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33화 (133/360)

133

3장. 군왕(軍王) (1)

성제 3년, 8월 열여드레.

자색 꼬리의 비둘기가 푸드덕푸드덕 양 날개를 홰치며 맑은 하늘을 스쳐 지나갔다.

비둘기를 부르는 호각 소리가 맑고 또랑또랑하게 울리자 비둘기가 돌연 공중에서 방향을 돌려 하강했다. 비둘기는 날개를 접고 호각을 분 사람의 손가락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비둘기의 붉은 발에는 손가락 굵기의 작은 댓가지가 묶여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무미건조한 금소리에는 시린 정취가 묻어났다. 높은 곳에서 매우 가느다란 얼음 샘물 한 줄기가 떨어지는 듯했다.

금황색 국화밭에 하얀 옷을 입은 소년이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가는 대나무로 엮은 수정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앞의 작은 탁자에는 연한 술 한 단지와 투명하게 반짝이는 얇은 도자기 잔이 놓여 있었다. 그는 백옥 같은 손가락으로 탁자 표면을 가볍게 치면서 멀리서 들려오는 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8월 열여드레는 황성 전통의 ‘상화국상(霜華菊賞)’ 날이었다.

천계의 고관들에게는 춘절을 제외하고 4월의 ‘답청절(踏青節)’과 8월의 ‘상화국상’이 1년에 한 번 있는 성대한 행사라 할 수 있었다. 천계의 귀족들은 자녀들의 외출을 엄격하게 단속했기에 이성이 그리운 귀족 집안 여식이든 다정다감한 공자든 눈짓으로 마음을 주고받고 몰래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이 두 명절뿐이었다. 황제 또한 이를 금지하기는커녕 그 일이 성사되도록 장려했다. 다년간 태청궁의 오랜 풍속에 따라 황제도 이 이틀 동안 출궁해 사대부들과 함께 즐겼으며 대신들도 처자식과 교외에 모여 술을 마시고 꽃을 감상했다.

그러나 리군이 황성을 점거한 6년은 빛 한 점 없이 어둡던 6년이라 할 수 있었다. 영무예는 포악한 주인으로 생사의 대권을 독점했다. 툭하면 군령을 내려 대신들을 구금했고, 한 번 더 군령을 받게 되면 법에 따라 극형에 처했다. 대신들과 귀족, 부호와 명문가에서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이 두려움에 떨었으며 전혀 나가 놀 기분이 들지 않았다. 황성 하늘은 항시 구름이 낀 듯 우중충했다.

한데 이번에 영무예가 돌연 군을 철수했다. 이어 제후 연합군이 맹렬한 기세로 밀려와 상양관에서 영무예와 대치한다는 전보(戰報)가 전해졌다. 모두들 구름이 걷힌 맑은 하늘을 다시 보게 된 기분이었다. 부호들은 거리 양쪽 가득 오색 비단을 주렁주렁 걸고 거지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며 모든 신께 난세의 흉성(凶星)인 영무예를 단번에 제거할 수 있도록 굽어살펴 달라고 빌었다. 즉위한 지 3년 된 성제도 궁중에 숨어 지내던 습관을 버리고 조정에 나간 첫날 3년간 끊겼던 ‘상화국상’ 풍속을 원래대로 진행하노라 선포했다. 그리고 백성과 함께 즐기겠다는 의미로 대신과 귀족들에게 황실의 국화 정원을 개방했다.

비단 담요와 색색의 비단을 가지고 들어간 귀족들은 국화 정원 안에서 비단을 하나로 엮어 ‘비단 병풍’을 만들고 친한 몇몇 집안끼리 한자리에 모여 앉아 술을 데워 마시고 꽃을 구경했다. 청여지(清餘池) 가의 좁고 긴 황실 국화 정원은 푸른 물색, 살구색, 단풍색, 자색, 담청색 등 색색의 비단 병풍 수백 개에 둘러싸여 시야가 어지러웠다. 아른아른 흩날리는 술 향기를 맡으면 얼근하게 취하고 싶어졌다.

성제는 관악기에 능통했다. 세상을 놀라게 했던 희제의 재능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그래도 풍치가 있고 우아했다. 그는 명을 내려 아무나 연주하지 못하게 하고 국수 풍림만에게만 저 멀리 높은 곳에 앉아 금을 연주하게 했다. 풍림만의 금소리는 물처럼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저 천한 것이 뒤를 봐주는 영무예가 없는데도 감히 나와서 금을 연주하네?”

작은 탁자 맞은편에 앉은 여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풍림만은 금 타는 솜씨가 출중하지요. 영무예가 일부러 치켜세운 것이 아닙니다. 듣자 하니 폐하께서도 매우 좋아하신다더군요.”

금 연주를 듣던 소년이 깜짝 놀라며 황급히 일어나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래? 녕경 너에 비하면 어떻지?”

“세속의 곡조는 소신도 조금은 자신 있습니다. 그러나 풍림만이 연주하는 옛 곡조는 담담하고 심오하며 때 묻지 않은 것이 옛사람들의 대범한 경지를 담고 있으니 소신은 10년이 걸려도 감히 그녀의 실력을 따라잡지 못할 것입니다.”

“네가 누군가를 칭찬할 때도 있구나.”

여인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나보다는 어떠하냐?”

소년은 살짝 두려운 기색을 띠더니, 한참 뒤에야 몸을 굽혀 절을 하며 대답했다.

“금 연주는 장공주의 강점이 아니지요.”

여인은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저이보다 못한 모양이로구나.”

소년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대답하지 못했다.

짝. 쟁쟁한 소리가 들렸다. 여인의 손바닥이 소년의 얼굴을 후려쳤다. 뽀얗고 수려한 뺨에는 손바닥 자국이 생기고 이내 피가 뚝뚝 흐를 듯 붉어졌다. 이어 여인이 손으로 둘 사이의 작은 탁자를 뒤엎었다. 탁자 위의 진귀한 도자기 주기(酒器)가 땅에 떨어져 풀 속으로 굴러갔다.

“점점 간이 커지는구나!”

“장공주. 용서해 주십시오.”

소년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장공주의 치마 아래 머리를 조아렸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안다니, 네 안중에 내가 아직 있긴 한 모양이구나.”

여인이 조소했다.

“좋아! 훌륭해!”

비단 병풍에 인영 하나가 나타났지만 감히 들어오지 못한 채 밖에서 무릎을 꿇었다.

“장공주. 상양관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뭐라더냐?”

여인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제 영무예가 뇌기군을 거느리고 포위를 뚫는 데 성공했으나 삽매곡 입구의 청평원에서 하당국 대군에 급습을 당했다 합니다. 그러나 양군의 교전은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영무예는 다시 상양관 안으로 철수했다 합니다. 제후 연합군은 상양관 아래에 이미 7만 군사가 모였으며 초위국 대장군, 무양호 백의가 연합군을 이끄는 통수를 맡았다고 합니다. 북쪽 당양곡 어귀에는 순국의 화엽이 조칙이 내려오기도 전에 그가 이끄는 2만 5천 풍호 기병을 주둔시키고 리국이 남긴 군대와 대치하고 있답니다. 그런 상황이라 당분간은 화엽도 왕역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멍청한 것들! 7만 대군이 영무예 하나를 못 죽이다니!”

여인이 노발대발했다.

“심지어 자유롭게 드나들게까지 해? 하당국 군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자는 이미 북망산을 넘어 창란도를 경유해 고국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르겠군!”

소식을 전한 비단옷의 내관과 병풍 안의 흰옷을 입은 소년 모두 전전긍긍하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은 두려움에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여인이 일어나 몇 걸음 빠르게 걸었다. 얼굴의 노기가 서서히 가시고 그녀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네가 보기에 이 전쟁은 승패가 어찌 날 것 같으냐?”

“장공주. 통촉하시옵소서. 초위국 백의는 동륙 제일의 명장입니다. 황실에 충성하는 이 중에 영무예의 머리를 벨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바로 백의일 것입니다.”

“흥!”

여인이 코웃음을 쳤다.

“구중궁궐에서만 자라 전쟁이 무엇인지 보지도 못한 네가 감히 최고 명장이네, 백의밖에 없네 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게야?”

“장공주께서 전략을 짜고 지휘하시니 영무예도 이번에는 벗어나기 힘들 것입니다.”

“어째 갑자기 말재간이 늘었구나?”

여인이 차갑게 소년을 쏘아보았다.

“7국 연합군과 영무예가 함께 망한다면 내 기분이 더 좋겠어.”

금소리가 그치고 여음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꽃 사이로 산들바람이 살며시 불어오는 듯했다. 금소리와 함께 낮은 기침 소리가 전해졌다. 풍림만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여인은 눈꺼풀을 드리우고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금 연주는 확실히 내가 풍림만만 못하지.”

여인은 눈을 내리깔고 발치에 엎드린 소년을 보면서 백옥 같은 뺨을 어루만졌다.

“많이 아팠느냐?”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귀밑머리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똑 떨어졌다.

“말 잘 들어야 한다. 고분고분 내 말을 잘 들으면 훗날 황제의 자리가 네 것이 된다.”

여인은 웃으며 허리춤에서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 소년의 땀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명심해라. 내가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는걸.”

온정이 넘쳐흐르는 순간이었으나 그 안에서 마귀가 나직이 웃는 것 같았다. 그 많은 연지분으로도 장공주 얼굴의 세밀한 주름까지는 가릴 수가 없었다. 웃을 때면 얼굴에 기이한 주름이 졌는데, 흡사 시들어 떨어진 늙은 국화 같았다.

240리 밖, 상양관.

우뚝 솟은 두 산 사이로 하늘에 닿을 듯 웅장하고 광대한 성이 자리했다. 한 사람이 성 밖의 낡고 망가진 높은 누각에 묵묵히 서 있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바람을 맞으며 먼 곳을 내다보았다. 빨아서 색이 바랜 흰색 전포가 가을바람에 휘말려 올라갔다. 멀리서 보면 바람을 맞으며 깃털을 고르는 하얀 매 같았다.

칼을 허리에 찬 군교가 말을 몰아 누각 아래로 질주해오더니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대장군. 하당국의 2만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선봉의 3천 경기병은 벌써 5리 밖의 난정 역참에 주둔했습니다.”

“도착했다고?”

하얀 옷을 입은 장군이 수려한 눈썹을 치켜세웠다.

“식연도 왔느냐?”

“건수강은 푸르고 벗의 마음은 깨끗하여라.”

멀리서 목청 높여 읊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잡초가 무성하며 황량하기 그지없는 옛길의 끄트머리에 검은 갑옷에 검을 찬 장군이 새카만 군마를 타고 돌연 나타났다. 준마가 천천히 다가왔다. 장군은 손가락 사이에 담뱃대를 끼운 채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시를 읊었다. 솔솔 부는 가을바람에 유유히 홀로 걷는 모습은 나귀를 타고 노래를 부르는 이야기꾼 같았다.

식연은 낡은 종루 아래 말을 세우고 한 계단, 한 계단 맨 위층으로 곧장 올라왔다. 하얀 옷을 입은 장군은 난간에 기대 먼 곳을 바라볼 뿐 돌아보지 않았다.

“7년 만이군. 잘 지냈나?”

식연이 다가가 그와 나란히 섰다.

“늙었군.”

하얀 옷을 입은 장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머리도 하얗게 세었어.”

식연은 오랜 지기의 귀밑머리를 보았다. 과거 새카맣던 머리카락은 근 절반이 세었다.

얼굴에는 젊은 시절의 준수함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눈꼬리의 주름은 칼로 새긴 듯 또렷했다. 식연은 말없이 낡은 나무 난간에 담뱃대를 툭툭 쳐 재를 털고는 묵묵히 먼 곳의 높은 성을 바라보았다. 맞은편 성벽 꼭대기의 전루(箭樓) 위로 한 덩이 화염 같은 뇌열지화의 붉은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자네 제자 하나가 영무예와 겨루고 무사히 빠져나왔다던데.”

하얀 옷을 입은 장군이 나직하게 말했다.

“전군에 비범하다는 소문이 파다하네.”

“늑골이 세 대가 부러지고 팔 하나가 골절되었네. 견갑골 한 대도 베였지. 살아난 것만으로도 벌써 기적인데 어찌 무사히 빠져나왔다 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말함세. 그동안 제후국 군대가 연이어 도착했고 총 5만 대군이 모였지. 이곳을 수일 째 지키고 있으면서 리국 군대와 6차례 접전을 벌였지만 아직 이겨보지 못했네. 영무예의 포악한 이름을 들은 사람은 이내 간이 콩알만 해졌지. 영무예의 칼 아래 목숨을 보전하다니, 역시 자네의 제자다워. 그 이야기를 듣고 병사들도 사기가 조금은 진작되었어.”

“내 직접 출전해 리국공과 목숨을 걸고 싸웠네. 그거야말로 무사히 돌아왔다 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 그 얘기는 돌지 않는가?”

하얀 옷을 입은 장군이 냉담하게 고개를 돌려 식연의 무심히 웃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잠시 묵묵히 있던 그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늙은 여우인 자네가 영무예의 손에 죽는다면 그 묘비는 내 돈으로 세우고 손수 ‘쌤통’이란 두 글자도 새겨주지.”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두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지며 텅 빈 들판으로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누각 아래를 지키고 있던 초위국 병사는 더없이 놀랐다. 대장군 백의를 따른 몇 년 동안 그가 이렇게 활짝 웃는 것은 거의 들어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영무예가 어떻게 포위를 뚫은 겐가?”

식연이 웃음을 그치고 물었다.

백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양관은 긴 성이네. 남쪽으로 여섯 곳의 성문이 나 있어. 이곳이 막히면 저기가 뚫리지. 7만 대군이 아니라 그 두 배로도 영무예의 뇌기는 막을 수가 없네. 영무예가 적려의 보병들을 함께 데려갈 생각이 아니라면 뇌기의 기동력만으로는 서슴없이 휘젓고 다닐 수 있지. 그제 경장을 하고 짐을 줄인 그는 5천 뇌기병을 데리고 포위를 뚫었네. 순국의 5천 풍호철기가 행동하기도 전에 영무예는 이미 적진을 밟고 빠져나갔어. 도중에 자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번 전쟁에서 우리는 벌써 패했을 걸세.”

“하당 2만 군의 실력으로는 그를 막을 수 없네. 목성루를 가지고 와서 다행이었지. 하지만 5천 뇌기군에 3만 적려 보병까지 더해진 상황에 저 십리장성을 상대로 하여 영무예를 막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말게.”

백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자네 말대로라면 우리는 반드시 패하겠군?”

“상양관은 300리 평원을 마주한 험준한 요새일세. 한쪽은 지세가 험준하여 난공불락이고 한쪽은 수비할 곳 없이 트였어. 병법에서는 이곳 300리 평원을 고립된 땅이라 하지. 7만 명이 있든 30만 명이 있든 다 헛수고일세.”

식연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자네가 지휘한다면 나는 절반의 확률로 영무예가 이곳에 묻힌다는 데 걸겠네.”

백의가 잠시 조용히 식연을 바라보았다.

“정말 영무예가 죽기를 바라나?”

“둘을 비교하자면 그래도 난 자네가 좀 더 오래 살기를 바라네.”

두 사람은 말없이 난간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멀리 있는 상양관을 바라보았다. 시선은 상양관 위의 붉은 깃발을 가로질러 하늘 끄트머리의 뜬구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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