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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신의 사자 (1)
사시(巳時).
풍호 철기군 1만 명이 일자로 기다란 진을 형성했다. 이들은 500보 거리에서 적려 부대 1만 명의 방어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방어선 앞으로 울타리가 늘어서 있고 궁수들은 말없이 울타리 뒤에 선 채 양군 진영 사이로 일어나는 먼지를 아득히 바라보았다.
돌연 풍호 철기군의 전선이 열리고 자류마 한 필이 길게 울부짖으며 진 앞으로 나왔다. 말은 느릿하게 중앙을 향해 갔다.
그와 동시에 적려 보병들이 울타리를 옮겼다. 방어선에 발을 내디딘 청백색 군마 한 필은 맞은편에서 오고 있는 자류마에게로 다가갔다.
진 중앙에서 만난 군마 두 필은 1장 거리를 두고 섰다. 말 등에 올라탄 두 사람은 각자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내가 보낸 물건은 벌써 받아보셨겠지요?”
청백색 군마의 등에 탄 사람은 너른 도포를 입은 노인으로 수염과 머리가 벌써 하얗게 세었다. 지위 높은 관리의 차림이었지만 변방에서 일 년 내내 볕을 쬐어 고동색으로 타고 갈라진 피부를 감출 수는 없었다. 그는 허리에 검을 차지도 않고 갑주도 걸치지 않은 채 친한 벗을 대하듯 편안하게 다가왔다.
“고맙습니다, 류문지 선생. 고서 세 권은 이미 받았습니다. 너무 귀중한 선물이라 달리 보답할 길이 없어 귀군의 심부름꾼에게 소장하고 있던 진귀한 훈향을 보냈습니다. 매우 유명한 용식향(龍息香)이지요.”
“순국의 용식향을 들어본 지는 오래되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아직 접해볼 기회가 없었는데, 정말 고맙군요.”
순국 풍호의 명장 화엽은 이렇게 리국 좌상 류문지와 진 앞에서 평온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 뒤로는 양군 군사들이 칼과 창을 들고서 언제든 명령만 떨어지면 고함을 내지르며 일제히 달려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들의 기다림은 벌써 엿새째였다. 화엽과 류문지의 대화가 엿새째 이어지고 있었다. 매일 아침 그들은 이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예를 갖추며 작별인사까지 했다.
시간이 길어지자 급히 행군해 온 풍호 철기군은 모종의 착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10년, 20년이 지나 맞은편 적군을 통솔하는 노인이 늙어 죽어야 이 전쟁이 끝날 것 같다는 그런 착각.
“백의 장군과 리국공이 전쟁을 약속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류 선생도 알고 있겠지요?”
화엽이 불쑥 물었다.
“오늘 새벽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현장에 없어 당대 제일의 전투를 볼 수 없음이 애석할 따름입니다.”
류문지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도 안타깝습니다.”
“백 대장군 수중의 7만 대군은 가히 성을 무너뜨릴 기세이고, 우리 리국은 3만 적려와 5천 뇌기뿐이나 험준한 상양관을 의지하고 있으니 백의 장군과 우리 국주의 이번 전쟁에서 승산은 양측 모두 반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국주께서 승리한다면 형세를 틈타 포위망을 뚫을 수 있을 것이나 백 대장군이 승리한다면 우리 국주께서는 천계로 후퇴하는 선택을 할지도 모르지요. 화엽 장군이 지금 우리 군을 섬멸할 수 있다면 왕역을 넘어 상양관 뒤편으로 접근하겠지요. 그리하면 우선 아군의 주축을 위협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양쪽에서 협공을 하면 달아날 곳 없는 우리 주상께서는 상양관에서 전사할 수도 있을 테고요.”
류문지가 말을 이어갔다.
“내 생각에 장군은 이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황제께 순국 대군이 왕역을 통과하게 해 달라 상소를 올렸을 것 같은데요?
“류 선생이 말한 대로 상소는 오늘 아침에 벌써 출발했습니다.”
화엽은 조금도 숨김이 없었다.
“황제께서 장군의 대군이 왕역을 통과하게 윤허하면 우리는 전쟁을 피할 수 없겠군요?”
“지금 우리가 전쟁을 하는 것은 불필요한 살육을 일으켜 군사들을 피 흘리게 하는 짓일 뿐입니다. 하등 쓸데없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호신(虎神)’의 별칭을 가진 장군은 역시 병사들을 지키는 군신(軍神) 같은 인물이군요. 존경스럽습니다.”
류문지가 감탄하며 말했다.
“전에 류 선생과 리동, 리 선생이 리국의 좌상과 우상으로 이름을 나란히 한다 들었습니다. 선황제부터 대를 이은 문신이며, 출정하는 장수는 아니지요. 이번 대진에서 류 선생이 병사를 이끌고 올 줄은 몰랐습니다. 더구나 진형도 매우 정돈되어 있고 호령에도 위엄이 있더군요.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벌써 병사를 내보내 일전을 치렀을 것입니다.”
류문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기실 문인이 맞습니다. 그리고 늙었지요. 장군의 검술이라면 우리가 지금 1장만큼 떨어져 있어도 내 목을 가져가는 일쯤은 식은 죽 먹기일 겁니다. 그러나 장군이 나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나를 죽여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잖습니까. 내가 죽으면 수하의 장군들이 내가 남긴 전략대로 우리 주군께서 상양관을 뚫고 나와 귀국하실 때까지 단단히 수비할 테니까.”
“그때가 되면 이 적려 부대는 어찌 되는 겁니까? 아군에 투항하는 겁니까?”
류문지가 고개를 저었다.
“2만 대군입니다. 어찌 투항할 수 있겠습니까? 패하면 전군이 흩어져 뇌안산 서쪽 기슭을 돌아 고국으로 귀국할 계획입니다. 많은 사람이 죽을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일부는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테니.”
“리국공은 진정 패주로군요. 과감히 2만 명의 목숨을 거는 책략을 정한 것이 아닙니까?”
화엽이 감탄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패주를 따를 겁니다. 천신만고를 겪어야 비로소 그의 군마를 쫓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리국이 힘도 미약하고 생산량도 강국들에 미치지 못하지만 제후들을 제패한 이유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투지로 치면 우리 모두 류 선생 뒤의 군대에 비할 수 없지요.”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 오늘은 각자 영채로 돌아가 쉬기로 합시다. 우리가 이곳에서 대화를 나누면 뒤편의 병사들이 긴장하고 불안해하니까. 곧 태양이 높이 떠 몹시 더울 테니 괜히 병사들을 고생시키지 맙시다.”
화엽의 말에 류문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의 제안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내 장군께 한마디 일러드리자면 왕역을 통과하는 허가를 쉽게 받을 수 없을 겁니다. 황성의 황실과 대신들에게는 리국이든 순국이든 초위국이든 모두 제후이지요. 무슨 뜻인지 장군은 알 거라 생각합니다.”
“압니다. 현재 황제는 그 어떤 제후의 군사도 천계성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지요. 그러나 시도해 보는 것 외에 저도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허락을 얻지 못하면 어찌할 셈입니까?”
“상황의 변화를 보고 정해야겠지요. 백의가 승리한다면 그는 분명 황성으로 진군할 겁니다. 그는 충신일 뿐만 아니라 권력을 가진 신하이기도 하지요. 백의의 눈에 그가 지켜야 할 것은 대윤이지 이 조정의 황제가 아닙니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아도 그는 진군할 것이고 그럼 나도 그에게 협조할 것입니다.”
“장군은 충신이자 신의를 중시하는 사람이라 황실에 대항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장군의 3만 철기군이 천하를 누빌 수 있음에도 왕역 앞에서 내 2만 적려와 오래도록 대치만 하고 전쟁을 못 하고 있는 게지요. 한데 백의를 위해 장군이 황제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류문지가 물었다.
“황실에 대항하고 싶지는 않으나 천하에 영무예를 제압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건 백의뿐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여 백의는 죽어서는 안 됩니다. 백의를 위해서라면 나 화엽은 언제든 그의 명에 따라 움직일 수 있습니다!”
화엽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금속처럼 힘차고 쩌렁쩌렁했다.
류문지가 탄식을 뱉었다.
“명장 사이의 믿음과 우정이로군요. 그렇다면 우리 사이에 전쟁이 시작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선물로 보내주신 진귀한 고서는 돌려 달라 하셨으니 전쟁 전에 반드시 다 읽고 돌려드리도록 하지요.”
화엽이 나직이 말을 건넸다.
“시간이 충분하기를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류문지가 말머리를 돌려 떠나려는 그때, 화엽이 등 뒤에서 불쑥 물었다.
“류 선생.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류문지가 말고삐를 조이며 돌아보았다.
“류 선생께서는 왜 내게 고서 세 권을 보내셨는지요? 사실 그 책들은 내가 오랜 세월 찾아도 구하지 못했던 조나라 판 고서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철렁했지요. 류 선생이 내 마음을 꿰뚫어 본 것 같아서.”
화엽이 나직이 말했다.
류문지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장군께서 은거할 때 매일 향을 피우고 명상을 했다 들었습니다. 내면을 맑게 하여 세상의 참된 진리를 깨닫고자 하면서 말이지요.”
“그랬지요.”
“내 장군보다 나이가 많잖습니까. 내가 장군 나이 때 그런 고민을 했었지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마치 쇳물에서 끓여지는 듯 수많은 고통과 부득이한 상황들에 시달리지만, 그 삶에서 벗어날 힘이 없더군요. 후에 운 좋게도 장문교의 경전인 <장문경(長文經)>을 읽게 되었습니다. 순간 생각이 깨이며 다른 세상이 열린 듯했지요. 눈앞의 사람과 사물이 더는 사람과 사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지요. 대체 사람이 무엇인가? 사물은 무엇인가? 선악은 무엇이고 얻고 잃음은 또 무엇인가? 그때 나는 자주 구원성의 거리를 걸었습니다. 구원성의 태양이 강렬해 주위가 온통 환하고 몽롱하게 느껴졌지요. 갖가지 환상이 가물가물하고 일체가 가짜인 것 같았습니다. 밤에는 등불 아래에서 기괴한 책들을 읽었습니다. 바다와 하늘의 끝을 한없이 상상했고 이 세계 이전과 이 세계 이후의 일들을 생각했지요. 이 고서들은 당시 가산을 다 털어 산 것들로 장군도 좋아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화엽이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류 선생 말이 맞습니다. 세상은 매우 큰데 내가 아는 것은 매우 적은 듯하여 명상을 합니다.”
류문지가 웃으며 말했다.
“한 노인이 한 젊은이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장군이 깨달은 바를 더 젊은 사람에게 전해준다면 그것으로 보답이 되는 겁니다. 전에 만난 어떤 장문승도 내게 그리 말했지요.”
“우리가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 벗이 될 수 있었겠지요?”
화엽이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어쩌면 황야를 동행하는 두 장문승이 되었을지도 모르겠고요.”
류문지는 계속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곱씹어보게 되는 미소였다.
“옛날 일입니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더는 혼란스럽지 않다?”
“정녕 내가 왜 더는 혼란스럽지 않은지 모르는 겁니까?”
“리국공을 만나서입니까?”
“그렇습니다.”
류문지가 넋이 나간 듯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의 눈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아이라…….”
화엽이 탄식을 뱉었다.
“류 선생의 눈에 동륙의 패주도 아이일 적이 있었습니까?”
“모두가 어린아이지요. 지금 내 앞에 선 장군도 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세상은 매우 큰데 스스로 아는 바는 매우 적은 것 같았다고. 세상 이치를 모르면 그게 아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화엽은 잠시 망설였다.
“그럼 류 선생께서는 이 아이에게 어찌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가르쳐 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이에게는 집이 있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요. 장군의 혼란은 집을 찾지 못해서입니다. 그곳을 찾으면 더는 혼란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류문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집과 장군의 집은 한곳이 아닙니다.”
류문지가 말을 몰아 떠나가며 한 마디 더 보탰다.
“비록 나와 장군이 같은 길을 걷는 장문승은 될 수 없어도 벗이 될 수는 있었겠지요. 이곳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류문지의 말 뒤로 일어나는 먼지를 바라보면서 화엽은 고개를 저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