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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군왕(軍王) (6)
“출발하기 전에 상양관에 관한 문서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요새는 구조가 극도로 교묘하더군요. 수원은 지하 바닥의 샘물이라 우물을 30척 깊이로 파야 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백의가 땅을 파서 이 수맥을 끊으려 한다면 적어도 주위 일대의 지형만 탐사하는 데 1년 반이라는 시간이 들지요. 화공은 과거 장미 황제가 강공을 펼치며 사용한 수법입니다. 그 혈전 이후 상양관의 모든 건물에는 목재를 사용하지 않았지요. 타기 쉬운 군수품은 제가 지하에 저장하라 명을 내려두었습니다. 그리고 독은 보통 물에 풀지요.”
사현이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무심한 손길이었다.
“독을 써서 승리를 얻고자 한다면 백의는 먼저 수맥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자네 말대로라면 아군은 태산처럼 끄떡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
영무예가 이어 다음 수를 두었다.
“하지만 앞선 세 가지 계략은 모두 제 생각입니다. 백의는 동륙 최고의 명장이라 불리는 자이니 분명 제가 생각하지 못한 한 수가 있겠지요!”
사현이 돌연 바둑알 하나를 집더니 천천히 바둑판에 내려놓았다. 탁 소리와 함께 그가 한마디를 뱉었다.
“왕야, 지셨습니다!”
깜짝 놀란 영무예가 황급히 바둑판을 보았다.
사현이 바둑판을 밀며 말했다.
“중반에서 격전을 펼치고 각개로 포위를 뚫는 것이 왕야의 특기지요.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사방에서 칼과 창이 휘둘러지니 왕야께서 아무리 맹렬한 용이라 하여도 천군만마에 갇혀 죽을 겁니다!”
“잠깐, 가만히 있게! 다시 봐야겠어!”
영무예는 사현의 광언(狂言)에 대꾸할 새가 없었다. 그는 혹시라도 내려놓은 바둑알이 움직여 복기할 수 없을까 봐 걱정하면서 얼른 사현이 밀어낸 바둑판을 감쌌다. 그는 판세를 들여다보며 골똘히 생각했고 반대편의 사현은 나직이 웃으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이 지나고 영무예는 손가락을 가볍게 툭 털며 바둑알을 나무함에 도로 넣었다.
“또 졌군.”
한 시대의 패주에게 약간 낙담한 기색이 어렸다. 영무예는 바둑 두기를 가장 좋아했다.
“왕야의 바둑 실력이면 세 수 전에 이미 이 판은 끝났음을 아셨어야 합니다. 왕야의 마지막 몇 수는 궁지에 몰린 짐승 최후의 발악이라 할 수 있지요.”
사현이 차갑게 웃으며 매정하게 단언했다.
영무예도 화내지 않았다.
“자네의 바둑 실력은 나보다 한참 위지. 전쟁터였다면 자네 같은 자가 열 명이어도 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바둑판에서 자네는 하늘의 매고 나는 그저 들토끼일 뿐이지. 그러나 매에게 붙잡힌 토끼도 매를 밟고 오를 때가 있을 것이네.”
“생사의 절박한 고비에서는 당연히 도박을 걸어도 무방하겠으나 최후의 순간이 되기도 전에 처참하게 싸울 필요는 없겠지요.”
영무예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눈빛이 돌연 날카로워졌다.
“할 말이 있으면 하게.”
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 척후의 전서구를 받았습니다. 화엽의 풍호 기병 3만 병마가 언제든 천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행장을 갖추고 출발을 기다리는 중이라 합니다. 지금 당양곡 어귀에서 류 재상이 인솔하는 2만 적려 군단과 대치 중이라더군요. 류 재상이 공격하지 않으면 화엽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류 재상이 돌격해 적진을 함락하는 것은 가망이 없는 일이지요. 그가 진을 치는 일에는 보기 드문 병법가이나 화엽을 막기에는 힘이 달릴 것 같습니다. 풍호군에 격파당하면 서쪽으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는데 뇌안산맥 끝의 작은 길로 돌아 귀국할 수는 있겠으나 손실이 심각할 것입니다.”
영무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추호가 강한 상대이기는 하지.”
“맞습니다. 동륙의 4대 명장은 용, 호랑이, 범, 여우인데 각자 장기가 있지요. 추호 화엽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용장’ 백의가 왕야를 쳐부술 수 있다는 데 걸었다는 소립니다. 그때 가서 공격을 개시하면 류 재상의 군단과 왕야의 남은 병사들을 한꺼번에 짓밟을 수 있겠지요.”
“그럼 나머지 제후국들은 누구에게 걸었는가?”
“이번 연맹국의 제후들 중에서 출혈을 감수하고 도박을 건 나라는 하당국과 순국, 초위국뿐입니다. 하당은 초위국과의 공수동맹 협약에 걸었고, 초위국은 왕야를 몰아내고 천계성을 장악하는 데 걸었지요. 나머지는 그저 초위군과 우리 군이 함께 망하는 데 걸었을 뿐입니다. 그래야 그 혼란한 틈에 자기들이 떨치고 일어날 기회가 있을 테니까요.”
“보아하니 우리 상대가 그저 철판 한 무더기는 아니었군.”
“하지만 왕야,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사현이 웃으며 말했다.
“비록 저들에게 각자 불화가 있으나, 누구 하나 순순히 우리를 보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후들이 쇄하산 동맹에서 왕야가 천계 수호사의 신분으로 황성을 점거하는 데 동의한 이유도 다 그 기회를 통해 왕야를 황성에 가둬두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은 이날을 오래 기다려왔습니다. 7만 대군의 기세로 성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계속 말해보게.”
영무예가 돌연 웃으며 말했다.
“이 바둑판 같은 겁니다.”
사현이 바둑판의 마지막 형세를 가리켰다.
“왕야께서는 실력이 약하지 않습니다. 중반의 공격력은 저보다 낫지요. 그러나 왕야의 포석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은 중반의 전투력으로 약간의 우세를 되찾았지만 전체 대국에서의 손실을 막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왕야께서 병사를 쓰심에도 늘 이와 같습니다. 5천 뇌기병으로 천계성을 점령한 것은 극도로 위험한 일이었지요. 그 일전에서 대승을 거두긴 했으나 아군은 그곳에 갇혀 도리어 대세를 잃고 말았습니다. 현재 고국의 내란으로 왕야께서는 어쩔 수 없이 황성을 버리고 리국으로 돌아가야 하지요. 앞전의 위험한 수는 헛수고가 되어버렸습니다. 6년간 급변하는 정세에 왕야의 맹주 칭호는 입지를 확고히 했으나 실권은 전혀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왕야의 후수가 효과가 있을지라도…….”
사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어쨌든 지금 우리는 동륙의 6국을 맞닥뜨렸고 상대 진영에는 명장이 많습니다. 수를 두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해 우리가 천계를 공격하려 비밀리에 모의했을 때 자네는 이렇게 많은 말로 내게 반대하지 않았었는데 말이야.”
“당시 소신은 나이가 어리고 무지하여 왕야께서 하는 말씀이 다 옳다고 여겼지요.”
사현이 거리낌 없이 말했다.
“헛소리.”
영무예가 차갑게 웃었다.
“자네가 나를 안 그날부터 나는 자네가 날 그리 믿고 따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네.”
“어쨌든 왕야께서는 혈기에 따라 행동하실 때가 여전히 많으십니다. 제가 믿고 따르는 것도 왕야의 혈기이나, 제가 왕야께 권하는 바도 그 혈기를 조금 거두십사 하는 것입니다.”
사현은 살짝 몸을 숙이며 그의 진중함과 간절함을 내비쳤다.
잠시 깊이 생각하던 영무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말한 것들은 나도 생각해본 적 있네. 하지만 당초 황성을 점령했을 때는 국내 정세가 이리 혼란해질 줄 몰랐지. 진이의 치국 능력이 너무도 실망스럽네. 스승님이 안 계셔서 안타까울 뿐이야.”
영무예가 말한 이는 자신의 스승, 리국의 노신 리동이었다. 과거 영무예가 출정할 때면 국내에서는 리동이 감국하여 후방이 견고했다. 리동이 세상을 떠난 뒤 영무예는 강한 조력자를 잃었고 어쩔 수 없이 장자 영진에게 중임을 맡겼다. 그러나 영진은 어떻게 해도 사자 같은 아버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장공자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리 재상께서 살아 감국을 보셨다 하더라도 왕야께서 떠난 지 너무 오래되었으니 야심 있는 신하들은 여전히 움직였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처럼 오만하지는 않았겠지만요.”
사현이 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왕야께서 리국에 계실 때는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다가 떠나기만 하면 무례해지는 이유를 생각해본 적 있으십니까?”
“말해보게!”
“신하들은 왕야에게 두려움을 더 많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수단, 왕도의 최고는 회유와 이상입니다. 그러나 왕야의 수단은…….”
사현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패도(霸道)뿐이지요!”
“패도?”
영무예가 사현을 응시했다. 눈 속에 설명할 수 없는 한기가 어렸다. 분노를 머금고 터트리지 않는 듯했다.
“네, 패도요!”
사현 또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돌연 영무예가 활짝 웃었다. 그는 일어나 천천히 막사 문가로 걸어가더니 휘장을 젖히고 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리군 무사들은 장극(長戟)을 들고 건물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10보마다 하나씩 놓인 횃불이 멀리까지 이어지며 길고 가느다란 불길로 변해 종횡으로 어둠 속의 요새를 갈랐다. 멀리 성벽 위의 커다란 깃발이 허공에서 펄럭였다. 기병들은 딱따기를 두드리고 큰 소리로 외치며 성벽으로 달려가 성을 지키는 보병들에게 명령을 전했다. 거센 밤바람이 불어 두꺼운 비단 외투마저도 바람에 흩날릴 듯했다.
“우리 리국은 남쪽 황야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고 세상 사람들은 모두 우리를 남쪽 오랑캐라 불렀지. 천하에 제일 권력을 얻지 못한 제후가 바로 우리 영씨 가문이었어. 매년 천계성에 바치는 공물을 궁중에서 다 낼 수 없어 국고를 써야했네. 매년 돈을 빌리고, 매년 갚지 못했지. 보릿고개가 오면 백성들은 굶어 죽었어. 내 증조부께서 춘절에 황제를 알현하러 갔을 때, 황제가 궁에서 특별히 제조한 돈을 뿌렸네. 내 증조부는 앞다투어 돈을 낚아채려는 사람들에게 밟혀 돌아가셨지.”
영무예가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내가 즉위하고 20년 만에 우리 리국은 우뚝 일어나 동륙을 제패했네! 병사들이 가장 뛰어나지 않았다면, 가장 위험한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 남쪽 오랑캐에게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한데 조심스럽게 다스리라고?”
영무예가 돌연 크게 웃었다.
“사현. 자네는 내가 부잣집 늙은이로 죽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사현은 낯빛이 살짝 변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아로 태어났다면 말을 몰고 달리며 칼을 겨누어 천하를 굴복시켜야지!”
영무예가 나직이 외쳤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어. 침상에서 죽거나 칼에 죽거나지. 내 올해 벌써 마흔둘이네. 천하가 리국이 되는 그날을 내가 볼 수 있겠는가?”
영무예와 사현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순간 막사 안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해졌다.
한참 뒤 사현이 돌연 엄숙한 얼굴로 전포를 젖히고 반 무릎을 꿇었다.
“기탄없이 대해주심에 사현,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소신 왕야께 무리한 청이 있습니다. 태청각 옥좌에 앉으시게 되는 날, 제게 유림 서원을 하사해 주십시오.”
영무예는 흠칫 놀랐다. 유림 서원은 천계성의 국학관 외에 가장 명성이 높은 서원이었다. 그가 천계성을 점거했을 때도 문인들을 욕보일 수는 없어 군사들에게 그곳에서는 소동을 피우지 말라 엄중히 명령을 내렸다. 포상에 언제나 소탈했던 사현이 오늘밤 돌연 유림 서원을 하사해달라 청하니 영무예는 일순 어안이 벙벙해졌다.
“왕야께서 패하시면 사현은 왕야를 좇아 죽을 것입니다.”
사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유림 서원? 그것이면 되느냐?”
영무예는 살짝 이상했다.
“그곳은 별로 돈이 되지 않는다. 내 다른 것도 하사하마.”
“동경하는 곳입니다.”
사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상은 왕야 마음대로 내려주십시오.”
두 사람은 각자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나저나 백의는 요 이틀간 무엇을 하고 있지?”
영무예가 불쑥 물었다.
“밤마다 성 밖의 공터에서 퉁소를 붑니다. 듣자 하니 꽤나 잘 분다고 하더군요. 저희 군사들도 적잖이 그의 퉁소 소리를 기다리는 모양입니다.”
“퉁소를 불어?”
영무예는 흠칫 놀라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지금 10만 대군에 포위되어 상양관에 갇혀 있는 것은 우리이니 밤마다 퉁소를 불며 태연한 척해야 하는 것도 나여야 하지 않느냐?”
“어쩌면 백의도 자신은 성을 공격하는 일이 급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이겠지요. 성에 포위되어 퉁소를 부는 것은 적에게 침착함을 보여주는 것이고 성을 포위하고 퉁소를 부는 것은 적에게 태연함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각자 악기를 부는 데는 저마다의 뜻이 있으나.”
사현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왕야께서는 퉁소를 불 줄 모르시잖습니까.”
“그래도 들을 줄은 알지. 재미있군. 내일 밤 함께 백의의 퉁소 소리를 들으러 가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