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35화 (135/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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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군왕(軍王) (3)

8월 스무날.

며칠 내리 흐리던 하늘이 돌연 맑게 개었다. 수 갈래의 햇살이 구름층을 뚫고 나왔다. 가을날의 푸르고 드넓은 벌판 위로 변화무쌍한 구름 그림자가 비쳤다.

하당군 중군의 보병과 선봉대 기병은 마침내 란정 역참에 모여 병영을 세웠다.

이튿날 식연은 식원에게 1천5백 기병을 이끌고 병영을 나가 진을 칠 것을 명했다. 현재 상양관의 10여 리 성벽 앞에는 이미 6국의 대군이 모여 각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성문 하나를 봉쇄하고는 목소리가 우렁찬 군사를 보내 욕을 퍼부었다. 6국의 방언이 성문 아래 여기저기에서 연달아 터져 나왔다. 방언의 물결이 한차례 지나고 나면 또 한차례 일어나는 것이 연극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성벽 위는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다. 다만 성가퀴 뒤에서 이따금 매서운 시선을 던져 심장이 선득해지곤 했다.

정오가 지나고 햇빛은 점점 더 강해졌다. 군사들은 지칠 대로 지치고 얼굴에는 진땀이 줄줄 흘렀지만 상양관에서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군을 이끄는 장령들은 기병을 말에서 내려오게 하고 보병들은 갑옷을 벗고 바람을 쐬게 해줄 수밖에 없었다. 병영에서 고기를 감싼 전병과 죽을 가져왔다. 굶주린 군사들은 다급하게 죽통을 에워싸고 음식을 먹었다. 욕을 퍼붓던 군사도 견디지 못하고 본진으로 돌아왔다.

“리군이 싸우러 나올까?”

진 후방에서 지켜보고 있던 여귀진이 앞으로 말을 몰고 나와 식원에게 물었다.

“세자. 조심하세요. 진 후방에 멀찍이 떨어져서 보는 편이 좋아요.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위험할 수도 있어요.”

식원은 조금 긴장이 되었다. 당양곡 입구에서 여귀진이 혼자 적을 유인한 뒤로 그는 여귀진을 희야와 함께 전신을 꽁꽁 묶어서 치중 부대 안에 두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청양 세자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으면 돌아가 뭐라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식연은 여귀진이 전장에 나서야 한다고 고집했다. 하여 식원도 어쩔 수 없이 10여 명의 경기병을 그의 곁에 붙여 두고 진 후방에 두었다. 그가 또 무모하게 출격할까 봐 근심하면서.

“괜찮아.”

여귀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목숨은 별로 값어치가 없거든.”

식원은 담담하게 말하는 여귀진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세자 목숨이 별로 값지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근데 남회성의 늙은이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그러니까 진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어요. 전쟁이 시작되면 세자를 챙길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고요.”

여귀진이 웃으며 대꾸했다.

“리군이 성을 나오지 않으면 우린 어떻게 해?”

식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욕 좀 퍼붓는 것 말고는 달리 좋은 수도 없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배불리 먹은 하당군 군사 둘이 또다시 말을 몰아 나갔다. 그들은 성 아래에서 200보 떨어진 거리에 도착하자 큰 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하당의 완주 방언은 본디 욕하는 데 쓰여서 음율의 아름다움 따위는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 말만 번지르르한 군사들은 영씨 가문의 700년 전 조상부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영무예의 손자뻘까지 욕을 해댔다.

“영무예. 이 후레자식. 성을 나와 우리의 칼과 창을 맛보려니 겁나냐? 성안에 웅크리고서 달걀 껍데기 하나 뒤집어썼다고 거북이 행세할 수 있을 줄 알아? 우리가 격노해서 성안으로 쳐들어가 창칼을 마구 휘두르지 않게 조심해. 뱃가죽은 하늘로 껍데기는 땅으로 가게 뒤집어 놓고 평생 도로 뒤집지 못하게 만들어줄 테…….”

여귀진은 욕을 듣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런데 그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정신이 번득 들었다. 여귀진의 시각과 청각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예민했다. 순간적으로 그는 검은 인영 몇이 성벽 꼭대기에서 화살을 쏘려는 모습을 포착했다.

“물러나라!”

여귀진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욕하던 군사들 중 하나는 우전에 두 어깨가 꿰뚫렸고 화살의 힘에 밀려 말에서 추락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의 군사는 머리를 관통당했다. 화살은 군사가 머리를 쳐들고 물을 마실 때 조롱박을 뚫고 그의 입을 파고 들어가 입 밖에는 꼬리 부분만 남았다.

처음 조롱박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던 맑은 물은 이내 검붉은 핏물로 변했다.

돌연 호각 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하당군이 봉쇄하고 있던 성문이 쿵 굉음과 함께 열리더니 100명이 넘지 않는 적홍색 기병 한 부대가 붉은 번개처럼 질주해 나왔다. 식원은 크게 놀라 검을 들고 말에 올랐다. 그러나 짧은 순간 갑옷을 다시 걸치고 말에 오를 수 있는 군사는 몇 되지 않았다. 겨우 십여 명이 식원의 곁으로 모였다. 나머지 군사들은 허둥대며 뜨거운 죽통을 뒤엎고 국자를 온 바닥에 내던졌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식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적을 유인하는 자들이다. 적의 매복을 조심해라!”

식원은 혼란 속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적군은 100인 부대로 하당의 1천500명 경기병에 맞설 힘이 없었다. 이들은 일부 하당군을 성벽 아래로 유인해 위쪽 궁수의 지원을 받아 일거에 몰살하려 했다. 작은 한 차례 일전으로 오전 내내 욕을 먹으면서도 성문을 닫고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수모를 갚을 셈이었다.

그러나 식원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자줏빛 준마 한 마리가 질주해 달려 나갔다. 여귀진의 말, 려룡구(驪龍駒)였다.

“세자!”

식원은 놀라 아연실색했다.

그러나 여귀진은 식원에게 대꾸할 새가 없었다. 그는 아까 어깨에 화살을 맞은 군사가 아직 죽지 않고 본진으로 기어서라도 돌아오려 발악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군사의 등 뒤에는 군도를 높이 들어 올린 뇌기군이 있었다. 여귀진은 그것이 리군이 의도적으로 남겨둔 미끼라는 것을 알았기에 식원의 냉정함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절대로 한 사람을 위해 무모하게 나설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귀진은 그 군사가 뇌기군에게 목이 베이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려룡구의 속도를 믿고 한번 모험해 보기로 결심했다.

“세자!”

식원이 고함을 쳤다. 그러나 그도 여귀진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여귀진의 성격을 잘 아는 식원이었다.

“여귀진 너! 제기랄! 죽으려고 환장했지!”

식원이 또다시 버럭 성을 냈다. 사람들 앞에서 세자 신분의 여귀진을 존중해줄 여유도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식원이 휙 검을 뽑았다.

“강련성은 후방을 맡고 근위병 부대는 나를 따라와!”

말을 몰아 나가려는데 주위에 모인 십 수 명의 근위병 군사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누구 하나 칼을 뽑아 드는 이가 없었다. 하당군이 정신이 해이하고 겁이 많다는 소문은 동륙에 두루 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식원은 그들이 공격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나약해 빠져서 항명할 줄은 몰랐다.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그는 매섭게 군사 하나의 말을 채찍으로 후려치고는 몸을 돌려 홀로 나아갔다.

그런데 그때, 비스듬하게 끼어드는 백마 한 마리가 돌연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백마의 속도는 매우 빨랐다. 여귀진의 려롱구보다 못하지 않았다. 말 등의 무사는 체구가 건장했는데 갑옷도 없이 자색 전포만 걸치고 있었다. 그의 뒤로 멀리서 수십 마리의 백마가 동쪽의 진북군 진영에서부터 쫓아오고 있었다.

“물러나라! 내가 가겠다!”

자색 전포를 입은 무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무사와 10여 장 남짓한 거리에 있던 여귀진은 그의 외침에 깜짝 놀라 말고삐를 확 잡아당기며 려롱구의 말머리를 돌렸다. 쩌렁쩌렁한 상대방의 목소리에는 장군의 위엄이 묻어났다. 백마는 순식간에 여귀진을 제치고 화살을 맞은 군사 옆에 도착했다. 자색 전포를 입은 무사는 군마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날쌔게 그 군사를 들어 자기 말 등에 던져놓고 세게 말채찍을 휘둘렀다. 백마는 길게 울부짖으며 본진으로 돌아갔다. 그 무사는 홀로 제자리에 남아 질풍처럼 달려드는 뇌기를 마주했다. 새카만 칼집에 든 좁고 긴 허리칼 한 자루만을 들고서.

“장군!”

여귀진이 소리쳤다.

허리칼의 금화(金花) 장식을 본 여귀진은 자색 전포를 입은 무사가 절대 일개 소졸이 아님을 깨달았다. 오히려 계급이 놀랄 정도로 높은 장성(將星)이었다.

자색 옷의 무사는 사납게 으르렁대며 달려드는 뇌기군 100명을 마주하고서도 전혀 후퇴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장도를 칼집 채로 땅속에 힘껏 꽂아 넣고는 두 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자욱하게 밀려오는 먼지를 마주했다. 뒷모습이 마치 우뚝 솟은 산처럼 미동도 없었다. 강렬한 기세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다가오던 뇌기군도 예사롭게 넘길 수 없었다. 그의 앞으로 돌진해온 선두의 기병들이 돌연 좌우 양 갈래로 나뉘었다. 뇌기군은 허리를 숙이고 군도를 좌우에서 교차해 공격했다.

자색 옷의 무사가 발아래에서 칼집을 휙 움직이자 어느새 장도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 그는 조용히 움직였는데 그 속도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랐다. 너무 빠르게 돌진한 까닭에 인영이 흐릿해졌다. 좌우로 흩날리는 눈부신 칼빛은 흡사 나비의 양 날개 같았다. 두 줄기 선홍색 빛이 흩날리고 최전방의 뇌기군 두 명은 이미 말에서 고꾸라졌다!

자색 옷의 무사는 이내 몸을 회전했다. 자유로이 휘둘러진 칼의 기세는 맹렬하고도 무시무시했다. 그는 자신의 칼빛 속에서 귀매처럼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그는 도보전으로 기마병을 상대했으나 번뜩이며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뇌기군의 빠른 말과 칼을 완전히 제압했다. 칼빛 속에서 연달아 기병 몇이 낙마했는데 전부 가슴에 칼을 맞았다. 비할 데 없이 빠른 속도였다.

사람들은 그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 무사와 뇌기군이 스쳐 지나가자 뇌기군 가슴팍의 가죽 갑옷이 돌연 찢기며 새빨간 피가 펑펑 흘러내리는 것만 보였다.

그러자 뇌기군도 더는 출격하지 못했다. 그들은 말을 몰아 그의 칼끝을 피해갔다. 십수 명의 기병이 한데 모여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돌격할 준비를 했다. 그 찰나의 틈에 자색 무사는 몸을 돌려 본진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빠르게 후퇴한다고 해도 뇌기군의 군마에 비할 수는 없었다. 뒤편에서는 기병 십 수 명이 일렬로 모여 군도를 높이 들고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뒤쪽의 말발굽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미친 듯이 내달리던 자색 옷의 무사가 돌연 칼을 높이 들어 올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현!”

그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영!”

그는 몸을 돌리며 마지막 한마디를 뱉었다.

“파!”

그곳에서 잠시 멈추어 서 있던 수십 마리 백마가 각궁을 뽑아 들고 현, 영, 파의 구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활을 들고, 활시위를 당기고,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메뚜기처럼 뇌기군을 잇달아 쏘아 말에서 떨어뜨렸다. 자색 무사를 실수로 다치게 하는 화살도 없었고 적을 빗나가는 화살도 전혀 없었다. 질주하던 건장한 말은 몸에 우전이 빽빽이 꽂힌 채로 고꾸라져 나뒹굴었고 말에 타고 있던 기병도 압사되었다. 자색 옷의 무사를 마주한 마지막 뇌기군 하나가 포효하며 칼을 들고 휘둘렀다. 자신의 빈틈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멸을 각오한 기세였다.

갑자기 자색 옷을 입은 무사가 훌쩍 뛰어오르더니 공중에서 몸을 회전했다. 한 줄기 칼빛이 평평하게 펼쳐지고 1장 높이로 피가 흩뿌려졌다. 뇌기군의 군마가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러나 말 등에 타고 있던 무사의 머리가 툭 떨어지더니 피가 샘물처럼 수 척 높이 솟구쳤다!

그제야 착지한 자색 옷의 무사는 싸늘한 눈초리로 흘긋 돌아보았다.

자색 전포가 가볍게 펄럭였다. 기러기처럼 민첩한 사람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6국 연합군 속에서 조수와도 같은 갈채가 터져 나왔다. 갑자기 금고(金鼓)1)가 일제히 울렸다. 귀청이 떨어질 듯 큰 울림이었다. 자색 옷의 무사는 어느새 본진에 근접했다. 나머지 뇌기군은 승산이 없음을 알고 시신을 버려둔 채 말머리를 돌려 상양관으로 후퇴했다. 자색 옷의 무사는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품에서 수건 한 조각을 꺼내 장도에 묻은 핏자국을 닦으며 한쪽에 말을 세우고 서 있던 여귀진에게로 느릿느릿 다가갔다.

“하당에 만족 무사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소.”

자색 옷의 무사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북의 고월의라 하오.”

“청양의 여귀진입니다.”

여귀진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말을 덧붙였다.

“감사합니다, 고 장군.”

고월의라는 이름의 무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웠소.”

그는 더 말을 보태지 않고 뒤돌아 수십 마리의 백마가 있는 곳으로 갔다. 기병 하나가 말에서 내리더니 고월의에게 제 말을 내주었다. 몸을 돌려 말에 올라탄 고월의가 칼을 들어 올리고 크게 한마디 외치자 전 부대가 진북국 진영으로 물러갔다. 식원이 말을 몰아 쫓아왔을 때 자색 옷의 무사는 이미 진북 출운기군의 부대 안으로 섞여 들어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입니까?”

식원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귀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북국 사람이래. 이름이 고월의라는 것밖에 몰라.”

“고월의!”

식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고월의는 이번 대전의 진북군 통수입니다!”

* * *

1) 군중(軍中)에서 호령하는 데 사용하던 징과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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