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30화 (130/360)

130

2장. 첫 출정 (8)

시뻘건 인영 하나가 군마를 채찍질하며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하나 남은 하당군이었다. 동료들의 선혈로 뒤덮힌 갑주를 걸치고 손에는 묵직한 창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그는 부장의 시신을 스치고 지나가며 긴 창을 가로로 쓸어 산전수전 다 겪은 무사를 말 등에서 쓸어내 버렸다. 흑마는 가차 없이 시신을 밟았다. 머리 없는 목에서 짙은 비린내를 풍기는 피가 공중으로 다시금 뿜어져 나왔다.

뇌단영 전원은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부장이 군도를 내던졌을 때 하당 무사는 창을 가로놓으며 군도의 공세를 차단했다. 그러고는 허공에서 군도를 빼앗아 도로 내던졌다. 부장은 두 눈을 뻔히 뜨고서 같은 방식으로 되돌아온 군도가 제 머리와 함께 날아가고 그의 피가 통령의 목덜미에 튈 때까지 전부 지켜보았다.

“부장을…….”

도통이 말을 꺼냈을 때 창은 어느새 그의 목구멍에서 2척 거리에 놓여 있었다.

피를 뚝뚝 흘리는 악귀와도 같은 하당 무사가 그의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도통은 그제야 알았다. 놀랍게도 그 하당 무사는 고작 열예닐곱에 지나지 않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사람을 공포에 떨게 하는,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를 한 쌍 가지고 있었다.

놀란 도통은 말을 몰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한 사내가 떠올랐다. 이 하당 무사처럼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를 가진 사내였다. 붉은 숯 같은 갈색 눈동자!

두 명의 뇌단영이 나란히 통령 앞으로 달려가 군도를 십자 모양으로 겹쳐 내리누르며 창을 막았다. 그러나 강한 압력에 두 사람의 손에서 군도가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창대가 통령의 어깨를 눌렀고 그는 검을 뽑아 들 새도 없이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엉덩이에 칼을 맞은 흑마가 길게 울부짖으며 도통의 곁을 지나갔다.

하당 무사는 한 손으로 창을 쥐고서 백마에 탄 검은 갑옷의 무사를 들어 제 말안장에 올려놓았다.

소년은 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겨 뇌단영 무리의 정중앙에 섰다. 뇌단영 몇 명이 각궁을 당기며 그의 머리를 겨누었고 네댓 자루의 군도가 이미 그의 등을 향해 휘둘러졌다.

“멈춰라!”

말에서 떨어진 도통이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미 그는 소년이 창을 거꾸로 잡고 검은 갑옷을 입은 기병의 목덜미에 창날을 겨눈 것을 보았다.

쌍방이 적막 속에 대치했다. 군마들이 불안해 울부짖었지만 뇌단영 군사 그 누구도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상대도 퇴로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사현이다.”

도통이 입을 열었다.

“리국 기장군이자 뇌기군 좌도통, 뇌단영의 통솔자이지.”

“나는 희야다.”

하당 무사가 피범벅인 창을 흔들며 말했다.

“저자들 전부 치워!”

희야의 목표는 그가 지금 말안장에 제압하고 있는 검은 갑옷의 사내였다. 희야는 아까 진 앞에서 뇌기군이 우르르 돌격할 때 똑똑히 보았다. 맨 앞에서 돌진하던 몇 명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한 명은 말 등에서 허리를 굽혀 낙마한 검은 갑옷의 무사를 들어 올리고 다른 하나는 그가 타고 있던 백마를 붙잡았다. 그러더니 날래고 용맹한 기병 몇의 호위 아래 이 소부대는 대군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으로 향했다.

뇌기는 이자가 부상을 당해 말에서 떨어졌기에 다급히 돌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사내의 신분이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범상치 않은 지위에 있음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희야가 사로잡고자 하는 사람은 이처럼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리는 못 해 주겠는데.”

사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아창에서 뚝뚝 흐르는 피가 희야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처음은 아니라지만 강렬한 충격에 저도 모르게 몸이 계속 떨렸다. 희야는 지옥에서 돌아왔다. 전우가 우전에 머리를 관통당하고 말 등에서 추락하는 것을, 그리고 뒤편의 멈추지 못한 말에 밟혀 형편없이 뭉개지는 것을 두 눈 멀쩡히 뜨고 지켜보았다. 지금 돌아보면 전우들의 시체가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을 것 같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희야 혼자였다. 희야의 머릿속은 온통 핏빛으로 가득했다. 그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창을 꽉 잡아! 창을 꼭 잡으라고!’

희야의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외쳐댔다.

‘저들이 공격해 오면 이자를 죽여!’

“네 동료들은 모두 죽었다. 너도 달아나지 못해. 목숨이 아깝다면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거다.”

사현의 말에 희야는 검은 갑옷의 무사를 확 잡아당겼다.

“이자가 죽어도 좋은가?”

사현이 차갑게 웃었다.

“여종 하나 사로잡고서 우리를 위협하려는 건가?”

“여종?”

희야의 낯빛이 바뀌었다. 그는 검은 갑옷을 입은 자의 멱살을 붙잡고 투구를 벗겨냈다. 검푸른 빛의 머리카락이 희야의 손에 흘러내렸다. 투구 아래 드러난 것은 뜻밖에도 가냘픈 얼굴이었다. 열일고여덟 남짓한 여인이었는데 보통 소녀들과는 달리 호방한 기개가 있었다. 처음 여인의 얼굴을 보았을 때 희야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그녀는 아리따운 소녀였다.

이어 손아귀에 돌연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소녀가 투구를 벗자마자 호되게 희야의 손을 깨문 것이었다. 희야의 연철 수갑 위를 옥 같은 두 줄의 이로 피가 나올 때까지 악물었다. 그러나 소녀는 그만두지 않았다. 새끼 호랑이처럼 물면 물수록 더 독해졌다. 희야가 손을 빼내며 손바닥으로 소녀의 얼굴을 세게 후려쳤고 소녀의 뺨 한쪽이 새빨개졌다.

희야는 자신이 소녀의 얼굴을 쳤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뇌단영 군사들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감히 날 때려?”

소녀가 살구 같은 눈망울을 부릅뜨며 희야를 노려보았다.

또 한 차례 쟁쟁한 소리가 울렸다. 희야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원하게 다른 쪽 뺨을 후려쳤다.

“영무예의 여자라고 내가 못 죽일 것 같아?”

“내…….”

소녀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한참을 멍청히 바라보다가 돌연 목소리를 높이며 고함쳤다.

“내 아버지시다!”

“아버지?”

희야의 눈빛이 바뀌며 싸늘한 눈초리로 사현을 바라보았다.

사현이 씁쓸한 기색을 띠었다. 희야를 위협하려 고심했건만, 거침없는 옥 공주 때문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현이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를 풀어주면 살려주겠다.”

희야는 고개를 저었다.

“날 풀어주지 않으면 이 여자를 죽여버리겠어!”

“뇌단영 통솔자로서 널 놓아주면 나는 국공 앞에서 죽음으로 사죄해야 하는데 내가 널 놓아줄 수 있겠느냐?”

“날 놓아주지 않으면 이 여자는 죽을 테니 어차피 넌 죽음으로 죗값을 치러야 해.”

사현의 입꼬리에 웃음기가 어렸으나 표정에서는 돌연 한 가닥 음산함이 내비쳤다.

“공주가 죽으면 내가 용서를 구할 방법이 정말 죽음뿐이라 생각하느냐?”

희야는 몹시 놀라며 물끄러미 조소를 짓는 사현을 쳐다보았다. 아까만 해도 부드럽고 고상하던 장군이 돌연 뱀처럼 악독해졌다. 그의 시선이 희야에게 닿았다. 놀랍게도 군도보다 더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궁대(弓袋)에서 천천히 장궁을 뽑아 든 사현은 화살집에서 우전 하나를 집어 손에 들고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는 조소하며 희야를 쳐다보았다.

“그럼 어디 한번 공주를 죽여보자!”

순간 그는 장궁에 화살을 얹고 희야 품의 공주를 겨누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수장 남짓, 날아오는 우전의 기세는 무자비했다.

“사현. 네가 감히 날…….”

공주가 호통을 치기도 전에 희야가 불쑥 손을 뻗어 맨손으로 우전을 잡았다. 화살대에 쓸려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손에 쥔 우전을 본 희야는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우전에는 화살촉이 없었다!

사현은 우전을 만지작거리면서 침착하게 화살촉을 꺾어버렸던 것이다. 화살은 그저 허장성세일 뿐이었다. 그가 활을 당기는 순간 희야 뒤의 뇌단 두 명이 벌써 말등자에서 발을 빼고 내려와 두 손으로 장도를 평평하게 들고 소리 죽여 다가왔다. 희야가 고개를 휙 돌렸다. 인영 하나가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장도를 세로로 내리쳤고, 다른 하나는 몸을 낮추어 말의 발을 베려 했다.

생사의 기로에 선 순간, 희야는 칼을 막지 않고 냅다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군마가 공중으로 훌쩍 뛰어오르며 삽시간에 발아래 칼날을 피했다. 공중에 떠 있던 뇌단의 귀에 돌연 웅장한 범의 울부짖음이 들리고 오금색 빛이 정면으로 다가왔다. 희야가 창을 내지르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호아창의 창날이 뇌단의 군도를 쳤고, 두 동강이 난 군도는 하늘로 곧게 날아갔다. 상반신을 공격하려던 적군은 추락하며 동료의 몸에 세게 부딪쳤다. 희야는 창을 들어 독룡처럼 그대로 적군을 꿰뚫었다. 선혈이 창대를 타고 뿜어져 나왔다. 호아창은 단번에 뇌단 두 명의 가슴을 관통했다.

희야는 창대를 쥔 손을 틀어 손등이 아래로 향하게 잡고 호아창을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사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꼼수 그만 부려. 다음엔 이 여자가 죽는다!”

소년 무사의 잔혹한 수법에 뇌단영 군사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지금 그들은 소년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목숨을 내건 자의 각오였다.

“잠깐! 공주를 납치해 부대로 돌아가면 상금밖에 더 받겠는가. 내 주머니에 보석이 있는데 금수 5천 냥의 값어치가 있다. 공주를 풀어주고 이것을 챙겨 달아나라. 절대 사람을 보내 쫓지 않겠다.”

사현은 허리춤의 작은 가죽 주머니를 던졌다. 주머니 입구의 가죽 띠가 풀어지고 화려한 보석들이 흘러나왔다. 엄지손가락 크기만 한 고운 진주가 풀밭을 굴렀다. 금잠(金簪)과 옥벽(玉璧)의 광채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사 장군, 뒤를 돌아봐.”

희야는 시선을 내리깔지 않고 사현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사현이 고개를 돌렸다. 아까 뇌단영 군사들의 칼에 목이 베인 하당군 병마가 눈에 들어왔다. 수십 필의 군마와 수십 명의 사람 시체가 바닥에 가로놓여 있고 풀밭은 선혈에 시뻘겋게 물들었다. 우전에 뒷다리를 맞은 암컷 말 한 마리가 부러진 다리를 끌고서 발버둥 치며 나아가 어느 군마의 시체를 핥으며 구슬프게 울부짖었다.

“다들 내 부하였다. 대부분 십수 일 정도 알고 지냈지. 공주를 납치하러 오면서 나는 그들과 공을 나누겠다고 말했지만, 저들은 모두 죽었어. 한데 난 아직 살아있지. 내가 무슨 염치로 당신 돈을 가지고 돌아가겠어. 돌격해 내려온 내게 퇴로는 없다. 죽는다고 해도 이리 해야만 하는 이유를 당신은 이해하겠지?”

희야는 말을 몰아 천천히 물러났다.

“이 여자의 목숨이 중요치 않다면 얼마든지 덤벼!”

사현은 소년의 기이하리만치 새카만 눈동자를 보며 심장이 철렁했다.

“전장에 나선 사람으로서 나도 이해는 한다.”

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였더라도 돈을 가져가지 않을 것이다. 무사 평생의 영욕이자 신의지! 한 번은 봐주겠지만, 다음에는 널 죽일 것이다!”

사현이 뇌단영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봉쇄되어 있던 원이 어쩔 수 없이 틈을 만들어냈다. 희야는 한 팔로 호아창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공주의 멱살을 세게 움켜쥐었다. 돌연 희야가 군마의 말머리를 돌리며 말의 배를 찼다. 뇌단 두 명의 군도가 순간 번득였으나 희야가 창을 평평하게 휘두르자 그들은 놀라 물러났다. 피투성이가 된 말 한 마리가 매처럼 곤경에서 벗어났다.

“쫓아라!”

사현이 큰소리로 외쳤다. 뇌단영 군사들은 군마를 내달렸고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