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39화 (139/360)

139

3장. 군왕(軍王) (7)

8월 스무하루. 깊은 밤.

상양관의 잿빛 성벽이 화염에 붉게 비쳤다. 평원 위의 웅장한 요새 맞은편으로 250보 거리에는 연합군의 임시 방벽과 울타리가 있었다. 울타리 앞으로 10보마다 모닥불이 한 더미씩 놓여 주위를 환히 비추었다. 연합군 군사들은 타오르는 불더미를 등지고 울타리에 기대 온기를 쬐며 꾸벅꾸벅 졸았다. 여섯 색깔의 깃발이 바람 속에 이따금씩 펄럭였다.

리군의 궁수 부대가 성 위를 지나갔다. 대치한 지 보름, 리군의 보병도 고단함에 졸음을 참지 못하고 삼삼오오 성가퀴 그림자에 웅크리고 앉아 잠을 잤다. 궁수를 통솔하는 천부장은 별말 없이 성큼성큼 다가가 보병들의 투구를 힘껏 쳤다. 잇달아 잠에서 깬 보병들은 분노한 눈빛의 천부장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얌전히 고개를 숙인 채 각자의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군사들은 성질이 불같은 천부장이자 뇌기군 우도통인 장박을 익히 알았다. 그 앞에서 불평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물며 장박은 조금도 해이해지지 않았다. 그는 보름 내리 매일 밤 칼을 들고 성벽 위를 순시했다. 길고 긴 성벽을 한 바퀴 다 돌면 족히 5리가 되었는데 그는 자정 전에 한 바퀴 돌고, 자정 후에 또 한 바퀴 돌았다.

“잠을 자? 꿈에서 목이라도 댕강 베이고 싶냐?”

장박이 소리를 낮추고 고함쳤다.

그의 거대한 몸 뒤편으로 검은색 군장을 갖춘 젊은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장박에게 손을 휘휘 내둘렀다.

“성질을 내봤자 소용없네. 이들이 이리 졸려 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겠지. 몇 교대냐?”

군사들은 태만하게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사현을 알아보았다. 비록 이 명장이 뇌단영을 맡고 있으며 영채에 나와 일반 병사들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일이 거의 없다지만 그는 장박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영무예의 최측근이었다.

“말은 3교대라고 하는데 밤에 자주 성 위로 끌려옵니다. 어떻게 배치되는 건지 하루에 두 번 당번을 서고 엉망입니다.”

군사는 나이가 적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쳐들고 약한 술을 한 모금 들이켜더니 소매로 입을 슥슥 닦았다. 리군의 대부분은 남쪽에서 모집한 군사들로 술과 칼, 이 두 가지를 반드시 지니고 다녔다. 목이 떨어질지라도 이 두 가지는 절대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았기에 군에서는 독주를 금지했다. 약한 술은 군사들에게 맹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군.”

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러느냐?”

중갑을 갖춰 입은 인영이 돌연 사현의 등 뒤에 섰다.

“왕야!”

놀란 성 꼭대기의 병사들은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 절했다.

영무예는 손을 내두르며 그들을 일으켰다. 그는 사현을 보며 물었다.

“어떠한가?”

“각 부대 사이에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누가 성에 올라 당번을 설 차례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모양입니다.”

사현이 수하에게 명령했다.

“네가 말을 타고 성 주위를 한 바퀴 돌아봐라. 오늘 밤에 어느 부대가 당번을 서고 있으며, 몇 명이나 되는지 셈해보고 돌아와 내게 보고해.”

“네!”

뇌단영 군사가 군마 한 필을 끌고 갔다. 말발굽소리가 차츰 멀어져갔다.

“제대로 셀 수 있는 자인가?”

영무예가 웃으며 물었다.

“제 수하이지요. 저는 믿습니다.”

사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군에 들어오기 전 과일을 팔던 이입니다. 한 상자에 과일이 몇 개 들었는지 대충 뒤적여보고도 알지요. 숫자에 있어서는 아마 뇌기 안에 그를 이길 자가 없을 겁니다.”

“백의는 보통 언제 오지?”

영무예가 성가퀴 가로 걸음을 옮겼다.

“호랑이도 제 말 하니 왔네요.”

영무예가 시선을 들어 내다보았다. 성 아래 멀찍한 곳에 초위국의 보병들이 진을 치고 방어했다. 진 앞으로는 녹각 울타리가 가득 놓였다. 진 위에 일렬로 늘어놓은 횃불이 화염장미의 커다란 깃발을 비추었다. 그때, 횃불이 비추지 않는 뒤편으로 흐릿한 백색 형상이 빠르게 다가왔다. 매우 우아한 백마였다. 질주할 때는 야생마가 황량한 들판을 내달리듯 갈기와 꼬리가 흩날렸다. 말 등에 앉은 이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가지런한 초위군 진열이 칼로 베인 듯 가운데부터 갈라졌고 무리 틈으로 백마가 경쾌하게 다가오더니 녹각과 울타리를 돌았다. 곧 백마는 상양관 성벽에서 400보 떨어진 곳까지 접근했다. 말에 탄 무사는 옷자락을 털며 말에서 내렸다. 창을 들지도, 검을 차지도 않았다. 허리춤에는 퉁소 하나가 가로 놓여 있었다.

“백의가 천계성에서 저리 홀로 말을 타고 길을 걸었다면 귀족 자제들과 규수들이 비명을 질러댔겠지?”

영무예가 웃으며 말했다.

“그랬겠지요. 천계성에 발을 디뎠다면 백성들이 향을 피우고 열렬히 환영하며 맞이했을 겁니다.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귀족 집안의 아리따운 여식들도 줄을 이었을 테고요. 저희가 성에 들어가면 집집마다 문을 닫지요. 왕야 수중의 칼과 강한 군대가 아니었다면 아마 모두가 우리를 때려잡으라 소리쳤을 겁니다.”

사현도 웃으며 대꾸했다.

영무예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지. 자네 말처럼 나는 시골 제후가 아닌가. 촌놈의 더러운 엉덩이로 황제의 궁전을 더럽히려는데 무슨 대우를 바라겠나?”

백의는 말을 풀어 뒤편에서 풀을 먹게 두고 허리춤의 퉁소를 뽑아 어루만졌다. 그는 혼자서 천천히 걸었다. 걸음걸이가 가볍고 사뿐했다.

백의가 걸음을 멈추고 퉁소 소리가 만연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흡사 넘쳐흐르는 파도 같았다. 극히 낮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해 상양관 성벽 높이까지 이를 듯했다. 8월 밤은 원래 춥지 않았다. 하지만 백의의 퉁소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주위 온도가 훅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영무예가 미간을 찌푸렸다.

“사현…. 백의가 부는 곡조가 무언가? 난 처음 들어보는 곡인데?”

사현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퉁소를 들을 줄 아신다 한 것은 부인의 퉁소 소리가 귀에 익으신 것이겠지요. 부인의 구절소(九節簫)1)는 으뜸이기는 하나 현지 악보가 전부 진북의 것입니다. 미성숙하고 빈한한 내용으로 영웅이 전장을 평정하는 위엄은 없지요. 관현악의 대가 여섯 중에 넷이 황성에 있습니다. 풍림만의 ‘류상앵’은 왕야께서도 아시겠지만 막자허의 ‘배관’과 좌참룡의 ‘세수소’, 팔성선의 ‘쇄공후’는 모르시지요?”

영무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넷 중에 젊은 풍림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20년 된 국수(國手)들입니다. 부인의 구절소는 원함 선생에게 전수받은 것으로 원함 선생과 황성의 네 사람은 이름을 나란히 하지요. 희 황제가 황제 노릇은 이류였으나 문학과 음악 방면에서는 일류 중의 일류였습니다. 희 황제 앞에서 음악을 논할 수 있는 자는 황족은 말할 것도 없고 대윤 조정에서도 두셋에 불과했습니다. 희 황제는 황성이 천하 악장의 태반을 얻었다 말했었지요. 여섯 대가 중 넷이 황성에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독보적이었지. 내 처음에 그를 죽이기 싫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해. 한데 그 멍청이가 칼에 제 목을 들이밀었지.”

영무예가 고개를 저었다.

“백의도 어쨌든 황족의 방계로 근왕의 깃발을 들고 왔으니 지금 양군 진영 앞에서 당연히 제 신분을 내세워야 하겠지요. 그가 부는 것은 위엄 있고 강직하며 재상의 풍모를 띠는 황성의 곡조입니다.”

사현은 손바닥으로 소리 없이 박자를 맞추었다.

“내가 남쪽 변방의 시골 제후라는 말을 또 하려는 겐가?”

영무예가 음악에 푹 빠진 듯한 부하를 흘겨보았다.

“자네가 듣기에 연주가 어떠한가?”

“국수에 비한다면 당연히 못하겠지만 그래도 국수의 제자입니다. 좌참룡의 청렴하고 강직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그에게 전수받은 바가 있겠지요? 이 곡은 <만취홍(慢吹紅)>이라 합니다. 술자리의 악사가 흥을 돋우기 위해 연주하는 곡인데 무척 한가롭고 나른하지요. 그러나 백의의 손에서 군더더기 변주가 제거되니 외롭고도 그윽하며 어렴풋하게 슬픔도 느껴지는군요.”

“슬픔?”

장박이 곁눈질로 흘깃 보며 말을 얹었다.

“동륙 최고의 명장이네. 7만 대군을 데려와 우리를 포위하고서 아주 기세가 등등한데 슬프긴 뭐가 슬프다는 건가?”

“어떤 사람은 술 한 단지만 줘도 근심을 잊지만, 누군가는 천하를 가져도 슬픈 법이지.”

사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소위 슬픔과 근심이란 과거의 사람은 쫓을 수 없음에, 현재의 마음이 만족할 수 없음에, 미래의 일을 알 수 없음에 생기는 것이네. 이는 만고에 변치 않는 근심이지. 백의의 퉁소는 슬픔과 근심 외에도 한기가 느껴지는군. 칼집에 든 칼처럼 겉에 드러나지는 않으나 그만의 강직함이 있어!”

돌연 퉁소 소리가 그쳤다!

영무예는 흠칫 놀랐다. 멀리 고개를 숙이고 퉁소를 불던 백의가 고개를 들었다.

“불을 꺼라! 백의는 활로 이름을 날린 자다!”

사현은 군사들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손바닥으로 옆에 남은 마지막 등롱을 탁 쳐서 떨어뜨렸다.

주위 군사들은 놀라 거의 동시에 칼을 뽑아 들었다. 서늘한 칼빛에 달이 반짝였다.

“저자와는 최소 250보가 떨어져 있다. 대낮이라고 해도 명중한다는 보장이 없는데 뭘 그리 호들갑이냐?”

장박이 나직이 소리쳤다.

영무예는 어둠 속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현은 힘껏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백의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차디찬 가시가 그의 등을 찌르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마치 화살 같은 그것이 이미 그를 관통한 느낌이었다. 그는 별과 달의 미약한 빛을 빌려 곁에 선 리국공을 흘긋 보았다. 영무예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못 흥미로운 듯 성 밖을 바라보았다.

“제가 운이 좋은가 봅니다? 성 위에서 퉁소를 들으시는 분은 리국공 전하이시지요?”

백의가 돌연 소리 높여 외쳤다.

적막 속에서 영무예가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백 대장군. 연주가 훌륭하더구먼. 내 수하 수현이 말하기를 <만취홍>에서 금속의 강직한 음이 들린다더군. 역시 동륙 제일의 명장이야.”

영무예의 목소리는 별로 높지 않고 나직하며 중후했다. 웃음기를 띤 목소리가 살짝 서늘한 밤, 아주 멀리까지 퍼져갔다.

“퉁소 실력으로 동륙 제일의 명장이 된 것은 아닙니다.”

백의가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7일 내에 성으로 쳐들어갈 것입니다!”

모두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백의는 이미 뒤돌아 말에 올라타고 초위군 영채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공기 중에 남아 메아리쳤다. 모두가 서로의 얼굴만 멀거니 쳐다보았다.

“사현. 오늘이 8월 스무하루지?”

영무예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돌려 그가 가장 믿는 측근을 바라보았다.

“네, 맞습니다.”

“7일 내에 결전이라. 8월 스무여드레겠군…….”

영무예는 말채찍으로 손바닥을 두드렸다. 동시에 혼자 중얼대면서 성루를 오르내리는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빠른 말로 구원성에 돌아가면 부인의 생일에는 댈 수 있겠어.”

사현은 깜짝 놀라며 미소를 지었다.

“저는 깜빡하고 있었습니다.”

“내 부인의 생일을 자네가 왜 기억하나?”

영무예가 돌아보지도 않고 툭 말을 뱉었다.

장박은 망연히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국공의 뒷모습을 보았다가 또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사현을 쳐다보았다.

“국공과 이런 쓸데없는 얘기를 나눌 정신이 있나?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야. 백의가 7일 내에 성을 함락하겠다는데 어떻게 함락하겠다는 것이겠는가? 백의가 우리 목에 칼을 들이밀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게야?”

사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동륙 제일의 명장이네. 우리가 어찌 그자의 계책을 알 수 있겠는가. 내 병법이 그자보다 뛰어나다면 최고 명장은 내가 아니겠는가?”

“그…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인가?”

장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계획을 알 수 없으니 그저 풍월을 읊을밖에.”

사현이 손바닥을 위로 펼쳐보였다.

“암, 풍월을 읊어야지. 그래야 어떤 수하가 맨날 나더러 시골 제후라 하지 못할 게 아닌가.”

리국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박은 어리둥절했다.

“무슨 소린지 나는 모르겠네! 하여간 명쾌하지가 못하다니까!”

사현은 장박의 뒷모습을 보며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까 성을 돌아보러 갔던 뇌단영이 벌써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반 무릎을 꿇었다.

“합산이 끝났습니다. 현재 성안 당직은 총 125개 부대의 군사로 약 1만3천 명입니다. 본래 당직을 설 인원은 9천 명에 불과합니다.”

“역시 과도하게 긴장한 탓에 죄다 성 위로 올려보낸 게지. 명을 전해라. 당직 차례를 새로이 정한다. 적려는 4개 대대로 나뉘어 당직을 선다. 2개 대대는 방어하고 1개 대대는 휴식, 1개 대대는 영채에서 명을 대기해라! 당직을 서지 않는 이들은 전부 영채에서 대기한다. 자야 할 사람들은 자고 명을 기다릴 사람들은 명을 기다려라. 전부 성 위로 올라와 어슬렁거리지 않도록. 물과 불을 주의하고 신원이 불분명한 자가 군영에 접근하는 것을 엄격히 단속해라. 성 위의 화살과 투석기 경비는 인력을 추가한다. 최소 이레만 버티면 된다. 그때까지 우리가 살아 있다면…….”

“네!”

“팔월 스무하루…. 동륙 최고 명장은 정말 그리 자신 있는 것인가?”

고개를 돌린 사현이 머리를 들었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 걸린 하현달이 보였다. 늑대 이빨처럼 날카로웠다.

팔월 스물둘째 날.

중주. 왕역의 북쪽, 당양곡 어귀.

임시로 세운 작은 집 한 채에 대나무 자리를 깔고 검은 투구에 검은 갑옷을 입은 장군이 양반 다리를 하고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눈앞에는 오래되고 소박한 직도(直刀)2) 한 자루가 가로 놓여 있었다. 향로에서 훈향이 그윽하게 피어올랐다. 가느다랗고 곧은 향 연기는 일정 높이까지 올라간 뒤에야 흩어졌다. 조용한 가을날 아침이었고, 바람 한 점 없었기 때문이었다. 명상하는 장군도 조각상처럼 숨을 쉬지 않았다.

당양곡 일대에서 날씨가 가장 좋은 계절이었다. 하늘은 높디높고 맑았으며 막 솟아오른 태양은 따스했다. 작은 집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소나무로 지었고 몹시 누추했다. 심지어 여닫는 창문도 없었다. 하지만 소나무 사이로 틈이 많아 물기를 머금은 신선한 공기가 스며들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향 연기가 돌연 어지러이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장군이 눈을 떴다. 장군의 얼굴은 면갑 아래 완전히 가려졌고 드러난 것은 두 눈동자뿐이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곧이어 달려오던 사람이 급히 발걸음을 멈추고 문 밖에 무릎을 꿇었다.

“이리 일찍 찾아오다니.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느냐?”

장군이 물었다.

“화 장군께 아룁니다. 상양관 앞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백의 대장군이 리국공 전하에게 전쟁을 약속했으며 그 시기는 6일 후라고 합니다!”

“성을 함락하는 전쟁에선 한쪽은 공격하고 한쪽은 수비를 하지. 공격하는 쪽은 상대가 무방비한 틈을 타야 하고 수비하는 쪽은 항시 경계해야 하거늘, 전쟁을 약속하는 경우가 어디 있지? 백의의 발상이 기발하군. 리국공 전하는 어찌 대답했다더냐?”

“어젯밤 두 사람이 구두로 약속을 했다 들었습니다. 리국공 전하도 약속에 응했다 합니다.”

“시원하게 응했군. 패주와 명장의 전쟁이라. 전쟁터 싸움의 승패만이 아니라 담력과 지모, 위엄과 기백까지 겨루게 되겠군. 상양관에 가서 직접 그 전투를 볼 수 없다니 아쉽구나.”

장군은 애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또 다른 일이 있느냐?”

“네. 리군 통수 류문지가 또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그래? 무슨 선물이냐?”

“이번에는 조나라 때의 오래된 책을 몇 권 보내왔습니다. 가져온 이의 말로는 류 재상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며 드릴 수는 없고 장군께서 마음에 드시면 보고 돌려달라 했다 합니다.”

“음.”

장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떤 책이더냐?”

“<소계통은(韶溪通隱)>, <해창지이록(海蒼誌異錄)>, <승산지문필기(冼山知聞筆記)> 세 권입니다.”

“내 취향을 참으로 잘 아는 자로군. 조나라 판 고서는 지금도 가치가 있는 귀중한 물건이지. 역시 류문지 선생은 얕보아서는 안 되겠구나.”

장군이 말을 이었다.

“책은 받아두어라. 그리고 전군(前軍) 진열에 알려라. 사시(巳時)가 되면 며칠 전에 그랬듯이 류문지 선생과 진 앞에서 대화를 할 것이라고.”

“네!”

“지필묵을 가져와라. 황제 폐하께 상소를 써야겠다.”

* * *

1) 몸통에 마디가 아홉 개 있고 여러 조각 장식이 더해진 퉁소의 한 종류.

2) 몸신이 휘어지지 않고 곧은 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