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37화 (13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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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군왕(軍王) (5)

고월의는 젊고 경험이 부족해 가장 말석에 앉았다. 식연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조금 전에 진 앞에서 전투를 감독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하당군에서 매우 용맹한 만족 소년을 보았습니다. 마음 씀씀이가 인자하더군요.”

고월의가 칭찬했다.

“우리 하당의 귀빈인 여귀진 세자가 성미를 참지 못하고 홀로 전투에 나섰나 보구려. 녀석은 내 제자요. 고 장군의 칭찬을 받다니. 참으로 영광이외다.”

식연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 쓸 물을 없애버리면 어떻겠느냐고 했는데, 리군의 수로를 끊자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상양관의 지세가 주위보다 높으니 물이 흘러들어 모이는 곳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상양관의 수로를 끊으면 리군도 성을 나와 싸우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 계획은 실행 불가요.”

비안이 단호하고 엄한 얼굴로 말했다.

“내 이미 주위를 살펴보았는데 상양관으로 흘러드는 강물이 없소. 관내 지하로 두 산의 샘물이 흘러 들어가니, 우물을 파서 물을 공급하는 것 같소. 하지만 샘이 흘러드는 곳을 찾으려 해도 하늘의 별따기요.”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니, 비안 장군은 묘책이라도 있으시오?”

정규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안은 기백이 삼엄하며 말수도 적고 잘 웃지도 않은 터라 정규는 그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데다가 계속 안 된다 소리만 하니 나가 싸우고 싶은 정규는 몹시 불만스러웠다.

“장군들께서는 시독술(屍毒術)을 들어본 적 있소?”

“시독?”

“몇 차례의 접전을 치러 시체가 충분하오. 죽은 지 열흘이 넘은 시신을 흙에서 꺼내 포석기로 상양관 안에 던져 넣는 거요. 적군을 겁줄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시신의 역병과 시독이 퍼져나갈 거요. 특히 우물에 들어가면 한 달도 안 걸려서 상양관은 죽은 성이 되겠지.”

태연하게 말을 마친 비안이 휙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규, 강무외, 고월의는 의아한 표정이었고 백의는 모두를 등지고 있었다. 뜻밖에도 식연만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막사 안은 일순 고요해졌다.

“그건 안 되오. 안 돼.”

정규가 한참 생각하더니 커다란 손을 휘휘 내두르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도처에 썩은 시체가 널리면 우리가 상양관을 빼앗아도 들어갈 수 없잖소.”

“정 장군은 영무예가 그리 어리석다고 생각하시오?”

비안이 정규를 무시하며 말했다.

“군사들 한 무리가 중독되기만 하면 영무예는 다급히 포위를 뚫으려 하게 되어 있소. 그때가 그를 해치울 절호의 기회요!”

“제국의 근왕군이 어찌 그런 음험한 계략을 쓸 수 있소? 이는 폐하의 정치적 덕행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소.”

강무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안이 싸늘하게 비웃었다.

“강 노장군. 장군께서는 열넷에 전쟁에 나가셨고, 무수한 사람이 장군의 칼날 아래 죽어갔다고 익히 들었습니다.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독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뭐가 다릅니까? 폐하께서는 영무예에게 협박을 당한 지 오래이니 우리가 정말 영무예를 독살한다면 기뻐해도 모자랄 터인데 무슨 정치적 덕행 따위의 허상을 신경 쓰시겠소?”

“내가 늙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강무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미 죽은 군사들이라고 해도 어찌 시신을 파내 망혼을 불안케 할 수 있겠소?”

“이미 죽은 마당에 그 따위 것이 다 무슨 소리요? 강 장군께서는 산 자의 목숨은 상관 않으면서 죽은 자의 안위를 신경 쓰는 거요?”

강무외는 미간을 찌푸릴 뿐 더는 말을 얹지 않았다.

“문득 생각났는데 말이오. 일전에 비 장군께서 오하성을 포위했을 때 병사 한 명 내보내지도 않고 적을 전멸시켰잖소. 그때도 이 묘책을 쓴 것이오?”

식연이 돌연 웃으며 물었다.

“맞소. 한 달 후 성안 곳곳에는 시신이 널려 있었지. 수천 근의 유황과 석회로 중독시켰소.”

식연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좋소. 다들 의견 있으면 말씀해 보시오. 하지만 최종 결정은 백 대장군께 맡깁시다.”

식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백의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는 오른손으로 가볍게 주먹을 쥐고서 단호하게 탁자를 쳤다.

“기왕 내게 결정권이 있으니, 비안 장군은 더 이상 그 얘기는 거론치 마시오. 시독술로 성을 공격하는 것은 군법의 도리에 어긋나오.”

“어찌 어긋난단 거요?”

비안은 노기를 억누르며 소리쳐 물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오!”

비안은 순간 온몸이 선득해졌다. 백의가 말을 하면서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치고 비안은 자신의 날카로운 눈빛이 밀리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백의는 살기도 없었고 위엄도 띠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조용한 압력은 사람을 저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살짝 나이가 들어 보일 정도로 고요한 이 명장은 눈을 드는 순간 돌변한 듯했다.

모두가 조용해지자 백의가 말을 이었다.

“좋은 계획이 없으면 일단 오늘은 이만 해산합시다. 리국이 황제를 위협하는 것도, 우리가 다시 왕조를 일으키려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각국 명장들은 말없이 일어나 막사를 떠났다. 맨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식연은 막사를 나서기 전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던졌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자네에겐 벌써 성을 무너뜨릴 계획이 있겠지?”

“열흘 안에 공격할 것이네.”

백의 또한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얄미운 오만함은 여전하군. 자네 눈에 우리는 그저 장단을 맞춰줄 사람들에 불과하겠지? 성미 한번 고약하구먼!”

식연이 껄껄 웃으며 막사를 나갔다. 이미 그는 고월의와 진북국 진영에서 차를 마시기로 약조한 터였다.

푸른 옷을 입은 문인이 측면의 휘장을 젖히더니 소리 없이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시킨 일은 다 처리되었느냐?”

“낭독(狼毒) 3천 근, 오두(烏頭) 1천 근, 대극(大戟) 3천 근을 모두 끓여서 총 1천50근의 약을 조제하였습니다. 심복 군사 50명을 보내두었고 대장군의 명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백의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명령을 기다려라. 그리고 너도 내 곁에서 오래 지켜보았을 터인데, 제후국 통수들이 어떠한 것 같으냐?”

문인이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정규는 일개 무인으로 풍호 철기군의 대장이 된 것도 다 추호 화엽의 덕을 보아서이니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강무외는 한때의 명장이나 서슬도 사라지고 살기도 없으니 두려워할 필요 없지요. 다만 비안은 형세를 통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계략도 악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할 수 있으니 아군과 적이 된다면 강한 적수가 될 것입니다.”

백의가 담담하게 웃었다.

“반만 맞았다. 강무외는 어떤 이야기들은 아마 꺼낼 가치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비안은 제 능력을 과하게 드러내니 썩 잘하는 행동은 아니지. 긴 날은 쉽게 부러진다는 말을 못 들어봤느냐? 날이 얇은 칼은 날카롭지만 제일 쉽게 이가 빠지는 법이다. 나머지 둘에 대해서도 말해 보아라.”

“진북국 고월의는 재주가 뛰어나나 겸허하며 대장의 풍모가 있습니다만 시일이 더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당의 식 장군은…….”

문인이 망설였다.

“기탄없이 말해 보아라.”

“대장군의 오래된 벗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식 장군에게는 명장의 기상(氣像)이 없습니다.”

백의가 소리 없이 웃었다.

“게으른 명문가 공자 같지. 안 그러냐?”

“대장군. 망언을 용서하십시오.”

문인이 허리 숙여 절을 했다.

백의가 고개를 저었다.

“자후. 네가 사람을 잘 보는 것을 안다. 그러나 세상에 어떤 사람들은 네 예상 밖에 있기도 하다. 식연은 두 눈만으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당대 명장이라는 네 글자가 손색없는 사람이지. 언젠가 네가 홀로 군사를 이끌고 식연과 맞서게 된다면 한순간도 망설이지 말고 빠르게 후퇴해라. 네 평생 뛰어넘을 수 없을 사람이며 내게도 가장 까다로운 적이니라!”

“적이라뇨?”

문인이 깜짝 놀랐다.

“식연 장군은 대장군의 벗이 아닙니까?”

백의는 한참을 침묵하더니 돌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식연의 가장 친한 벗이고 그의 성격을 너무 잘 알기에 그런 것이다. 지금의 식연은 내 적도 아니지만 더는 내 벗도 아니다!”

깊은 밤, 상양관의 리군 진영의 큰 막사 하나에는 아직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오늘 성 아래에서 한판 맞붙었습니다. 저희 쪽에서는 100명 부대가 출동해 25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사현이 장고를 두며 툭 말을 뱉었다.

“뇌기군 사상자가 25명이라고?”

영무예가 화들짝 놀랐다.

“보통 피해가 아니로군. 적군의 손실은 어떠했느냐?”

“한 명이 죽고 한 명이 다쳤습니다.”

“어찌 그랬지?”

“진북의 장성, 고월의를 마주쳤습니다.”

“들어본 이름이군. 명성만큼이나 실력도 있는 모양이야.”

영무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야께서는 적진에 강한 후배가 나온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시는 것 같군요. 삽매곡에서 만난 그 아이처럼요.”

사현이 웃었다.

“바둑 같은 게지. 상대의 힘이 약하면 재미없지 않나. 그러나 상대의 실력이 너무 강해도 재미없지. 내 자네와 바둑을 두는 것이 점점 재미없어지는 것처럼 말이야.”

“전에는 왕야를 봐드렸고, 이제는 봐드리지 않을 뿐입니다. 제 실력은 똑같습니다.”

“오랫동안 자네에게 속았어. 조금만 더 나아지면 바둑판에서 자네를 이길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자네의 함정이었을 줄이야. 자네가 백의라면 다음 행보는 어디로 향하겠는가?”

영무예는 화를 내지도 않았다. 실제로 수하인 사현에게 너무 많이 졌던 만큼 제 수하의 성깔도, 성정도 잘 아는 그였다.

“요새가 험준하니 백의 수중의 병력으로 강공을 펼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라면 수로를 끊거나 불을 놓아 성을 태우거나 독을 푸는 세 가지 방법을 쓸 겁니다. 그리고 왕야를 유인해 성 밖으로 나와 싸우게 하겠지요. 초위국의 중갑 창병(槍兵)과 식연의 나무 방패 기관으로 겹겹이 포위하면 왕야를 죽일 수도 있을 테고 그럼 아군의 군심이 흐트러질 테니 틀림없이 패배하겠지요.”

이런 대화에 익숙한 듯 사현은 바둑판을 응시하며 당당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신하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조심스러움은 없었다. 영무예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둑알을 하나 집고 바둑판을 탁탁 쳤다.

“식연의 나무 방패 기관이 정말 우리 아군을 봉쇄할 수 있겠는가?”

“동륙에는 군진술에서 백의를 따를 자가 없지요. 식연이 그런 백의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것은 잡학다식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설계하는 기관은 절대로 정면돌파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당군이 나무 방패벽을 전부 펼친다고 해도 길면 얼마나 길겠습니까? 돌아가면 됩니다. 식연은 뇌기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럼 세 가지 흉계에 대해 말해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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