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41화 (141/360)

141

4장. 신의 사자 (2)

황성 천계. 태청궁, 정화대전.

“화엽이란 자는 대체 누구요? 이자의 이름은 왜 그간 들어본 적이 없지? 순국에서 설마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병사를 근왕병으로 보낸 것이오? 이런 자가 감히 대군이 왕역을 넘게 해달라 상소를 올린단 말인가?”

황제는 분노를 억누르는 티가 났다. 그는 휘장 뒤에서 가볍지도 세지도 않게 탁자를 내리쳤다.

“폐하!”

소부부사가 앞으로 나왔다.

“화엽은 순국 제일의 명장이며 순국 삼군도지휘사입니다. 폐하께서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것은 그가 벌써 4년간 은거하며 중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순국이 그를 재기용한 것은 근왕에 필요하기 때문일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순국 삼군도지휘사?”

황제의 말투가 다소 누그러졌다.

“그럼 정규는 뭐요? 전에는 다들 정규를 이야기하지 않았소? 그가 풍호기군의 도통령이라면서?”

“폐하. 정규는 부직(副职)에 지나지 않습니다. 화엽이 은거 중이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가 풍호기군의 도통령 직무를 겸하고 있었으며 정규는 그를 대신해 군사를 통솔했을 뿐입니다. 당시 정규는 화엽의 부장에 불과했으며 그 둘은 천양지차입니다.”

“오. 그렇다면 이력이 좀 있는 자로군.”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장막 밖에 있던 금위가 계단을 내려가 아까 황제가 던졌던 상소를 집어 들고 공손하게 다시 올렸다.

소부부사가 물러가고 대리사 대정경이 대열에서 성큼 나왔다.

“화엽은 확실히 위엄이 있습니다. 게다가 현재 수하의 3만 풍호 철기군은 대윤 최대의 철기병 군단입니다. 지금 그들이 왕역을 넘어 곧장 영무예의 배후로 공격한다면 승리는 거의 확실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윤허해야 하겠소?”

황제가 망설였다.

대리사 대정경은 살짝 주저했다.

“그러나 리국에서 2만 적려 부대를 남겨 당양곡 어귀를 지키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왕역을 넘는 것을 윤허하신다고 해도 화엽은 먼저 리군과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가 리군을 이기고 빠른 풍호 기병의 속도에 힘입어 서둘러 상양관 배후로 달려간다 하더라도 백의와 영무예가 결전을 약속한 날에나 도착할 것입니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전쟁이 끝날 수도 있다는 거군. 그럼 당대의 명장이 서둘러 간다 한들 무슨 소용이오?”

황제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영무예의 시신을 수습하라고 3만 대군을 보낸단 말이오?”

황제는 신하들을 돌아보았다.

“태부는 어찌 생각하시오?”

태부 사기미가 몇 발자국 앞으로 나와 섰다.

“폐하께서 근심하시는 것이 지당합니다.”

신하들 사이에서 나지막하고 냉랭한 조소가 흘러나왔다. 틈으로 던져지는 눈빛은 멸시로 가득했다. 그러나 태부는 꼿꼿하게 서서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극히도 훌륭한 신하의 풍모였다.

황제가 차갑게 조소를 흘렸다.

“태부는 아니나 다를까 지당하다는 소리를 하는군.”

황제는 태부에게 일찌감치 불만을 품고 있었다. 사기미는 주견이 없는 기회주의자였다. 영무예가 천계성을 차지했을 때 지조 있는 황실 중신들은 병을 핑계로 집에 머물렀지만 사기미는 분주하게 영무예의 정치를 도왔다. 천계의 대신들 중 영무예에게 가장 중용된 자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황실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흘이 멀다 하고 심복을 입궁시켜 각종 물품을 바치며 황실에 여전한 충성을 다짐했고 황제와 영무예 사이를 중재할 때도 종종 그가 나서곤 했다. 새로운 황제는 그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의지했다. 영무예의 대군이 천계성을 떠나자 사기미는 곧 나라의 위난을 평정한 대 공신으로 변모했다.

사기미는 명문가 출신이 아닌,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경우로 일 처리가 매우 체계적이었다. 하지만 벌써 나이가 많이 들었고 기개도 없어서 중요한 순간에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사방에 영합해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지당하다 했다. 그래서 군신들과 황제는 그를 비웃었다.

“소신도 다소 우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사기미가 또 입을 열었다.

“음?”

“선조의 훈시에 이르기를 평소 제후의 군대는 왕역에 한 걸음도 들여서는 안 된다 했습니다. 설령 변고가 생겨 어쩔 수 없다 하여도 제후는 상소문을 갖추어 연이어 세 번을 청해야 하며 세 장의 상소 모두 태묘 앞에서 불살라야 하지요. 더불어 세 가지 희생물1)을 바쳐 예를 올리고 점을 치고 별을 관찰해 길조가 나와야 합니다. 이후에는 말에서 내려와 칼을 칼집에 봉해 넣고 황실에서 파견한 우림천군의 호위 아래 국경을 넘어야 하고요. 선조의 훈시는 풍염 황제 재위 시 많이 어겼으나 그때는 만족을 북벌하기 위해서였지요. 황성 성내에 크고 작은 제후들의 군사가 출입하면 시끄럽고 혼란스러워지며 태청궁 앞은 마분(馬糞)으로 가득해질 것입니다. 이따금 병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아녀자를 강간할 것이며 신하들은 전부 대문을 걸어 잠그게 될 것이고요.”

사기미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이번에 화엽이 국경을 넘으려 할 때도 반드시 그럴 것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급히 행군해 옴으로써 황성의 위엄과 안녕이 모두 사라질까 걱정이 될 뿐입니다.”

“음…….일리가 있는 말이군.”

황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폐하!”

소부부사가 다시 앞으로 나왔다. 새로 등용된 지 얼마 안 되어 서슬이 날카로웠다. 빼어난 각진 얼굴은 흥분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소신은 사태부의 우려가 당치 않다 생각합니다.”

“무슨 소리지?”

“현재 상양관 아래에서는 백의 장군이 7만 연합군을 이끌고 있으며 영무예에게는 3만 5천 군사가 있지요. 그러나 폐하, 영무예가 상양관에서 죽을 거라 생각하시면 아니 됩니다. 반대로 소신은 현재 백의 장군이 열세라 생각하옵니다!”

“7만 명이 3만 5천 명을 못 이긴다니. 동륙 제일의 명장이라 불리는 무양후가 진다면 무슨 낯으로 이 땅에 발붙이고 서겠소?”

황제가 비웃었다.

“황실의 녹봉을 좀먹느니 차라리 자결하여 만천하에 사죄하는 것이 낫지!”

“폐하!”

부사가 무릎을 꿇었다.

“병법에 ‘십칙위지(十則圍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군의 병력이 적군의 10배이면 포위하여 죽일 수 있다는 뜻이지요. 백의 장군이 상양관을 막은 것은 절반의 포위 전술입니다. 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으로 따지자면 그의 병력은 한참 부족하지요. 더구나 리국의 적려와 뇌기는 천하의 강병입니다. 그해 쇄하산에서도 제후들의 병력이 뭇 구름처럼 많았으나 역시 뇌기군의 돌격에 무너지고 말았지요. 이번에 영무예는 귀국에 뜻이 있습니다. 폐하, 생각해보십시오. 천군만마의 포위 공격 속에서 빠져나가는 물고기 한 마리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홀로 포위를 뚫고 나가는 것은 또한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러나 영무예가 일단 귀국하면 그곳에는 5만 적려가 군장을 갖추고 대기 중입니다. 영무예의 명성이라면 몇 년 안 되어 그들은 10만 대군이 될 것입니다!”

온 조정의 신하들이 살며시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황실 대신들은 모두 귀족 가문의 후손이고 무장 가문 출신은 극히 적었다. 백의의 7만 대군 이야기를 듣고 근왕군이 반드시 이길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십측위지’ 이야기를 들으니 돌연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황제도 말이 없었다. 장막 뒤편에서 탁탁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러므로 양군이 접전을 치를 때 풍호 기병 3만이 상양관 뒤편에서 공격을 가하면 영무예에게는 틀림없이 심한 타격을 줄 것입니다! 만약 영무예가 이 점을 꺼리지 않았다면 당양곡을 지킬 적려 2만 명을 남겨두지 않았겠지요. 이 2만 명은 거의 희생을 각오한 운명인 것입니다! 폐하, 부디 숙고하고 또 숙고해 주십시오!”

부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1각도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폐하 즉시 상소를 윤허하시어 화엽 장군이 공격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황실의 요지(要地)가…. 다시 짓밟힐 수는 없소…….”

황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막 뒤, 황제의 어렴풋한 인영이 일어나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이내 그윽한 탄식이 들려왔다.

“폐하. 아녀자의 생각을 들어보시겠습니까?”

나직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장공주께 좋은 방도가 있습니까?”

황제의 목소리에 돌연 희색이 묻어났다.

황제의 장막 아래로 다른 얇은 막이 하나 더 있었다. 금황색 얇고 가벼운 천이 탁자 하나를 가리고 있었는데, 은은한 한기가 천에서 배어 나와 은근하게 조정 대신들의 코끝을 스쳤다. 여인의 목소리는 그 장막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대 이름이 정중진, 맞소? 소부부사직을 맡은 지 석 달도 안 되었군. 병법에 익숙한 사람이 소부에 있으려니 힘들겠구려. 후일에 우림천군으로 배치를 옮겨주겠소.”

장공주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신하들 속에서도 이내 나직한 조소가 흘러나왔다. 그는 소부부사와 원한이 있는 자였다. 고작 병서만 몇 권 읽은 사람이 우림천군으로 전임(轉任)되면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는 모두가 훤히 알고 있었다.

이 칙령이 상인지 벌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소부부사는 얼굴이 벌게졌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물러설 수 없었던 그는 고개를 쳐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장공주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여인이 차갑게 웃었다.

“소부는 장부를 관리하고 돈을 셈하는 곳이니 뛰어난 인재는 필요 없소. 전에 희겸정이라는 부사가 있었는데 그도 문무를 겸비한 자라 주제넘게 나섰지. 그러더니 희 황제 즉위 때 역당과 한통속이 되어 온 집안이 황성에서 쫓겨나 평생 발도 못 붙이게 되었소. 나도 다 그대에게 경험을 쌓게 해주려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오. 정 부사, 대답해 보시오. 황실이 무엇으로 천하를 다스리는지 아시오?”

“어진 정치입니다!”

“어진 정치?”

장공주가 코웃음을 쳤다.

“그건 고루한 선비들이나 하는 말이지. 그대는 병법가가 아니오. 한데 어찌 이리 진부하시오? 어진 정치로 민심을 다스리는 것은 훌륭하지요. 그러나 민심에는 언제나 의뭉스러운 것들이 존재하는 법. 1만 명 중의 9999명이 그대의 어진 정치에 복종한다 하여도 한 명의 역적이 튀어나와 대중을 선동할 수 있소. 영무예가 바로 그런 역적이오!”

이 대목에서 장공주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지더니 온 조정을 날카롭게 꿰뚫고 지나갔다. 신하들은 간담이 서늘해져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공손히 귀를 기울였다.

장공주는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는 칼과 검을 의지하지요.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는 위엄에 의지한다오. 황제의 위엄이 혁혁해야 죄가 있는 자를 참할 수 있는 것이오! 선황제께서는 개국 당시 제후들에게 영토를 나눠주고 이곳 왕역 안에 3만 명만 남겨두었소. 3만 우림 천군을 남겨둔 이유는 제후들이 연합해 난을 일으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순국의 3만 풍호일지라도 천계성을 공격할 수 있음을 염려했기 때문이오. 그러나 그동안 감히 천계성에 쳐들어온 것은 영무예 하나였소.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믿고 지켜온 것 같소? 바로 황실의 위엄이오. 위엄이 무너지지 않는 한, 우리가 함께할 것을 명하면 제후들은 한마음으로 협력해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구할 것이오. 믿음을 갖고 황실의 어른다운 기개를 가지시오. 여러분은 대윤의 체면이자 존엄이오. 천하의 수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지만 태청궁이 무너지고 황실이 사라지면, 내일은 없소. 그때가 되면 도처에 전란이 일고 사람은 짐승 같아질 것이오!”

“장공주. 몹시도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사기미가 먼저 장공주의 말에 호응했다. 그는 모호하게 ‘지당하다’는 말로 둘러대지 않고 ‘몹시도 지당하다’는 말로 장공주를 옹호했으니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다.

뭇 신하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몹시도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정 부사. 이해가 되시오?”

장공주의 목소리는 조곤조곤하고 완곡하며 다정하게 변했다.

“우리 백씨 가문은 영무예 한두 사람이 무너뜨릴 수 없소. 몇몇 제후가 뒤집을 수도 없지. 우리 황실은 하늘의 명을 받아 뿌리가 견고하오. 여러분의 발아래 대지와 한 몸이지. 백의는 천하의 명장이니 영무예가 달아날 수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중상을 입게 될 것이오. 그 이후에 초위국과 하당국 등 황실에 충성하는 제후들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 토벌할 수 있소. 영무예 같은 일개 무사를 두려워할 필요가 무에 있소? 그리고 화엽이 예법을 건너뛰고 기군을 통솔해 왕역을 넘는다면, 그 틈에 그가 난을 일으키지 않을 거라 누가 보장할 수 있겠소? 더구나 이 금기가 한 번 깨지면 훗날 모든 제후국 병사가 천계성을 경유하려 할 텐데 그리하면 제왕가의 위엄은 어찌 되겠소?”

호리호리한 장공주가 장막 안에서 일어서더니 장막 너머의 황제에게 곱게 절을 했다.

“폐하. 청컨대 화엽의 상소를 물리고 본분을 지키라 명하십시오. 더는 싸울 시기를 늦추지 말고 최대한 빨리 당양곡 어귀의 리군과 결전을 치르라 하십시오!”

“짐의 생각도 장공주와 같습니다!”

사기가 진작되었던 황제는 이내 머뭇거렸다.

“그러나 상양관의 전세(戰勢)에 화엽이 없으면… 괜찮을까요?”

“소신은 일개 아녀자라 군사와 전쟁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그러나 순국 감국 대신 양추송의 서신을 폐하께서는 아직 못 읽어보신 것 같군요. 바로 이 충신이 순국후 오지윤을 설득해 가장 강한 대군을 근왕병으로 보냈습니다. 폐하, 그의 판단을 믿으십니까?”

장공주의 목소리는 다정했고 웃음을 띠었다.

“양추송의 서신? 가져와라!”

황제는 더욱 기뻐했다.

장막 안에서 시녀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나무 쟁반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 금위의 손에 서신을 올렸다. 서신을 받아 펼쳐 본 황제는 빠르게 전체 내용을 훑었다. 마지막 한 문장을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공주의 말대로 화엽에게 빨리 적을 공격하라 명해라. 왕역을 넘으려면 반드시 먼저 세 번의 상소를 올려 청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무예가 아니라 우림천군이 그의 적이 될 것이다!”

황제의 말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네!”

신하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황제는 서신을 다시 한번 흘긋 보았다. 마지막 문장은 간단명료했다.

“화엽은 맹호로 사람을 잡아먹으니 집에 들여 키워서는 아니 됩니다!”

* * *

1) 소, 돼지, 양을 가리킨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