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28화 (128/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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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첫 출정 (6)

방산은 곧장 경졸 방진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는 아군 군사들에 둘러싸이자 그제야 살짝 안심하고 말에서 굴러 내려왔다.

“쓸모없는 놈! 어떻게 세자를 버리고 혼자 도망칠 수 있어?”

식원이 흙산에서 달려 내려와 버럭 성을 냈다. 방산과 자신의 계급 차이를 생각할 새도 없이 그는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방산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뇌기군 정예병 수천 명이 여귀진의 말을 쫓아 하당군 중군으로 접근해 오고 있음을 발견했다.

“세자… 세자 스스로 물러나지 않겠다고 한 거야.”

방산은 더듬더듬 대답했다.

식원은 방산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이를 악물고 붉은색 작은 깃발을 내던졌다. 낮은 호각 소리가 울리고 흙산 위에 있던 군사들도 필사적으로 붉은색 커다란 깃발을 흔들었다. 5천 명 하당 중군의 방진이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소장군. 세자를 구하시려고요?”

근위병 부대의 통령 하나가 긴장한 듯 물었다.

“이미 늦었어!”

식원의 시선이 멀리 여귀진에게 고정되었다.

“세자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 너희는 내 영기를 따라 움직여라. 일각도 지체해서는 안 된다. 조금의 실수라도 생기면 우리 모두 남회에 못 돌아간다!”

중군 방진이 후퇴하자 좌우 양익의 군대가 즉시 불거져 보였다. 중앙으로 거대한 공터가 생겨나며 뇌기군을 포위할 자루가 만들어졌다. 식원은 말머리를 돌려 빠르게 달려갔다. 산에 오르는 극동 표범처럼 숨을 헐떡이며 흙산 위로 돌아간 그는 제 앞을 막고 있는 군사들을 밀어 헤치고 먼 곳을 꼿꼿이 응시했다. 손가락으로 함에 담긴 검은색 작은 깃발을 톡톡 두드렸다. 손가락 사이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얼마나 남았지?”

눈으로 거리를 관측하는 군사에게 물었다.

“200…. 아니. 180장, 140장입니다…. 리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군사가 크게 소리쳤다.

식원은 온몸이 경직되었다. 혈관이 눈꺼풀 아래에서 쉴 새 없이 떨렸다. 천군만마의 큰 전투를 지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의 어깨에 하당 대군 2만 명의 생사가 걸려 있었다. 평소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어졌고 가슴은 돌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세자가 위험합니다. 리군이 더 전진하면 우리 중군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통령은 똑똑히 보았다. 장박과 여귀진 사이는 말 몇 마리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물러서! 전부 물러서!”

식원은 영기를 꼭 쥐고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소리를 머금은 향전이 하늘을 스치고 지나갔다. 장박이 고개를 버쩍 들었다. 화살에는 밝은 자색 불꽃이 타들어가고 있었는데 대낮임에도 유난히 눈에 띄었다.

“매복?”

장박은 흠칫 놀랐다.

여귀진이 말 등에서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손에 쥐고 있던 쇠날 한 움큼을 장박에게로 내던졌다.

대류영에서 배운 기술로 출정 전 만일을 대비해 장화 속에 숨겨두었던 것이다. 그가 사용한 쇠날은 반 척 길이에 세 개의 철침이 붙어 있어 가벼운 갑옷 정도는 족히 뚫었다. 더구나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쏠 필요가 없어 지근거리에서는 매우 훌륭한 무기였다.

“좋아!”

장박이 포효하며 칼을 빙빙 휘둘렀다. 쌍도가 두 덩어리의 쇳빛을 일으키며 쇠날 10개를 전부 휘감더니 다시 사방으로 세차게 쏘아냈다.

장박이 쇠날을 막아내는 그 짧은 순간 여귀진은 말을 채찍질하며 속력을 냈고 두 사람 사이는 다시 10여 장 남짓 벌어졌다. 재차 뒤쫓으려던 순간, 장박은 뭉게뭉게 일어나는 먼지가 눈에 들어왔다. 후퇴하던 하당군이 일제히 몸을 돌려 뇌기군을 향해 진격해 왔다. 하당군의 좌우 양익에 있던 군대도 후방을 포위하며 공격해 왔다. 1만 5천 명의 거대한 진형이 뇌기군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뇌기군의 선봉에 있던 궁기병과 창기병 역시 두터운 포위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장박은 군마를 멈춰 세우고 머뭇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귀진은 이미 하당의 경졸 진형 안으로 돌진해 들어간 뒤였다.

여귀진은 말머리를 돌려 세우고 장박과 멀리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내 두 사람의 시선은 하당군이 세운 거대한 방패에 가로막혔다.

“청양, 여귀진.”

장박은 소년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는 소년의 이름을 외웠다. 열대여섯 남짓 되어 보이는 소년은 제 또래보다 훨씬 침착했다. 어쩌면 장래 무시무시한 적수가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북극의 오래된 부족인 청양에서 왔지 않은가.

“창기병! 다시 길을 뚫어라!”

장박이 칼을 들었다.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동륙에는 뇌기군의 전투력에 맞설 군대가 거의 없었다. 급작스럽게 세운 방패벽 따위로 뇌기군의 쇠발굽을 막으려 하다니 하당군을 유치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박의 명령이 떨어지고 살짝 혼란스러워 보였던 뇌기군은 금세 진정되었다. 창기병은 조금씩 후퇴하며 대형을 정비해 가지런한 대열을 이루었다. 이어 커다란 고함소리와 함께 200명으로 조성된 창기병 대열이 일제히 말을 몰아 나무 방패 장벽으로 돌진했다. 수백 자루의 긴 창이 방패를 뚫고 들어갔다. 그러나 사람 키만 한 높이의 방패 장벽은 살짝 밀려나며 한 차례의 충격을 버텨냈다.

“뭐지?”

장박은 크게 놀랐다.

그는 부하들이 탄 군마를 잘 알았다. 전부 만족 준마의 혈통으로 적을 급습할 때면 야수가 사냥감을 잡듯 매우 사나웠다. 그런데 인력으로 버티는 장벽을 군마의 힘으로도 뚫을 수가 없었다.

수천 자루의 날카로운 창이 방패 장벽 틈을 뚫고 나왔다. 거대한 나무 방패를 임시로 합쳐 만든 방어벽은 매우 빠르게 정비되었다. 장박은 나무 방패 뒤의 변화를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방패 장벽 뒤에서 전해지는 파동으로 미루어 보아 하당군은 끊임없이 방패 장벽을 견고히 만들고 있었다. 이어 한 층의 나무 방패 위로 또 한 층의 방패가 덧세워지며 방패 장벽의 높이는 두 사람의 키 높이만 해졌다. 나무 방패 사이로는 하당의 노수가 분분히 화살을 쏘아 장벽을 무너뜨리려는 리군을 위협하며 저지했다.

장박은 본대(本隊)를 모을 수 없었다. 그가 이끄는 뇌기군은 이미 거대한 나무성에 파묻혀 버렸다.

그는 방패로 구축한 성벽이 얼마나 견고한지 상상할 수 없었지만 경기병만으로는 절대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후회되기 시작했다. 하당군을 얕잡아보고 소년 무사의 꾐에 넘어가는 바람에 적조처럼 돌격하는 부대의 강점을 살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 방패 장벽이 살짝 흔들리고 기괄이 움직이는 마찰음이 들렸다. 장박은 눈을 멀뚱히 뜨고 견고한 성이 수천 자루의 긴 창을 단 채로 서서히 압박해 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무성 안은 당황한 말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그때, 장박은 돌연 북소리를 들었다!

흑마 한 마리가 질풍처럼 흙산으로 질주해 왔다. 전포를 허리춤에 묶고 갑옷에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식연이 빠른 걸음으로 흙산에 올라왔다.

“숙부.”

식원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식연은 설명할 새도 없이 백기를 뽑아 던졌다. 커다란 깃발을 쥔 군사가 즉시 거대한 백기를 흔들기 시작했다. 수십 폭에 달하는 크기의 백기가 흙산 위에서 펄럭이는 모습은 10리 거리에서도 볼 수 있었다.

“숙부. 설마…….”

식원은 몹시 놀랐다.

선봉의 뇌기군을 나무성 안에 가두었으니 모조리 섬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식연은 나무성의 움직임을 멈추는 수기 신호를 내보냈다. 뇌기군에게 활로를 열어주는 셈이었다.

“북소리가 들리느냐?”

식연이 전방을 내다보며 나직하게 외쳤다.

식원은 그제야 멀리서 들려오는 묵직한 북소리를 알아차렸다. 아직 거리가 멀고 우렁차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고조되자 사람의 혼을 뒤흔드는 힘이 느껴졌다. 식원은 제 숙부의 시선을 따라 눈을 옮겼다. 멀리서 먼지가 일기 시작하더니 적홍색 기병 방진이 서서히 초원의 녹황빛을 집어삼켰다. 그와 함께 북소리도 가까워졌다. 아까까지 나무성 안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뇌기군도 지금은 돌연 차분하게 군마를 붙잡고 스스로를 보호하듯 한 바퀴 빙 둘러서더니 창을 내 겨누었다.

“북을 가져와라!”

식연이 외쳤다.

전고 하나가 식연 앞에 놓였다. 그는 북채를 들고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장단에 맞춰 북을 두드렸다.

1리 밖까지 바싹 다가온 리국 기병대가 서서히 멈추었다. 상대측 북소리도 살짝 멈춘 듯하더니 매우 무겁고 또 매우 느리게 연달아 몇 번을 두드렸다. 식연은 잠시 침묵하더니 돌연 북채를 움직여 있는 힘껏 한 차례 내리쳤다. 북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식연은 녹색 기를 던졌다. 하당군의 방패가 움찔하더니 북쪽으로 틈을 열어주었다.

장박은 그제야 방패 너머를 똑똑히 보았다. 방패 뒤에 대형 군수품 수레가 고정되어 있어 난공불락이었던 것이다. 군마와 사람의 힘으로는 이런 대형 수레와 기괄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방패 장벽을 흔들 수 없었다.

장박은 잠시 침묵하더니 몸을 돌려 멀리 흙산 위를 향해 살짝 허리를 숙였다. 검은색 깃발 아래의 식연을 본 것은 아니고 다만 명령을 내린 사람에게 감사를 표한 것이었다. 그러나 높은 흙산 위의 식연은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여 장박에게 인사했다.

장박이 군도를 세우자 선봉의 뇌기군이 진형을 갖추고 틈으로 천천히 후퇴해 나갔다. 이어 그들은 말을 내달려 동쪽으로 향했다. 장박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양손으로 칼을 들고 말을 몰아 뒷걸음질로 천천히 빠져나갔다. 양측이 20장 거리만큼 벌어지자 장박은 그제야 말머리를 돌려 제 부하들을 쫓아갔다.

동쪽의 북소리가 그치고 징소리로 바뀌었다.

식연은 잠자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군?”

어느새 흙산 위에 도착한 여귀진이 입을 열었다.

“뭘 물어보려는지 압니다. 리국 뇌기군은 2단 돌격으로 유명하지요. 항상 둘로 나뉘어 연속해 돌격합니다. 선봉의 2천 명이 포위되어도 후방의 수천 명이 쫓아오니 우리 군을 훼멸하고도 남습니다.”

식연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나 영무예가 선봉대 2천 명을 잃을 생각이 없는 만큼 피차 무사할 것입니다.”

“리군이 돌아오면…….”

“투지가 이미 다하였으니 더 핍박하지 않는다면 리군은 되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중군은 방패를 세우고 경계하라.”

식연이 말을 이었다.

“국공의 북소리에 담긴 의미는 나와 그가 한 약조에 따라 상양관으로 되돌아가겠다는 뜻일 겁니다. 우연히 만나 한바탕 작은 전쟁을 벌이고도 칼날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각자 무사히 퇴각할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결말입니다.”

식연은 잠시 말이 없다가 불쑥 물었다.

“희야는? 희야는 어디 있지?”

여귀진과 식원은 깜짝 놀라며 정신이 번득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전투가 시작된 후로 두 사람 모두 희야를 보지 못했다.

희야는 제 손바닥에 침을 조금 뱉었다. 손바닥이 숯 한 덩이를 쥐고 있는 것처럼 데일 듯이 뜨거웠다.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호아창을 다시 움켜쥐자 마음속에 자신감이 좀 더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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