다.
“안개가 심하군.”
사현이 나직이 말했다.
“당연하지. 눈 달렸으면 다 보일 걸 말해 뭐 한다고.”
장박이 무시하며 말을 던졌다.
“무겁다는 뜻이었네.”
사현이 깊이 한숨을 들이마셨다.
“보통 안개는 가벼워서 위로 올라가지. 장박, 안개가 폭포처럼 아래로 걸린 것을 몇 번이나 보았나?”
사현이 영무예에게로 몸을 틀었다.
“특별한 냄새가 나지는 않으니 적군이 비술의 독장(毒瘴)을 쓴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평범한 날씨 같지는 않습니다.”
“왕야! 안개도 자욱한데 그냥 성을 나가 기습하시죠!”
장박은 안개가 왜 이리 무거운지에 대한 문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출정하고 싶어 안달했다.
“백의는 뭘 하고 있지?”
영무예가 물었다.
“성 위에서 보기에는 저들도 역시 안개에 갇혔는지 불더미를 여러 개 지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덕분에 그들의 위치도 드러났고요!”
장박이 대답했다.
“백의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소리군.”
영무예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역시 명장이로구나. 장박, 내가 5천 뇌기를 줄 테니 성을 나가 공격하라고 하면 하겠는가?”
“소신, 반드시 왕야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장박은 크게 기뻐했다.
“횃불을 피울 것인가?”
장박은 깜짝 놀랐다.
“횃불요?”
영무예가 장박의 오금을 걷어차며 쌀쌀하게 비웃었다.
“횃불을 붙이면 적군은 화살을 비처럼 쏟아 부어 자네 진형을 무너뜨릴 것이네. 그러나 횃불을 지피지 않으면 질주하면서 뒤편의 기병들이 앞쪽의 기병들에게 부딪치지 않는다 장담할 수 없으니 백의 앞에 가기도 전에 지리멸렬할 것이네. 사현은 나를 행동이 앞서는 무사라 하지. 그래도 내 자네에게 많이 고마워해야겠어. 머리를 굴리지 않는 자네가 있어준 덕분에 내가 리국에서 가장 머리를 안 쓰는 무사는 아니게 되었으니까.”
장박은 다리 힘이 극도로 좋았다. 그는 오금을 맞고 움찔했지만 이내 똑바로 서서 머리를 긁적였다.
“왕야. 또 저를 놀리셨군요…….”
영무예는 뒷짐을 진 채 막사로 돌아가려다가 사현을 가리키며 말했다.
“원래 바둑판에서 사현을 놀려주려 했는데 결과적으로 내가 놀림을 당했네. 이렇게 자네라도 놀리지 않으면 내가 울화통이 터지지 않겠는가.”
그때 영무예는 뒤편에서 들려오는 준마의 힘찬 울부짖음에 깜짝 놀라 휙 몸을 돌렸다.
막사 앞 말뚝에 매인 그의 탄화마가 긴 갈기를 털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러고는 억지로 말고삐에서 벗어나려 하더니 서남쪽을 향해 두 앞발굽으로 땅을 박차며 사자처럼 군림했다. 극도로 경계하고 극도로 불안한 모습이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상양관 곳곳에서 군마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사이사이로 개가 초조하게 짖어대는 소리가 뒤섞였다. 탄화마의 우렁찬 소리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지만.
그 소리에 사현도 온몸에 슬며시 전율이 일었다.
“이러면…….”
영무예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보통 안개가 아닌 게로군. 아마도 그자가 온 것이겠지?”
장박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현. 뇌단영을 통솔하고 말을 준비하게. 성을 열고 맞이할 채비를 해!”
영무예가 나직하게 말했다.
“네!”
“잠깐!”
영무예가 손을 내두르며 사현을 제지했다.
“장박. 자네가 가게. 사현은 남아서 나와 계속 바둑을 두지.”
영무예는 전과 다름없이 바둑을 두자고 말했지만, 이미 놀이를 한다는 홀가분한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얼음에 뒤덮인 것처럼 분위기가 으스스했다.
“네!”
장박이 대답했다.
“정중해야 하네! 불손하게 굴어서는 안 돼!”
영무예가 한마디를 보탰다.
“네!”
장박이 칼을 쥐고 빠른 걸음으로 떠나갔다.
영무예는 뒤돌아 사현과 함께 막사로 돌아왔다. 사현은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쫓아갔다.
영무예가 돌연 멈추어 서더니 고개를 돌려 냉랭하게 사현과 눈을 맞추었다.
“바둑 한 판을 더 두어야겠어. 그자가 막사 안으로 들어와 볼 때까지 최대한 점잖게 두어야 해. 그자에게 보여줘야겠네. 나 영무예는 그가 도와주러 왔다고 해서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말이네. 그를 거부하지는 않겠지만 내가 천하를 위해 자신에게 굽실대며 복종하기를 바란다면 나를 너무 우습게 본 것이야. 나는 칼만으로도 천하를 얻을 수 있어!”
말발굽소리가 점점 가까워져왔다. 정규는 칼을 움켜쥔 양손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했다. 전장에 나선 지 오래되었고 수도 없이 적진으로 돌격했지만 이렇게 신참이나 보일 법한 문제가 있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정규는 옆의 식연을 흘끔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식연은 여유롭게 담뱃대를 꺼내 입에 물고 부시를 비벼 불붙은 부싯깃으로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주위 불빛에 비친 식연의 두 눈은 무서우리만치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말발굽 소리는 방원진 정중앙의 맞은편에서 들려왔다. 듣기에는 말 한 필 같았다. 다가오는 이가 정말 적이라면 그의 눈에는 이곳에 진을 친 삼사만 대군이 훤히 보일 것이다. 상대는 가장 곧은길을 선택했다. 바로 방원진의 중심을 뚫고 곧장 상양관 아래까지 가는 것.
“귀대하는 우군은 아니겠소?”
정규가 나직하게 물었다.
“어떤 우군이 이 상황에 금을 연주하겠습니까?”
고월의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칼자루를 꽉 쥐었다.
“연주가 괜찮구려. 월주의 남려풍이군. 일부러 자신이 월주 사람이라 말하는 것 같소.”
식연이 나직이 웃었다.
“리국의 원군인가? 그런 것치고는 머릿수가 적은 듯한데.”
백의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말을 세우고서 묵묵히 짙은 안개를 응시했다.
“궁수!”
백의가 갑자기 낮게 외쳤다.
“네!”
궁수 대대의 백부장이 앞으로 나왔다.
“주저 말고 모든 화살을 쏴라!”
“네!”
안개 속에서 검은 형상 하나가 나타나자 백의가 돌연 큰 소리로 외쳤다.
“횃불!”
원래 방패 뒤에 숨어 있던 앞줄의 군사 수백 명이 백의의 호령이 떨어지자 방패 앞으로 재빠르게 나와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내던졌다. 타들어가던 횃불이 공중에서 밝은 호선을 그리며 다가오는 사람의 방향으로 정확하게 떨어졌다. 횃불은 그곳에 있던 흑마에 탄 한 사람과 네 명의 종복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들은 계속 달려왔다. 바람을 거스르며 오는 듯했는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말에 탄 사람이 공후를 튕겼다.
금 소리가 은은했다.
“발사!”
백부장의 호령에 수백 대의 우전이 동일한 목표를 향해 쏘아졌다.
건장한 종복들이 흑마 앞으로 번개처럼 나타났다. 두 팔에는 구리 방패를 덧쓰고 있었다. 종복들이 두 팔을 휘두르자 화살이 방패에 맞아 불꽃을 튀기며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백부장은 활 하나만 믿고 30년을 살아온 이였는데 이런 식으로 화살을 막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고 화살의 속도는 매우 빨랐다. 보통 사람의 시력으로는 화살의 경로를 똑바로 보기도 어려웠으니 화살을 막아내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백부장은 낯빛이 확 변했다.
“발사…….”
그 소리는 채 입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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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을이 한창인 때로 보통 음력 8월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