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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신의 사자 (6)
고월의와 정규의 말이 초위군 본진의 화염장미 깃발 아래로 질주해 왔다. 백의, 식연, 강무외와 비안은 이미 측근들을 데리고 모여 있었다. 더 많은 병마가 한 부대, 한 부대 무리를 지어 커다란 깃발 아래 모였다. 제후국들은 이미 3만 여 명의 대군을 모아 동서남북 사방으로 방어진을 쳤다. 밖에는 창군, 그 뒤는 궁수, 궁수의 뒤로는 언제든 육박전을 벌일 준비가 된 보병이 섰다. 기마병은 한가운데에서 이들에 둘러싸여 보호를 받았다.
“뭔 안개가 이리 짙어?”
정규가 숨도 돌리지 못한 채,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온통 새하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진이 났나? 아니면 귀신이라도 나타난 거야 뭐야?”
“식 장군.”
고월의가 말 위에서 허리를 숙이며 식연에게 예를 올렸다.
“장군의 진영에서도 말이 놀랐습니까?”
“놀란 게 아니라 모든 말이 미쳤었지. 고 장군이 소식을 전해준 덕에 말의 귀를 막아 진정시킬 수 있었소. 안 그랬다면 우리 수비는 벌써 와해되었을 것이고 리국공이 경기병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면 그대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 거요.”
고월의에게 답하는 식연의 표정은 침착했다.
“고 장군. 순국과 진북국은 이번에 기병 부대가 출정하여 군마가 제일 많은데, 진영이 아직 혼란하진 않소?”
“수천 마리가 되다 보니 단시간에 달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삼사천 명을 모아 백 대장군의 수비를 도우러 왔습니다.”
고월의는 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간 눈썹을 치키며 안개 속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짙은 안개라면 영무예도 쉽게 움직이지는 못하겠지요.”
“일리가 있소.”
식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위국 군사들이 창병과 궁수 진열을 뚫고 나왔다. 그들은 방원진 주위로 30보마다 장작더미를 쌓고 요리사가 요리에 쓰려고 가져온 소기름을 뿌려 불을 붙였다. 커다란 불이 하늘로 치솟을 듯 활활 타오르며 주위를 환하게 비추었다. 안개는 엷어진 듯 보였지만 십여 보 거리에서는 여전히 흐릿한 인영이 보일 뿐, 얼굴을 또렷하게 알아볼 수는 없었다.
“불이 있으니 훨씬 낫군요.”
고월의가 말을 꺼냈다.
“단시간에 어디서 이리 많은 목재가 났습니까?”
식연은 웃는 얼굴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멀지 않은 곳의 백의를 보았다.
“백 대장군이 지금은 일단 불을 붙여 군의 사기를 진정시켜야 한다더이다. 그래서 내 힘들게 우리 진영에서 목성루 몇 대를 가져와 불태우도록 쪼갰소.”
고월의는 순간 놀랐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목성루 몇 대만으로는 방어하기 충분치 않으니 불을 지피는 데 쓰는 것도 좋지요. 보통 군사들은 보이지 않으면 깃발과 휘장을 가려내지 못하니 지휘할 방법이 없습니다. 저희가 모아온 수만 명도 흩어진 모래나 다름없지요. 백 대장군의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
식연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백의는 남의 떡으로 선심 쓰는 데 이골이 붙었다오.”
백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한 듯했다.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진 밖의 눈부신 불더미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규는 들고 있던 쌍마도 칼끝을 힘없이 양 옆 바닥에 늘어뜨린 채 주위를 둘러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정규는 성미가 급하고 우악스러운지라 이렇게 표정을 굳히는 일이 드물었다. 조금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정 장군은 우리 중에 가장 군마에 익숙한 분이지요. 순국의 마구간도 동륙 최고의 마구간으로 유명하고요. 장군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대체 어떤 일이 말 떼를 이리 놀라게 할 수 있습니까?”
고월의가 물었다.
정규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뗐다.
“천재(天災).”
“천재요?”
“지진, 지함(地陷), 화산 폭발, 그리고 해일 모두 말 떼를 놀라게 하오. 어느 해 여름에 바닷가 마구간 몇 곳의 군마가 미쳐 날뛴 일이 있었소. 마부를 물어 다치게 하고 울타리를 뛰어 넘어 부근의 산으로 잇달아 도망쳤지. 그 당시 정말 많은 힘을 들여 말 떼를 되찾아 왔었소. 그해 저료해에는 큰 비가 내려 서쪽부터 동쪽까지 해류의 물살이 급증했소. 천척해협을 지나갈 때는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바닷물이 솟구쳐 밀려왔지. 멀리서 본 사람 말로는 10장 높이의 해일은 보기 드문 일이라 하더이다. 주위의 어장과 부근의 논밭이 모두 파괴되었고 바닷물이 강으로 역류해 부근의 마을 몇 곳이 재해를 입었소. 민중의 인어가 법진을 설치하고 홍수를 일으켜 순국이 심한 피해를 입은 것이라 하는 말도 있었지. 그때 나는 말을 되찾으러 간 사람들 중 하나였소. 산비탈 위에 서서 아래쪽의 훼손된 마구간을 보았는데 간담이 서늘해지더이다. 말이 나를 구한 것 같았소.”
말 이야기를 하자 정규는 당당하고도 차분하게 말했으며 표정도 진지했다.
고월의가 감탄했다.
“정 장군은 기병이자 말을 사랑하는 분이시군요.”
“장군을 따르기 전에 나는 마부였소.”
정규는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그가 말하는 장군은 순국의 명장 화엽이었다. 일개 마부인 그를 발탁해 풍호기군의 도통령까지 만든 것도 화엽이었다.
“이곳은 해일이 일 리도 없고 화산은 더더욱 없지요. 그렇다면 지진일까요?”
고월의가 식연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상양관을 지은 이래 수백 년이 지났지만 이곳이 무너지지도, 훼손되지도 않은 이유는 지반이 단단하기 때문이오. 사서에도 이곳에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었소.”
식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무언가가 올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려.”
정규가 몸을 부르르 떨며 식연을 돌아보았다.
“내 느끼기에도… 무언가가 올 것 같소만, 그 느낌을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겠소.”
고월의는 살짝 몸서리가 쳐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불안은 식연이나 정규가 느끼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불안은 말 떼가 진정한 후에도 가시지 않고 맴돌았으며 점점 더 강렬해졌다.
“뭐지?”
고월의가 작은 목소리로 자문(自問)했다.
“천재지변 같은 것이지 않겠소.”
식연이 나직하게 말했다.
고월의는 그를 흘긋 쳐다보았다. 초연하고 대범한 식연이 냉담하고 위엄이 어린 눈빛으로 서남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월의는 순간 깜짝 놀랐다. 모두의 귀에 말발굽 소리와 함께 가까워져오는 금 소리가 들렸다.
그때, 상양관 안의 리군 본부 막사에서는 영무예와 사현이 말없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는 듯이 빠르게 바둑돌을 놓았다. 그들이 두는 것은 속기(速棋)1)였다. 한 사람이 바둑돌을 내려놓으면 다른 사람도 곧바로 다음 수를 두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바둑돌을 던지고 패배를 인정하는 셈이었다. 영무예는 장고 바둑에서는 사현과 실력 차이가 너무 컸지만 속기에서는 이따금 정신없는 틈에 이기곤 했기에 속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다만 사현은 오원 명문가 출신으로 언제나 전략을 중시하는 바둑을 두어 왔기에 속기를 즐기지 않았다. 하지만 백의가 7일 내 공성을 약속하고 간 후로 사현은 거의 갑옷을 벗지 않고 각 병영을 순시하며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속기를 두는 것 외에 달리 즐길거리가 없었다.
영무예는 흔치 않은 기회임을 알기에 평소보다 더욱 매섭게 바둑을 두며 압박해 나갔다. 중반(中盤)에 영무예는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사현과 바둑을 둔 이래 승기를 잡아본 적이 없었던 그는 기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현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속기는 정당한 방식이 아니었지만 영무예의 승부욕을 알기에 눈 딱 감고 힘겹게 상대할 뿐이었다.
“사현, 자네에게도 오늘 같은 날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영무예가 껄껄 웃었다.
“왕야의 속임수에 임기응변의 기지를 발휘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차를 마시며 장고 바둑을 두었다면 연달아 두 번이나 큰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 왕야의 중반은 일찌감치 제가 깨버려 확정가(確定家)2)가 하나도 안 남았습니다.”
“장고 바둑의 승리도 승리고 속기의 승리도 승리지. 자네는 지장(智將)이면서 생각이 다른 사람보다 반 박자 늦지. 일이 터지면 일단 생각부터 하는 것도 자네 약점이겠지?”
영무예가 한껏 신이 나서 말했다.
“맞습니다. 두뇌 회전이 늦는 것도 약점이지요. 하지만.”
사현이 말머리를 돌렸다.
“왕야의 두뇌가 저보다 늦어야 맞습니다.”
“왜지?”
영무예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인은 도검을 휘두르는 사이 승패가 갈리니 생각할 시간이 없고 평소 고되게 연마한 민첩함에 의지할 수밖에 없지요. 장군은 단판에, 영기(令旗) 하나를 휘두르는 그 순간에 승리를 확정짓습니다. 옳고 그름을 보는 순간 가려내는 것이지요. 제후들의 승부는 10년마다 가려집니다. 10년이면 가을 수확이 10차례에, 한 세대의 병사가 자라나니 한 국가의 국력이 바뀔 수 있지요. 그러나 황제는 평생 한 번의 책략으로 승부가 가려지기에 잘못되면 만회하기가 어렵습니다.”
사현이 천천히 말했다.
“평생 한 번의 책략이라?”
영무예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말이지?”
“풍염 황제의 경우 보기 드문 영웅적인 황제이지요. 두 차례의 북벌에서 그가 사용한 용병술과 포진의 책략이 전해내려 왔는데, 지금의 명장들도 보고 손뼉을 치며 훌륭하다 합니다. 만족 7개 부락이 차례로 패해 후퇴함에 따라 북벌을 지지하지 않던 제후들도 어쩔 수 없이 돈과 곡식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가히 지략의 고수라 불릴 만하지요. 그러나 그는 평생 딱 한 번의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여 풍염 철려군의 두 차례 북벌에도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백성을 강성하게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국고가 텅 비는 사태를 초래했지요.”
“무슨 실수였는가?”
영무예는 살짝 불쾌해졌다. 직접 전장에 나가 싸우는 군주로서 그는 백씨 황족을 경멸하면서도 횡포한 황제였던 장미 황제와 풍염 황제에 대해서는 자못 존경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북벌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당시 설숭강 일전에서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대윤의 국력으로 일거에 북도성을 점거하고 북륙과 동륙을 통일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당시 만족 7개 부락에는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장정이 절반이나 남아 있었으며 북쪽 삭북부의 백랑단도 아직 청양부의 적의를 떨쳐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만일 그 힘이 전부 풍염 황제 앞에 밀려왔다면 그가 당대 최고의 패왕이라 해도, 대윤의 제후들이 가산을 전부 탕진한다 해도 만족과 필사적으로 싸우다 쌍방이 모두 크게 피해를 보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끝내 초원을 손에 넣었다고 해도, 만족을 모조리 죽여야만 했겠지요. 그리 얻은 영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얻은 영토는 경작에도 부적합하지요. 더구나 동륙 백성들이 가서 방목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사현이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바둑판에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평생의 전쟁으로 패왕이라는 헛된 명성 하나를 얻었을 뿐입니다.”
몰입해 이야기를 들은 영무예는 저도 모르게 바둑판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자네는 북벌이 옳지 않았다 생각하는가? 하지만 북벌을 하지 않았다면, 당시 만족 청양부의 병력은 호표기와 철부도의 위세를 믿고 몹시 횡포했으니 회유가 안 먹혔을 수도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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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짧은 시간에 빠른 속도로 두는 바둑 대국.
2) 분명하게 수효를 계산할 수 있는 확정된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