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44화 (144/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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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신의 사자 (5)

난정 역참. 하당군 치중 부대.

여귀진은 자다 깼다. 밖에서 수많은 발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분주히 뛰어다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치중 부대에서 마초를 쟁여두는 곳으로 기껏해야 100여 명의 호위 군사뿐이었다. 원래 낮에도 인영이 드문 곳이니, 밤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소륵! 왜 그래? 무슨 일 생겼어? 습격이라도 당했대?”

희야도 깼다. 두 사람은 장막 하나를 함께 쓰고 있었다. 희야는 부상이 완치되지 않아서 뼈를 고정하는 나무판을 아직도 대고 있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여귀진에게 물었다.

“모르겠어. 넌 누워 있어. 괜찮을 테니 걱정 말고!”

여귀진은 벗의 어깨를 잡으며 무의미한 위안의 말을 떠들었다.

자리 옆에 둔 영월도를 집어 든 여귀진은 힘주어 칼자루를 쥐었다. 그는 희야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장막 휘장을 젖혔다. 주위는 전부 거대한 마초 더미였다. 수십 개의 횃불이 멀어져갔다. 방산은 갑주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군사 한 무리를 데리고 성큼성큼 영지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고 방산이 데려온 이들이 아무래도 최후의 한 무리인 듯했다.

여귀진이 나아가 방산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방 도위, 무슨 일 생겼어요?”

“세자!”

방산이 여귀진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돌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세자를 까먹을 뻔했네요. 무사하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본대에서 구리 나팔을 불어 이들을 데리고 장군이 계신 진 앞으로 가 보고하려던 참입니다. 저도 아직 무슨 큰일이 생겼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리군의 습격은 아닌 것 같습니다. 훈련일지도 몰라요.”

방산은 낯빛이 하얗게 질려 말을 이었다.

“백 대장군께서 오늘 밤에 성을 공격하겠다는 것만 아니면 좋겠습니다…….”

“방 도위. 걱정 마요. 공격이 시작되어도 치중 부대는 쉽게 전방에 보내지 않으니까.”

여귀진이 방산을 안심시켰다. 방산이 겁이 많다는 걸 아는 여귀진이었다.

“네, 그렇죠! 저는 출정할 사람이 아니죠!”

방산이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자께서는 여기 계십시오. 식 장군이 거듭 분부하셨습니다. 긴급한 상황이 발생해도 세자의 거가(車駕)는 꼼짝도 말라고요. 적이 쳐들어오면 그때나 세자를 먼저 피신시키라고 하셨어요.”

“나도…….”

여귀진은 방산과 함께 가볼 생각이었다.

“세자. 저희 같은 아랫것들에게 일 보태지 말아주십시오.”

방산이 죽상을 했다.

“세자께 무슨 일이 생기면 국주께서 저를 죽이고 일가족을 관노로 만드실 거라고요! 하물며 희 소장군은 몸도 못 움직이잖아요. 제발 여기서 소장군이나 돌보고 계세요.”

꿈쩍도 하지 못하는 희야 생각에 여귀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방 도위, 조심해요.”

“세자의 축언 덕에 공격의 선봉에 서지 않을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방산은 대답하면서 제 휘하의 군사들을 데리고 황급히 떠나갔다.

순간 군사들이 몽땅 철수했다. 멀어져가는 빽빽한 불빛을 보던 여귀진은 문득 주위가 오싹할 정도로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오늘 밤하늘은 덮개처럼 두꺼워 묵직하게 제 머리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별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허리춤의 영월도를 잡은 여귀진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막사를 나온 지 1각이 지났을 뿐인데 칼자루에는 벌써 이슬이 가득 맺혀 있었다. 그는 멍하니 제 손의 물방울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서남쪽을 바라보았다. 어슴푸레한 밤안개가 병영으로 밀려들었다. 한주 태생인 그는 북륙 초원에서 바닥에 자리가 깔리듯 밀려드는 농밀한 안개를 본 적 있었다. 상양관 앞의 600리 평평한 들판은 한주의 가없이 펼쳐진 초원과 꼭 닮아 있었다.

여귀진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몇 발짝 나아갔다. 병영을 나가 커다란 안개를 보고 싶었다.

안개가 점점 짙어졌다.

약한 금속 소리가 여귀진의 주위를 에워쌌다. 누군가가 쇠줄을 톱날에 대고 당기는 것 같았다. 여귀진은 발걸음이 살짝 주춤했으나 앞에서 무언가가 끌어당기는 것처럼 연달아 몇 걸음 더 걸어가더니 그제야 멀뚱히 멈추어 섰다.

여귀진은 소름이 쫙 끼쳤다! 그 울림은 제 허리춤의 영월도에서 나는 소리였다. 칼집에서 감히 잘 뽑지도 않는 이 오래된 칼이 지금,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불안하고도 격정적으로 울부짖었다. 어느새 칼집도 칼을 통제할 수 없을 듯했다. 여귀진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지하궁전에서의 밤이, 요괴와도 같던 검이 떠올랐다. 여귀진은 그 검이 살아있다고 느꼈다. 검이 주위의 모든 것을 데리고 되살아난 것 같았었다.

여귀진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군 막사에서 아주 멀리 벗어났다는 사실에 더욱 당황스러워졌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등 뒤로는 쌀 음료처럼 짙은 안개뿐이었다.

여귀진은 급히 몇 걸음 되돌아가다가 불현듯 또 멈추어 섰다. 여전히 막사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도, 그 어떤 사물도 보이지 않았다. 방향을 가리켜 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안개가 모든 것을 가렸다. 어쩌면 모든 것을 집어삼켰는지도. 여귀진은 한참을 멍해 있다가 힘껏 제 손을 깨물었다. 손에 느껴지는 통증은 진짜였다. 그는 꿈속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귀진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곳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조차 전해지지 못했다.

영월이 여전히 진동했다. 여귀진은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칼자루를 잡고서 온몸에 바짝 힘을 주고 눈을 감았다. 어차피 아무것도 안 보이는 바에야 청력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게 나았다. 주위에 적이 매복하고 있다면 그들은 분명 그가 경거망동하기를 기다려 공격을 감행할 것이 분명했다. 가만히 있는다면 더 많은 실수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발 너머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 노인. 그가 담담하게 이야기했던 교전 경험이 지금 여귀진의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며 완만하게 녹아들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일을 겪게 될 것이다. 그때 너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음과 칼뿐이니라. 마음은 산처럼 고요하고 칼은 웅크린 범처럼 당당해야 한다. 두 가지 모두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 된다. 한 번의 움직임에 생사가 갈리는 법이다.”

스승은 전에 이렇게 가르쳤었다.

여귀진은 의아했다. 지금 상황이 스승의 예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그 노인은 여귀진의 미래를 미리 본 사람 같았다.

‘금 소리다.’

여귀진은 속으로 되뇌었다.

실제로 금 소리가 들렸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가락이 그를 둘러쌌다. 여귀진은 금 소리가 나는 방향을 가려낼 수 없었다. 딱 한 대의 금이 연주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소리가 사방팔방에서 들려왔다.

여귀진은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혀끝을 깨물어 억지로 정신을 차리려 했다. 이 또한 스승의 가르침이었다.

“간혹 출처를 알 수 없는 금 곡조가 흐를 것이다. 그때도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금 소리와 노랫소리는 유혹의 소리이지 살인의 무기는 아니다. 금 소리가 들리면 적의 공격은 아직 진정으로 시작되지 않은 것이다. 혀끝을 깨물어라. 안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스승은 그리 말했었다.

금 소리는 가느다란 바람 속에 흩날리는 선처럼 이따금 낮아졌다가 높아졌다가 했다. 구성도 없고 박자도 일정하지 않았다. 금을 연주하는 이가 거나하게 취한 듯했다. 여귀진은 정신이 점점 흐릿해짐을 느꼈다. 온몸이 무게감 없이 하늘하늘해졌다. 혀끝을 깨무는 것도 어느새 잊어버렸다. 그런데, 영월도의 울부짖는 소리가 머릿속 혼란을 깨뜨렸다.

여귀진은 자신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의 흐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것이 ‘경(境)’임을 떠올렸다. 스승이 언급한 적 있었다.

“그것은 비의지경(秘仪之境)으로 공허한 진이다. 상하좌우, 앞뒤가 없으며 시간의 변화도 느끼지 못한다. 이런 경 안에서 하늘을 나는 우인은 아무리 날아보아도 바닥에 닿지 못하며 땅을 뚫고 들어가는 하락은 사방으로 땅을 파도 질퍽한 진흙뿐이다. 인어는 물이 하늘까지 불어난 것 같아서 아무리 수면 위로 떠오르려 해도 떠오를 수가 없지. 그리고 인간은 대지가 아득해져 아무리 달려도 끝에 가 닿지 못한다.”

스승은 목소리를 낮추고 외쳤다.

“그러나 비의지경은 허무다! 네 마음에 파고들지 않는 한 너를 죽이지 못한다!”

여귀진은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돌파할 수 없을 때는 크게 소리치고 울부짖어야 한다. 무신의 포효가 온 벌판을 놀라게 할 것이다.”

스승도 그렇게 말했더랬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공기 중의 어렴풋하고 흐리멍덩한 적막을 깨뜨렸다. 여전히 존재하는 금 소리는 엄숙하고 장중하게 변하며 위엄을 풍겼다. 금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가려낼 수 있었던 여귀진은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참 뒤 준마 한 마리의 형상이 보였다. 북륙에서도 보기 드문 우람하고 위풍당당한 말로 가슴이 벽처럼 드넓었다. 순흑색 말이 긴 갈기를 나부끼며 안개 속에서 걸음을 내디디자 안개가 말 주위의 근육의 곡선 하나, 하나를 따라 흘러갔다. 득의양양한 모습이 흡사 군왕 같았다.

말에 반듯하게 앉은 사람은 키가 크고 몸이 깡말랐다. 검은색 소매 없는 외투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쓰개로 얼굴도 가렸다. 손에는 정교하고 우아한 공후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남회성에서 자주 보던, 무릎에 가로놓고 연주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그 공후는 활처럼 휘어진 목재에 양끝은 빛이 날 정도로 새카만 소뿔 조각에 감싸져 있고 활시위처럼 목재의 양 끝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현 10여 가닥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수공후(竪箜篌)1)였다. 여귀진은 그것이 우인의 악기임을 알고 있었다. 우연이 가끔 신나면 달빛 아래에서 연주를 했는데, 치마를 늘어뜨린 채 나뭇가지에 앉아 가지가 위아래로 흔들리도록 내리누르곤 했었다.

놀랄 정도로 우람한 체구의 종복 넷이 그 말을 뒤따랐다. 그들은 앞뒤 좌우로 말을 에워싸고 있었다. 앞쪽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횃불을 들었고 한 사람은 새카맣고 기다란 깃발을 높이 들었다. 순수한 은색으로 덩굴 같은 무늬가 수놓아진 깃발이 펄럭이며 여귀진의 눈앞을 스쳐갔다. 기다란 깃발의 양측으로 늘어진 은색 쇠사슬이 깃대에 부딪쳐 달그락 소리가 났다. 듣기 좋게 청량한 음색이었다. 종복들도 모두 새카만 외투를 입었는데, 피부가 전혀 보이지 않게 온몸을 가리고 있었다. 그들은 준마가 전진하는 속도에 전혀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발걸음이 민첩했다.

그들은 나는 듯이 달려오는 속도가 몹시 빨랐다. 하지만 둥둥 흩날리듯 전혀 힘을 들이지 않는 듯했다. 고개를 돌려 여귀진에게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말에 탄 사람이 돌연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준마가 소리 없이 급정거했고 종복들도 따라 멈추었다. 그들은 여귀진 앞에 섰다. 말에 탄 사람이 고개를 돌리더니 다 큰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영월의 울림이 귀를 찌를 듯이 날카로워졌다. 그 울림은 거대한 짐승의 호흡 같은 묵직한 소리도 머금고 있었다. 말에 탄 사람은 여전히 가볍게 공후 현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네 칼이냐?”

말에 탄 이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네.”

여귀진이 대답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여귀진은 맞은편의 상대가 풍기는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칼을 뽑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도중영월, 오래전의 벗을 만났군.”

말에 탄 이가 말했다. 그가 쓰개를 벗었다.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는 노인이었다. 많이 늙었지만 주름 하나 없었다. 세월은 그의 몸에서 많은 것을 가져갔지만 정신과 힘은 아니었다. 뽀얗고 수려한 외모는 놀랍게도 20대 청년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노인이 허리를 굽혀 영월의 칼집을 쓰다듬었다. 칼이 울음을 그쳤다. 그의 손가락이 닿는 순간 영월도는 불안해하던 힘이 사라졌다.

노인과 여귀진의 눈이 맞부딪쳤다. 노인은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결국에는 웃었다.

“황야의 무신이로군. 네게는 진귀한 피가 흐르는구나. 누군가의 입에서 네 이름을 들어보았으나 예서 이리 만날 줄은 몰랐는데.”

여귀진은 대답할 수 없었다.

“멀리서 영월의 목소리를 듣고 누가 이곳에 있는지 추측했는데, 이런 소년일 줄은 몰랐군. 너는 내 말 앞에 설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이곳에서의 우연한 만남은 어쩌면 신의 인도이자 운명의 윤회일 수도 있겠구나.”

노인의 앙상한 손이 살며시 여귀진의 머리를 토닥였다.

“만나서 반갑다. 오래 머무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없어 애석하구나. 네 핏속의 힘이 좀 더 짙어지면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 너와 나는 멋진 한판 승부를 치르게 될 수도 있겠지.”

노인은 말을 몰아 가버렸다. 종복들도 비상하듯 그의 뒤를 쫓아갔다.

끝없이 펼쳐졌던 안개 속에서 여귀진은 무릎이 녹작지근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힘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 * *

1) 세워서 연주하는 공후. 중국 수공후는 현이 25줄, 22줄, 16줄, 7줄 등 여러 종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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