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29화 (129/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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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첫 출정 (7)

희야는 제 군마를 잡아끌고서 초가을의 기다란 풀 속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야생마 사이에서 길들인 이 녀석은 희야가 마구간에서 골라낸 성깔 있는 놈이었다. 꼭 죽고 죽이는 전장에 천성적으로 준비가 된 말 같았다. 말은 긴장한 채 귀를 쫑긋 세웠지만 소리는 내지 않고 커다란 눈으로 경계하며 좌우를 둘러보았다. 희야의 뒤쪽 풀더미에는 49명의 병사와 49마리의 군마가 잠복하고 있었다. 선봉 무관 수하의 모든 군마였다. 사람에 말까지 더하면 희야는 100여 명을 이끄는 백부장인 셈이었다.

“대장! 수가 많습니다!”

군사 하나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낯빛이 창백한 것이 긴장한 기색이었다.

희야는 그자의 오금을 걷어찼다.

“많긴 뭐가 많아? 병사도 말도 우리와 수가 비슷한데!”

“뇌기군이잖아요!”

군사는 또 한 번 걷어차였다.

“뇌기군이든 아니든! 무서워?”

희야가 매섭게 그 군사를 노려보았다. 군사는 주눅이 들어 희야의 시선을 피했다.

“지위가 있는 사람이 분명해. 저자를 잡으면 엄청난 공을 세우는 거야.”

희야가 창자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위험 속에서 승리를 얻는다는 말도 못 들어봤어? 이미 전장에 나왔으니 무섭네 마네 해도 늦었어. 무섭지 않아도 적은 널 죽일 거야! 무서워해도 적은 널 죽일 거고! 영광스럽게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야 그렇지만… 저들은… 뇌기군이라고요.”

군사가 입을 비죽이며 투덜거렸다.

“게다가 공적을 세운다고 해도 다 윗사람들 차지죠. 대장한테 돌아오는 몫도 얼마 안 될 텐데 우리 같은 일개 병졸 몫이 어디 있겠어요?”

“내 것이 있으면 너희들 것도 있어!”

희야가 차갑게 말했다.

“나도 대장 같은 거 아니고 일개 병졸이야.”

“대장이 그랬잖아요. 식 장군의 제자라 훗날 어떻게든 챙겨줄 사람이 있고 대류영에서도 이거라고요.”

군사가 엄지를 들어 보이더니 다시 새끼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애들은 전장에서 죽어도 아쉬워할 사람 하나 없어요. 살아서 돌아간다고 해도 꼬라비 신세를 면치 못하죠. 국주께서 양 다리와 금수 몇 냥 하사해 주시면 그것도 감지덕지라고요.”

희야가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잡았다.

“쓸모없는 놈! 무서우면 돌아가! 나 혼자 갈 테니까! 백윤이라고 못 들어봤어?”

“놔주세요. 놔줘요. 대장은 손힘이 너무 세다고요.”

군사가 발버둥 쳤다.

“백윤을 어찌 못 들어봤겠어요. 개국 황제잖아요. 길거리의 이야기꾼들이 끝도 없이 떠들어대는걸요.”

“백윤의 출신이 뭐였어? 군인이었지? 우리와 같다고! 백윤이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라고 왜 못 해?”

희야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검은 갑옷을 입은 자를 잡으면 뛰어난 공을 세우는 거야. 돌아가면 내가 장군께 우리 50명의 이름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국주께 아뢰어 달라고 할게.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상을 받으면 모두가 상을 받을 거야. 내가 굶주리면 다들 배불리 먹을 꿈도 꾸지 마. 나는 내가 한 말은 지켜. 무서우면 돌아가도 좋아. 난 널 모르는 셈 칠게!”

“대장. 왜 사서 고생인데요? 몰래 돌아가면 우리 잘못을 따질 사람도 없어요. 대장은 오늘 화살로 식 장군을 구한 것만으로도 큰 공을 세운 거라고요.”

군사가 죽상을 했다.

희야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덤불 사이로 아래쪽을 노려보았다.

“나는 전쟁터에서 죽더라도 누군가가 내 이름을 기억해 주기를 원해. 아까 네가 그랬지? 우리가 전장에서 죽어도 아쉬워 할 사람 하나 없다고. 계속 그렇게 살고 싶어?”

군사는 대답하지 못하고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그가 다시 쭈그린 채로 뛰어 돌아왔다.

“그럼 대장, 우리 합시다!”

“안 무섭냐?”

희야가 그를 흘긋 쳐다보았다.

“형제들이 철수하지 않는데 제가 어떻게 철수하겠어요? 우리는 대장 휘하의 사람들이에요. 비록 며칠 되지는 않았지만.”

군사가 멋쩍게 웃었다. 그는 손을 떨고 있었다. 속으로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희야가 그를 바라보았다.

“대장과 함께하면 제법 위신이 서는 것 같아요. 이번 공로에 나도 끼워줘요.”

군사가 말을 덧붙였다.

희야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야는 더욱 뜨거워지는 손바닥으로 창을 꽉 움켜잡았다.

풀비탈 아래.

이곳은 리군의 진 뒤편이었다. 양국이 접한 곳에서 5리 이상 떨어져 있었다. 멀리 전장의 싸움 소리는 이곳에선 어렴풋한 소란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가을바람과 긴 풀로 가득한 드넓은 초원에는 수십 마리의 말이 백마 한 필을 에워싸고 있었다. 눈부시게 하얀 준마 위에는 영무예를 따르던 검은 갑옷의 무사가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넘어져 다친 손목에는 생사로 만든 천을 감고 뇌기군 통령 하나와 나란히 서서 먼지가 자욱하게 이는 전쟁터를 바라보았다.

영무예는 군을 다스릴 때 기백을 중시했다. 일격에 반드시 죽이며 절대 적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뇌기군은 일단 돌격하면 전병력이 총출동하고 진 후방에는 수십 명만 남았다. 그러나 이들 정예병은 전신을 뒤덮는 검은 갑옷하며 붉은색 군마, 군도와 활의 양식까지 보통 리군 기병과는 달랐다.

주위는 고요했다. 그러나 뇌기들은 사냥하는 매처럼 음산한 눈빛으로 날카롭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고외. 다른 움직임이 있느냐?”

군을 이끄는 도통이 수하인 부장에게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부장은 정신을 집중하고 주위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10리 밖까지 훤히 보이는 광활한 평원이었고 멀리 교전하는 양군 외에 다른 적이 접근한 흔적은 없었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던 도통이 불쑥 고개를 돌리며 바람을 막아주던 풀비탈을 주목했다. 회백색 하늘을 배경으로 약간의 오금색이 풀비탈 안쪽에서 번득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 같았다.

“적이다!”

도통이 크게 외쳤다.

그의 부름에 대답이라도 하듯 풀비탈 뒤에서 건장한 흑마 한 마리가 용처럼 뛰어오르며 공중에서 네 발을 기세 좋게 굽혔다 폈다. 말 울음소리가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흑마의 네 발굽이 땅에 닿자마자 기병 수십 명이 흑마를 쫓아갔다. 비탈이라는 유리한 고지에서의 돌격이 순간 개시되었다! 하당군은 창을 높이 들고 우렁차게 포효했다. 땅의 형세에 돌격하는 말의 속도는 더 빨라졌고 하당군에게도 극도의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고작 수십 명이었지만 돌격하는 기세는 뇌기군이 돌격하듯 천하를 뒤집어엎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뇌기군도 전율할 정도였다.

선봉대가 돌격할 때 후방이 급습을 당하는 일은 뇌기군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뇌기군은 당황한 적이 진 앞에서 창과 방패를 높이 들고 그들의 돌격에 저항하는 데 익숙했지, 이렇게 겁도 없이 진 후방에서 싸움을 걸어오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다.

“침착해라!”

도통이 검을 뽑아 들었다.

“활을 쏴!”

하당 경기병과의 거리는 불과 수십 장 남짓이었다. 도통의 명령에 따라 뇌기군 수십 명이 일제히 각궁을 뽑아 들고 화살을 얹었다. 수십 개의 우전이 비탈 아래로 돌격해오는 하당군을 향했다. 뇌기군 병사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활시위를 당겼다. 도통이 천천히 말채찍을 들어 올렸다.

“공격! 공격! 죽여라! 죽여!”

하당군 군사가 고함을 내질렀다.

이미 누구도 물러설 수 없다. 활과 화살을 직면했을지라도, 상인처럼 예민하고 겁 많은 남회 사람들이라고 해도 지금은 똑같이 사지로 달려드는 배짱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대장이, 대류영의 거의 모든 젊은 장군들을 때려눕힌 소년과 그의 오금색 창이 맨 앞에서 돌진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처음으로 진짜 칼을 들고 전장에 나선 병졸들도 자신감 있게 돌격해 나갔다.

50장, 40장, 30장!

상대 군마의 비릿한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통령은 불쑥 말채찍을 휘둘렀다.

화살이 활시위를 떠났다. 선두의 하당군 군마 몇 마리가 동시에 우전에 가슴을 찔렸다. 말들은 비명을 지르며 높이 뛰어올랐고 기병은 말에서 나동그라졌다. 더 많은 화살이 하당군의 입과 두 눈을 통과해 뒤통수까지 관통했다. 뇌기군은 화살을 쏜 즉시 활을 거두어들이고 일제히 허리춤의 장도를 뽑아 들었다. 혼란스러운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무쇠로 만들어진 것처럼 말을 세우고 제자리에 서서 하당군 기병이 칼날 아래로 돌진하기를 기다렸다.

이 기회를 잡으려 했다니. 보잘것없는 하당군 부대는 순진해도 너무 순진했다. 이들 뇌기군 수십 명은 영무예 측근의 정예병 부대인 ‘뇌단영(雷膽營)’이었다. 뇌단영에 속한 이들은 하나같이 오래 전쟁을 경험하며 무수한 사람을 죽인 고수들이었다. 영무예가 병졸들보다 앞장서서 적진으로 거듭 돌격하면서도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뇌단영의 호위 덕분이었다. 그들을 도발하는 것은 제 발로 사지에 걸어 들어가는 것에 가까웠다.

앞장선 뇌단영 군사 하나가 하당군의 군마를 스치며 질주해 갔다. 하당군의 창은 뇌단영의 갑옷을 헛되이 스치고 지나갔다. 한데 말이 스쳐 지나는 순간 칼빛이 멈칫하더니 하당군 몇 명의 머리에서 피가 샘물처럼 허공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말안장에는 머리 없는 시체만이 남았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속에서 요행히 살아남은 하당군은 흑마를 탄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전우들의 피로 물든 장막을 곧장 뚫고 나와 수십 명의 날쌔고 용맹한 뇌단영을 향해 돌진해갔다.

뇌단영 무리에서 무자비한 냉소가 터져 나왔다. 도통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수도 없이 사람을 죽인 무사들은 원래 보통 기병보다 한층 더 오만불손했다. 하당군이 겁도 없이 저들 손에 들린 군도에 싸움을 걸어왔으니 이 지경에 이른 것도 다 자업자득이었다.

고외가 귀청이 찢어질 듯한 괴성을 지르면서 말을 타고 달려 나와 수중의 장도를 내던졌다. 뇌단영의 군도는 허리춤의 가죽띠에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어서 내던진 뒤에 다시 거두어들일 수도 있었다. 고외는 칼 던지기 기술로 마지막 남은 적의 머리를 취하려 했다. 장도가 공기를 가르며 나아갔다. 칼은 격렬하게 회전하며 상대의 목을 노렸다.

칼빛이 처연하게 허공에서 선회했다.

도통은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지 않았다. 사람 머리가 떨어지는 일은 이미 볼 만큼 본 그였다.

한데 돌연 목덜미가 뜨끈해졌다. 손을 뻗어 더듬어보니 뜻밖에도 진득한 선혈이 묻어났다. 부장 고외의 칼이 베어낸 머리의 피가 이렇게 멀리까지 튄단 말인가? 도통은 온몸을 움찔했다. 하당 군사의 선혈이 10장 너머까지 튄 게 아니라면 가능성은 단 하나!

도통은 고개를 홱 돌렸다. 부장의 머리가 목에서 갑자기 비스듬하게 기울더니 아래로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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