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32화 (132/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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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첫 출정 (10)

착지한 영무예는 칼을 가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야…….”

여귀진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 영무예의 포악한 칼 기술을 보았지만 그의 관찰력으로도 희야가 어떻게 칼의 공세를 막았는지, 칼의 남은 힘이 어떻게 말의 몸을 베었는지 보지 못했다.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전쟁터의 무술이었다. 끌고, 베고, 떨어뜨리는 절옥경의 우아함이나 예리함은 없었다.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는 살기뿐이었고 그 살기 속에는 사자의 노호가 담겨 있었다!

희야는 눈을 뜨려 애썼다. 주위는 온통 피바다였다. 주변을 더듬어 보았지만 그림자처럼 붙어있던 창을 찾을 수가 없었다. 멀리서 여귀진이 무어라 외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앗아간 듯, 귓가가 멍할 뿐이었다.

“나 죽었나? 아냐…….”

희야가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왼팔에서 허리까지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에 졸도할 것만 같았다.

“난… 아직 죽지 않았어!”

기적처럼 의지가 되돌아왔다. 가슴속에 숨어 있던 불굴의 유령처럼. 그것은 떠나지 않고 아직 살아서 과거의 그때처럼 다시 이 소년을 떠받쳤다.

뇌기군은 놀란 얼굴로 젊은 무사를 쳐다보았다. 영무예의 칼이 가로막히긴 했으나 칼의 힘이 긴 창에 고스란히 투과되었다. 부러진 게 틀림없을 희야의 왼팔은 한쪽에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희야는 여전히 몸부림치며 일어나 휘청거리며 그 자리에 섰다. 떨어지면서 머리가 까져 얼굴이 새빨간 피로 물들었고 그로 인해 희야의 얼굴은 유난히 흉악해 보였다. 새카만 눈은 텅 빈 듯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슴이 오싹해졌다. 숨이 간들간들한 적을 앞에 두고도 뇌기군은 누구 하나 나아가 그의 목을 벨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제가 처리하지요!”

뇌기군 속에서 누군가가 말을 몰아 나왔다. 허리춤에서 쇠사슬이 부딪쳐 울리고 군도가 높이 들어 올려졌다.

“멈춰라!”

영무예가 외마디 호통을 내뱉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군도가 희야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돌연 소년이 피범벅이 된 얼굴을 쳐들었고 광기 어린 살기가 뇌기군을 덮쳐왔다. 희야는 칼날에 맞서 뇌기군의 품으로 온몸을 던졌다. 군도가 희야의 어깨를 깊숙이 가르고 들어갔다. 그런데 뇌기군은 가슴이 선득해지는 듯했다가 이어 불에 타들어 가는 듯하더니 이내 온몸의 힘을 잃었다.

희야는 온 힘을 다해 청사를 뽑아냈다. 뜨거운 피가 그의 한쪽 갑옷을 벌겋게 물들였다. 희야는 궁지에 몰린 흉악한 호랑이처럼 마지막 힘을 다해 적을 매섭게 노려보았지만 더는 역부족이었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새카만 하늘이 내내 그의 머리를 짓눌렀고 그 위로 새빨간 구름이 질주했다. 희야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나다가 무언가를 밟았는지 그대로 고꾸라졌다.

몽롱한 그의 곁에 옅은 향기가 나는 따뜻한 몸이 있었다. 희야는 눈을 비볐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눈앞의 하늘과 땅이 계속 빙빙 돌았다.

‘우연인가?’

희야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우연이겠지. 아니면 또 누가 있겠어?’

희야는 조금 따뜻해진 느낌이 들었다. 몸을 벌벌 떨며 우연을 껴안은 희야는 얼굴을 그녀의 목덜미에 대고 그녀의 매끈한 피부에 얼굴을 비비적댔다.

“우연.”

희야의 입속에서 피가 뚝, 뚝 흘러내렸다.

“우리 가자. 빨리 가자. 저들이 날… 죽이려고 해.”

우연은 희야의 품에서 필사적으로 버둥거리기만 했다.

희야는 멍해졌다. 문득 곁에 있는 이가 우연이 아닌 것 같았다. 한 여인이 다정하게 그를 품에 안고 있었다.

‘희야…. 열심히 살아내야 한다.’

어떤 손 하나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았다.

‘개처럼이라도 살아가야 해…….’

“이 막돼먹은 자식!”

포효성에 희야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의식도 약간 되돌아왔다.

그가 품에 안고 있는 이는 우연이 아니라 재기 있고 아리따운 리국 공주였다. 공주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몸을 비틀며 악귀 같은 소년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희야가 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청사가 느껴졌다.

“오지 마!”

희야는 온 힘을 다해 청사를 공주의 목에 가로놓았다.

“오지 말라고!”

“너는 이미 졌다!”

영무예가 버럭 화를 냈다.

“천구 무사가 이리 죽음이 두려워 목숨을 구걸하다니, 수치스럽지도 않으냐?”

“수치?”

희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희들 모두… 나를 죽이려 하지. 너희 전부 다! 수치라…. 죽음이 두려워 목숨을 구걸하는 게 뭔데?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야 해! 왜 나한테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한다고 하는 거야? 나는 살아서 돌아갈 거야! 나는 죽어도 신경 써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선혈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막 회복했던 의지가 또다시 흐르는 피와 함께 사라져갔다. 희야의 말은 끝내 으르렁거림으로 거친 포효로 변해버렸다.

리국 군신들은 아연해져 말을 일었다. 뇌단영 정예병 수십 명이 열일곱 먹은 하당 소년에게 패했다. 20년 만에 처음 있는 치욕이었다. 무력으로 구주를 군림하려는 영무예에게도 무명의 무사를 이긴 건 절대 영예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지금 희야가 포효하는 대상이 사실 그들이 아니라는 것을. 희야도 자기가 누구를 향해 울부짖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희야는 주위의 뇌기군을 보았다. 그들의 얼굴이 창야 같기도 하고 유은 같기도 했다. 뇌운정가 같기도 했고 전에 알았던 누군가 같기도 했다. 모두가 희야를 향해 흉악하게 웃고 있었다.

희야는 아득한 어둠 속에 섰다. 온 세상에 끝없이 차가운 비가 내리고 발아래로는 선홍색이 흘렀다.

‘희야…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 엄마는 네가 살아가는 것을 보고 싶구나…. 개처럼 살아도 좋다…….’

아득히 먼 곳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희야에게 말을 걸었고 따듯하고 부드러운 두 손이 뒤에서 희야의 머리를 빗어 주었다.

희야는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돌려보았다. 등 뒤에서 빗질을 해주던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서서히 사라졌다. 불현듯 자신의 머리를 빗어 주던 여인은 이미 죽었음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는 피로 물든 칼을 들고 홀로 어둠 속에 섰다. 이 세상은 몹시도 추웠다.

희야의 몸이 움찔하면서 청사를 들이댄 공주의 목에 핏자국이 났다.

“멈춰! 아직 협…….”

영무예가 소리쳤다. 그러나 뭐라 말을 이어가야 할지 몰랐다.

그는 열아홉에 후작으로 불렸고 쌍도로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였다. 일평생 강자를 만나면 더 강해졌고 누군가의 협박에 굴복해본 적이 없었으며 자신에게 충성하는 무사들과 생사를 함께한다 자부했다. 휘하 장수들 앞에서 차마 ‘협상’이라는 두 글자를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총애하는 딸이 적의 손아귀에 있었다.

죽음과도 같은 적막함 속에서 대치하고 있는 5천 리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주위에는 스러져가는 들풀을 흔드는 스산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나직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울음소리는 점점 또렷해지며 바람과 함께 멀어져갔다. 비통하고 애처롭게.

손에 떨어진 서늘한 눈물에 희야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힘껏 공주의 얼굴을 비틀었다. 난폭한 공주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공주는 울면서 십여 걸음 밖에 있는 제 아비를 쳐다보았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이 쉬어 어떻게 해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희야는 다시 영무예를 보았다. 난세의 패주, 영무예의 얼굴에 놀랍게도 애처로운 기색이 어렸다. 그는 희야를 향해 한 손을 뻗은 채 무어라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오래도록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만백성의 생사를 손아귀에 쥔 영무예도 지금은 그저 보통의 아버지였다. 멍하니 영무예를 한참 바라보던 희야의 입꼬리에 돌연 참담한 미소가 어렸다. 정수리로 솟구치던 살기와 혈기가 모두 사라지고 아까보다 더 깊지만 평온한 절망감이 서서히 그를 뒤덮었다. 난세의 패주가 다 무엇인가? 아무리 큰 권력과 위엄을 얻어도 여전히 제 딸이 살아가기를 바라는 아비인 것을.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희야는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는 청사를 내버리고 공주의 엉덩이를 세게 걷어차 밖으로 내보냈다.

“꺼져! 꺼져버려!”

희야가 멋쩍게 웃었다. 허탈함으로 가득한 웃음소리였다.

“좋다!”

희야가 얼굴의 피를 슥 닦아내며 천천히 앉았다.

“누가 나를 죽일 테냐?”

“희야… 희야!”

여귀진이 소리를 질렀다. 그는 허리춤의 영월을 쥐었다. 언제든 달려 나가려는 듯 여귀진의 몸은 앞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세자! 세자! 소용없어요!”

식원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잠깐의 망설임 후, 두 명의 뇌기가 번개처럼 희야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나는 몸으로 공주를 엄호했고 다른 하나는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해 군도를 내리쳤다.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군도가 머리에 닿기 직전, 희야가 홱 고개를 들고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사신을 지켜보았다. 죽더라도, 자기가 어떻게 죽는지 직접 볼 것이었다.

한 줄기 불 그림자가 쏜살같이 지나가며 챙 소리가 났다. 참마도가 희야의 머리 위로 평평하게 놓이며 떨어지는 칼을 막았다. 영무예가 말을 멈춰 세웠다.

“국공!”

뇌기군이 황급히 몸을 돌려 말에서 내려왔다.

영무예는 무표정한 얼굴로 제 여식의 몸에 묶인 가죽끈을 단칼에 잘라냈다. 딸을 말에 태운 영무예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반듯하게 앉아 있는 소년 무사를 응시했다. 희야는 고개를 버쩍 쳐들었다. 현재 동륙의 수사자와 미래 군왕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희야는 피하지 않았다.

영무예가 장도를 말안장에 걸었다. 몸을 휙 돌리자 붉은색 외투가 펄럭였고 그는 바람을 맞으며 떠나갔다. 기병들은 칼을 쥐고 경계하며 영무예의 뒤를 쫓았다. 맨 뒤에서는 궁기병이 군대를 엄호했다. 멀리서 여귀진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몰아 나가려는데 식연이 그를 제지했다. 하당 경기병이 천천히 밀고 나갔고 노수 대형이 그 뒤를 바짝 따라갔다. 텅 빈 중간 지대에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앉아 있는 희야만이 남았다.

“아버지.”

놀란 가슴이 채 가라앉지 않은 공주가 두 손으로 아비의 목을 끌어안고 흉갑에 뺨을 댔다.

영무예가 여식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쨌든 너도 여자아이로구나.”

“정말 살려두실 겁니까?”

사현이 말을 몰아 영무예의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영무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훗날을 기다림세.”

“훗날 화가 될까 걱정입니다.”

사현은 한숨을 내쉴 뿐 더는 설득하지 않았다.

영무예가 돌연 말을 멈추고 뒤돌아 큰 소리로 물었다.

“천구 소년. 이름이 뭐냐?”

“희야. 황야의 야를 쓴다!”

“황야의 야…. 좋다! 언젠가 네가 명장이 된다면.”

영무예가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와 천하를 다투어 보자꾸나!”

성제 3년, 8월 17일. 섭우열왕과 리국공 영무예는 상양관 밖 50리의 삽매곡에서 만났다.

대섭 초년, 찻집과 주점에서 가장 유행하던 이야기가 바로 이날 일을 다룬 <삽매곡패왕분도(澀梅谷霸王奮刀)>였다. 이 대목에 이르면 하나같이 득의양양하게 사방에 침을 튀기며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하며 옷소매를 휘두르는 사이로 정말 5천 뇌기군이 적진 깊숙이 돌격하고 제왕들이 도검(刀劍)을 휘두르기라도 하는 듯했다. 아이들도 즐겨 들었다. 패주와 황제는 세력이 막상막하였고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몇 년 뒤 동륙을 두고 승부를 가리기로 했고 그중 한 사람은 정말로 동륙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뜻밖의 결전은 사서에 매우 간략하게 기록되었다. <섭·하한서·위무왕본기(燮·河漢書·威武王本紀)>에 이렇게 나와 있다.

“성제 3년, 8월 17일. 왕은 상양관을 나왔고 제왕은 암람산 삽매곡을 나와 마침내 만났다. 두 사람은 진 앞에서 겨루었는데 왕은 제왕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칼을 거두고 북으로 돌아갔다. 제왕의 나이 스물둘에 처음 야진군을 일으키며 항태부에게 말하기를, ‘왕을 만나고서야 천하가 얼마나 큰지를 알았네.’하였다.”

그러나 그때, 사자의 백골은 이미 재가 되어 월주의 흐르는 물속에 깊이 가라앉았다. 제왕은 높디높은 태청궁 제위에 앉아 공허한 눈으로 구름이 가득 낀 하늘 너머 아스라한 곳을 바라보았고 그의 발아래 모든 신하가 굴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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