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43화 (143/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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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신의 사자 (4)

초위국 본부 막사.

식연이 마지막 차 한 모금을 비우고 자못 흥미롭게 백의를 쳐다보았다. 이곳은 백의의 군 막사였다. 전체 초위국 군대는 물론 연합군 모두가 이곳에서 나오는 군령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지금 막사 안은 텅 비고 백의와 식연,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백의는 촛불 아래에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렸고 식연은 손으로 따뜻한 찻잔을 던지며 놀았다.

“뭐 하나?”

식연이 물었다.

“가을 연밥은 껍질이 두꺼워서 끝부분을 비벼 얇게 해주지 않으면 싹이 잘 안 튼다네.”

백의가 손안의 물건을 식연에게 내보였다. 놋쇠 쟁반 하나에 연밥이 놓여 있었다. 식연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르쳐준 방법이잖나. 자네는 손이 굼떠서 꽃을 기르는 일에는 평생 가도 성과를 내는 데 한계가 있지. 가을 연밥은 그렇게 계속 비비지 않아도 되네. 작은 칼로 깊이만 잘 조절해서 가볍게 그어주기만 해도 발아에 도움이 돼.”

“꽃을 기르는 일은 선천적인 재능에 마음 씀도 봐야 하지. 자네는 재능은 넘치나 인내심이 2할 부족하니 결과물도 8할밖에 못 얻는 것이네.”

백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재능은 조금 모자라나 인내심이 탁월하니 자네보다 못 기른다고 할 수만도 없을 걸세.”

“그건 내게 욕인데?”

식연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리국공에게 이레 안에 성을 함락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벌써 사흘이 지났네. 요즘 병력 배치도 바꾸지 않고 제후국 장군들과 논의도 하지 않으니 각국 진영에서는 자네의 무관심한 태도에 말이 많아. 가장 불만이 많은 자는 정규일 걸세. 자네에겐 이미 성을 공격할 방책이 있겠지?”

“맞네.”

“기왕 방책이 있다니 어디 들어나 봄세.”

백의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살며시 가로저었다.

“군의 출격은 공연이 아니네. 이야기 구연도 아니고. 말할 수 없으니 안 하는 것이야. 내가 움직이는 그날 자네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걸세.”

“독하긴. 강요하지 않겠네. 그러나.”

식연이 곁눈으로 그를 흘깃 보았다.

“함락하지 못하면 어떡할 건가?”

백연이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럴 리 없네. 군을 이끈 지 16년이야. 병사들은 내 깃발이 가는 곳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돌격하네. 이는 지금껏 내가 그들에게 한 약속과 내가 정한 전략이 실현되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 단 한 번도 말이야.”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자만이겠으나 자네가 이런 말을 하면 명장의 위엄인 게지. 자네와 알고 지낸 지 오래인 내가 자네보다 제일 못한 점이 바로 그 위엄일세. 그러나 이 장수의 위엄은 자네 최대의 결점이기도 하지. 인간미가 아주 많이 옅어지거든.”

“자네의 가장 큰 장점은 능청이고, 최대 결점 또한 그 능청이네.”

백연이 고개를 돌려 무표정한 얼굴로 식연을 쳐다보았다.

식연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나에 대한 자네의 평가는 땡전 한 푼 없던 시절에 하던 평가와 똑같군. 사실 비안이 제안한 시독술은 좋은 책략이라 할 수 있지. 속셈이 저급하긴 하나 자기 수하들 수만 명이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자네가 이런 사소한 부분도 이해 못할 사람은 아닐 텐데.”

“내가 왜 엿새 동안 퉁소를 불었는지 아는가?”

백의가 물었다.

“어디 들어나 봄세.”

“엿새 동안 퉁소를 불면서 성벽 위를 지키는 리국 군사들의 동태를 살폈네. 내 퉁소 연주를 듣는 이도 있었지만 절대 자기가 지키는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어. 당황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네. 정말 무시무시한 군대일세.”

백의가 한숨을 내쉬었다.

“영무예가 군을 매우 엄히 다스리기도 하는 데다 부하들은 충성스럽고 용맹하며 상무 정신이 강하여 시독술은 별 효과가 없을 것이네. 시독을 성 안에 투입하는 것은 적의 세력이 약해 성을 나와 전쟁을 하지 못할 때나 쓸모가 있지. 영무예의 담력과 지혜라면 내가 시독술을 썼을 때 성문을 활짝 열고 나와서 정면 승부를 보려 할 텐데 그것도 책략이라 할 수 있겠는가?”

백의가 느릿느릿 고개를 저으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난 그런 사소한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네!”

“나도 자네만큼이나 유명하고 명장이라 불리지. 작위와 공적도 비슷하고. 한데 어찌 자네 앞에만 서면 자네는 위풍당당한데 나는 군색해지는 것 같은지, 원.”

식연이 웃으며 작은 기름종이로 싼 꾸러미를 건넸다.

“남회성에서 유명한 가을 장미 꽃씨네. 하당의 백리상홍이 바로 이 종자지. 자네가 나와 원예를 겨루기 좋아하니 내 작지만 힘을 보태주고자 오기 전에 특별히 시장에서 한 포 골라보았네.”

꾸러미를 집어 든 백의가 고개를 저으며 툭 말을 뱉었다.

“고맙네.”

“이런 일에 고맙다는 겐가? 너무 낯설군. 천계에 있을 때 자네가 내 주머니를 털어 그 백마를 사는 바람에 나는 방세도 못 내서 한 달 넘게 주점의 딱딱한 널판에서 잠을 자야 했었지. 그런 사이에 이제는 꽃씨 한 포에도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겐가?”

식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옛날과 비교하지 말게. 지금은 각기 다른 주인을 모시니 따로 만나는 일은 적을수록 좋아.”

백연이 무심하게 말을 뱉었다.

두 사람 사이로 잠시 적막이 흘렀다.

“하루 이틀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그리 말할 줄 짐작은 했네만, 직접 들으니 그래도 슬프군.”

식연은 연초를 채운 담뱃대를 입가에 물고 고개를 저으며 돌아서 나갔다.

그가 막사 문까지 걸어갔을 때, 초위군 근위병 하나가 황급히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대장군, 사고가 생겼습니다!”

“무슨 일이냐? 차근히 말해라.”

백의가 하던 일을 멈추었다.

“치중 부대에서 기르던 개가 사람 열 명을 물어 죽였습니다.”

“개가 사람을 물어 죽여? 열 명이나?”

백의가 크게 놀라며 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백의는 군에서 부리는 수렵견을 잘 알았다. 딱히 흉포한 동물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들은 썩 좋은 팔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하루가 멀다 하고 군사들에게 잡아먹히곤 했다. 백의는 자기 부하들이 얼마나 거칠고 난폭한지도 알았다. 하나같이 오랫동안 단련된 이들로 딱히 착하거나 다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 번에 열 명이나 개에 물려 죽었다니, 전에 없던 일이었다.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수렵견 한 마리가 야생 늑대들과 함께 당직을 서던 군사들을 물어 죽였고 부대로 돌아온 척후가 이를 발견했다 합니다. 그가 도착했을 때 군사들은 이미 얼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답니다.”

“야생 늑대와 함께였다고?”

백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자! 가서 보자꾸나!”

“나도 함께 가세.”

식연이 말을 얹었다. 그의 표정도 썩 밝지 않았다. 진영에 발생한 괴이한 일이 위험한 징조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식연도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은근한 불안이 밀려왔다.

백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막사 밖으로 나왔다. 문가에 비끄러매져 있던 식연의 흑마 ‘묵설’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처절하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의 외침을 들은 듯 군영의 모든 군마가 동시에 울부짖기 시작했다. 거대한 울림이 밀물처럼 모여들어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제기랄!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영무예가 또 쳐들어왔나?”

정규가 내의만 걸친 채 막사 밖으로 달려 나왔다.

자다가 깬 상태였다. 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온통 말 울음소리뿐이었다. 정규는 자기가 아직 꿈을 꾸는 건가 의심했다. 평생 출정해 왔지만 적진으로 돌격할 때도 이처럼 고막을 찌를 듯한 말의 울부짖음은 들어보지 못했다. 막사 밖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더욱 오싹해졌다. 모든 것은 꿈이 아니었다. 순국 부대 내의 말 수천 필이 동시에 울부짖었다. 그들은 극도의 공포에 처한 것처럼 끊임없이 앞발을 들어 올려 허공에서 발길질을 하며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다.

놀라 잠에서 깬 군사들이 횃불을 들고 제 군마를 달랬다. 그러나 별 소용이 없었다. 함께해 온 주인도 군마를 통제할 수 없었다. 커다란 말 눈에는 놀란 빛이 번득였다. 군사들은 혹시라도 말이 미친 듯이 질주할까 봐 풀어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 질주가 아니라 달아날 것 같았다! 정규는 말의 성질을 잘 알았다. 말들은 어떤 거대한 위험을 피해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리군이 쳐들어오는 것이냐? 리군이야?”

그는 병사 하나를 붙잡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적…. 적은… 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데, 말들이 미쳐 날뜁니다!”

군사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적도 없는데 미치긴 왜 미쳐? 뇌기가 왔다손 치더라도 우리 순국 풍호가 그들을 두려워한단 말이냐!”

정규가 호통을 치며 군사를 홱 밀쳤다.

뇌기가 쳐들어오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는 영채 정면에 녹각 울타리를 설치하고 10만 개의 마름쇠를 뿌려놓으라 명했다. 어떤 기병이든 이 마름쇠에 죽게 될 터였다. 2촌 길이의 마름쇠는 가뿐하게 말발굽을 망가뜨릴 수 있었다.

정규가 달려가 채찍을 잡고 제 군마를 세게 때렸다. 그러나 정규가 직접 길들인 사나운 말도 지금은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지 입에 흰 거품을 물며 두 앞발을 들어 정규의 머리를 밟으려 했다.

“짐승 새끼! 주인을 배반하는 것이냐!”

정규가 분노해 호통 치며 군도를 뽑았다.

그는 차마 제 군마를 베지 못했다. 그러나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말을 제압하지도 못했다. 칼을 들고서도 속수무책이었다.

흰색 그림자가 한 줄기 번개처럼 영채 문을 통과해 곧장 들어오더니 정규의 옆에 나타났다. 거대한 백마의 등에는 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정 장군! 말의 귀를 막으십시오. 그러면 진정할 겁니다!”

고월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정규는 깜짝 놀랐으나 이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칼을 휘둘러 입고 있던 내의에서 천 두 조각을 잘라내 손으로 뭉쳤다. 그리고 자기 군마가 다시 일어서려 할 때 다가가 두 주먹으로 동시에 말 목의 양쪽을 세게 쳤다. 정규는 팔 힘이 매우 강했다. 만족 혈통의 군마라 해도 그와 같은 타격은 감당하지 못했다. 말은 한 차례 울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정규는 그 틈에 다가가 말 등에 올라타고 다짜고짜 천 뭉치를 말 귓구멍에 쑤셔 넣었다.

“꽉 쑤셔 넣으십시오! 힘껏요!”

고월의가 큰 소리로 일러주었다.

정규의 군마는 몇 차례 사납게 날뛰며 정규를 떼어내려 했지만 차츰 진정되어 갔다. 여전히 공포에 눈을 희번덕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지만 아까처럼 실성한 듯한 모습은 아니었다. 정규는 애마를 되찾은 듯 말의 목을 토닥였다. 그때서야 정규는 말의 피부 아래 혈관이 격렬하게 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말의 심장은 쉬지 않고 수백 리를 달려온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언제고 폭발할 것 같았다.

“말의 귀를 막아라! 내 명을 전해라! 말의 귀를 막아!”

정규가 소리 높여 외쳤다.

정규는 고월의에게로 몸을 틀었다. 지금 그는 젊은 진북군의 우두머리에게 깊이 탄복했다.

“고 장군. 대체 무슨 일이오? 적이 습격이라도 했소?”

고월의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릅니다. 초위군 군영의 개가 미쳐서 사람을 물어 죽였다더군요. 각 부대의 군마들이 놀라 불안에 떨고 있는데, 귀를 막아야만 간신히 진정이 됩니다. 제가 자세히 들어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리군에서도 출격하려는 기미는 없었고요.”

정규는 애써 말 울음소리와 다른 소리들을 구분해 보려 했지만 금세 포기했다.

다른 이상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모종의 소리가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극도로 무시무시한 소리가.

“하당, 진북, 순국이 군마가 가장 많고 가장 사납게 아우성칩니다. 지금 백 대장군께서는 아군이 혼란한 틈에 리군이 출격할 것을 대비해 급히 휴국의 자형장사(紫荆长射)와 하당의 목성루, 초위국의 중갑 창병(槍兵)을 전군 진열로 이동시켰습니다. 정 장군, 말에 탈 수 있는 이들을 데리고 저와 함께 속히 초위국 본 막사로 가시지요. 백 대장군과 식 장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겠소!”

대답한 정규는 갑옷도 걸치지 않고 내의 양 모서리로 가슴 앞에 단단히 매듭을 지었다.

가볍게 적을 베어 죽일 수 있는 옷차림으로 준비하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전쟁을 겪은 그였다. 직감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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