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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첫 출정 (5)
그는 밀물 같은 공세를 쏟아붓던 참마도를 돌연 하늘을 향해 올려 세우더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식연의 고극이 순간 멈칫했으나 곧 슥 소리를 내며 영무예의 미간을 향해 내질러졌다.
“절운천장(絕雲千丈)!”
격전 속에서 돌연 두 사람은 일제히 손을 멈추었다. 그들은 말을 몰아 2척 떨어진 거리에서 싸늘하게 서로를 주시했다.
영무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군. 자네는 그의 제자이고 그의 무예를 배웠어. 제자를 거둔 적이 없는 줄 알았는데.”
“저는 국공의 성함을 들어보았습니다. 스승님께서 한 수 가르쳐주셨다는 것도 알지요.”
“그래서 나와 겨루려 한 것인가?”
영무예가 물었다.
“일부러 내게 자네 정체를 드러낸 것이로군.”
“하나 여쭙고 싶었을 뿐입니다.”
“말하게!”
양군의 통수가 진 앞에서 마주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듣지 못했다. 모든 소리가 목구멍 속에 낮게 깔려있던 까닭이었다. 리군과 하당군 장수들은 모든 정신을 집중해 경계 태세를 유지할 뿐이었다. 식연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10년간 국공께서는 자국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강병을 휘둘러 제후들을 제압했지요. 그리하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국공의 꿈은 천하를 토벌하고 부패한 세력을 타도하는 것입니까?”
“천하를 토벌하고 부패한 세력을 타도한다?”
영무예가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태양은 이미 졌으니까요.”
식연이 나직하게 말했다.
일순 적막이 흘렀다.
서서히 영무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맞네. 태양은 이미 졌지. 그 해를 떠받치려는 사람들은 그 짓이 완전히 헛수고임을 알걸세. 백씨의 천하는 무너지기 직전이야. 범속하고 어리석으며 사리사욕에 눈이 먼 자들은 제 성씨만 믿고 조정에 살아있지만 하나같이 산송장이나 다름없지! 백윤이 아직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일 것이야! 자네가 말한 그것이 바로 내 꿈이네. 그럼 나도 묻지. 설마 천구의 꿈도 나와 같은 겐가?”
식연이 고개를 저었다.
“천구는 수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졌고 모두의 생각이 다르지요. 저라는 천구가 바라는 것은 평안한 새 시대입니다. 국공께서 그리는 나라가 평안한 시대를 만백성에게 줄 수 있는지요?”
“내가 백성들을 평안하게 해줄 수 있다면 천구와 손을 잡을 기회가 있겠는가?”
영무예가 싸늘하게 물었다.
“과거 수많은 사람과 손을 잡았지요. 저희는 그저 평안한 시대를 원할 뿐입니다.”
영무예는 식연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나직하게 웃기 시작했다.
“내가 썩은 나뭇가지들을 쳐내고자 하는 것은 맞네. 그때가 되면 동륙은 물론 천하에 리국만이 존재하겠지… 그러나 나와 자네들은 달라!”
영무예가 돌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영무예는 말을 몰아 돌격했다. 장도가 말의 힘을 받아 바람을 가르며 베어져 나갔다. 눈부신 빛의 호선이 식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생각할 여지도 없이 식연은 온힘을 다해 고극을 들어 올렸고 창날로 강경하게 굽어진 칼날을 막았다. 고극 머리 부분의 지로 다시 영무예의 공격을 막았다. 식연은 팔꿈치에 전해지는 타박상의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 세상에 평안한 시대는 영원히 없어. 한 차례, 또 한 차례 전쟁이 이어질 뿐이지. 자네들은 교수대에 올라도 그 꿈에서 깨려 하지 않다니 매우 칭찬해. 하지만.”
영무예는 횃불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천구는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네!”
영무예가 포효를 내질렀다.
“죽어라!”
칼의 공세가 거침없이 이어졌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식연은 온몸을 흠칫 떨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칼날은 슥 하고 극 머리의 지를 동강내고는 공격을 이어갔다. 생사의 순간 식연의 두 손이 맹렬하게 진동했다.
영무예는 칼면에 닿은 창대에서 돌연 전해져 오는 놀라운 진동을 느꼈다. 참마도가 그의 수중에서 갑자기 진동하기 시작했다. 극에 칼이 달라붙은 듯 거대한 떨림에 칼의 기세가 늦추어졌다. 칼의 공세가 더뎌진 그 순간 식연은 온 힘을 다해 극대를 한쪽으로 밀어내며 영무예의 공격을 제압했다.
두 사람의 견갑이 맞부딪쳤다. 말이 엇갈려 지나며 전장의 양측으로 질주했다.
“희야!”
여귀진이 외쳤다.
희야가 어느새 군마를 몰아 달려 나가고 있었다! 군숙에서 훈련하는 동안 창술 외에 궁술에도 정통해진 희야는 일찌감치 숙철궁(宿鐵弓)에 조령전(鵰翎箭)을 걸었다. 식연과 영무예가 갈라진 지금 기회는 그에게 있었다. 질주하면서 희야는 숙철궁을 바짝 당겨 영무예의 등 한복판을 노렸다. 숙철궁의 사정거리는 최대 250보나 되었기에 지금 거리에서 명중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희야! 맞은편의 저자부터 쏴!”
여귀진이 그의 뒤에서 크게 소리쳤다.
희야는 순간 뜨끔해 고개를 돌리며 활을 휙 돌렸다. 영무예의 진영에서 커다란 깃발 아래 서 있던 검은 갑옷의 기병이 놀랍게도 홀로 말을 몰고 출전했다. 손에 경노를 든 그는 명백하게 식연을 겨냥하고 있었다.
조령전이 검은 갑옷의 기병에게로 먼저 쏘아졌다. 희야는 노의 살상력이 자신이 든 철궁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노는 가뿐하게 식연의 배갑(背甲)을 꿰뚫을 것이었다. 화급을 다투는 순간이라 희야는 조준할 겨를도 없었다. 스산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간 화살은 검은 갑옷을 입은 기병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검은 갑옷의 기병은 노를 놓쳤다. 노에 걸린 쇠화살은 덤불에 쏘아졌고 기병은 중심을 잃고 말 등에서 굴러떨어졌다.
돌연 충격을 받은 뇌기군 전체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무수한 쇠발굽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잿빛 파도가 초원에 솟구쳐 올랐다. 궁기병 대오가 양측에서 새의 날개처럼 펼쳐졌고 창기병들은 중앙의 전장을 점거했다. 속도를 낸 군마들이 마침내 피어오른 흙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당의 군사들은 적색 경갑을 입은 리국 기병대가 세차게 일렁이는 먼지를 뚫고 나와 초원에서 붉은 파도를 이루며 굽이치는 모습을 뻔히 지켜보았다.
“적조!”
하당군 진영의 누군가가 잠긴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이내 천지를 뒤덮을 기세의 쇠발굽 소리에 파묻혀 버렸다.
적조. 뇌기군의 돌격은 초원 위로 적색 조수가 바짝 붙어 밀려오는 듯했다. 이런 조수가 넘쳐흐른 땅에는 켜켜이 쌓인 시체만이 남을 것이었다.
제후들이 처음 이런 조수를 보았던 때가 쇄하산 팔록원에서였다. 당시 고관들과 장군, 사병들은 모두 놀랐다. 뇌기군의 적조를 마주하자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이 아니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말고삐를 늦추고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넘고, 장애물을 넘고, 동료의 시체를 넘었다. 필사적으로 적의 머리에 군도를 내리찍는 모습은 상주의 얼음 벌판에서 발광하는 과보 같기도 하고 소도 거뜬히 물어뜯어 해골로 만들 수 있는 흉악한 턱을 지닌 월주산 산중의 적색 개미떼 같기도 했다.
그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여 제후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 일전에서 리국의 5천 뇌기병은 7만 제후 연합군의 진을 무너뜨렸다.
뇌기군은 용기 외에 기동력 면에서도 승리했다. 그들의 군마는 갑옷을 걸치지 않았고 기병들도 홍갈색 단단한 가죽 갑주만을 걸쳤다. 군을 이끄는 백부장과 천부장은 등에 홍갈색 기를 꽂고 표식으로 삼았다. 가벼운 복장에 빠른 속도는 뇌기군 승리의 제1수단이었다. 적이 효과적인 진형을 갖추지 못했을 때 뇌기군의 선봉인 창기병은 적의 선두 부대를 가르고 가운데로 찔러 들어간다. 그리고 적군이 빈틈을 메꾸고 포위망을 구축하지 못했을 때 창기병(槍騎兵)을 지원하며 돌격한 궁기병(弓騎兵)이 화살을 퍼부어 상대의 행동을 제압한다. 몇 차례의 일제 사격이 끝나면 뇌기군의 정예병인 도기병(刀騎兵)이 칼을 휘두르며 신속하게 혼란에 빠진 적군을 벤다. 창기병과 궁기병, 도기병이 최종적으로 적진의 후방에 모일 때면 그 뒤로는 한바탕 흙먼지가 채 가라앉지 않은 아수라장만이 남게 된다.
양군의 통수인 식연과 영무예도 적조에 맞설 용기는 없었다. 뇌기가 움직이자마자 두 사람은 교전을 지속하지 못하고 번개처럼 말을 몰아 전장의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세차게 쏟아지는 기병의 물결은 거대한 전차와도 같았다. 아무도 밀려드는 그들의 기세를 제지할 수 없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거센 파도에 부서진 암초가 될 게 분명했다.
하당의 일선 기병은 완전히 넋이 나가서 맞서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라 식원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했다. 그 어떤 부대도 통수가 대결하는 동안에는 진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리군의 검은 갑옷을 입은 무사가 부상을 입으면서 지진이라도 난 듯한 현재의 결과가 초래된 것이 분명했다.
식원은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훈련 경험은 물론이거니와 실전 경험에서 하당 기병은 뇌기군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매우 잘 알았다. 고작 3천 기병으로는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도 뇌기군에게 무참히 도륙될 뿐이었다. 그래서 식원은 영기(令旗)를 던졌다. 기병들이 먼저 후퇴하고 노수들은 공중으로 대량의 화살을 연속으로 쏘았다.
뇌기군의 용맹함은 화살이 쏟아지는 순간에도 훤히 보였다. 보통의 경기병은 두꺼운 갑옷의 보호를 받지 못해 화살비가 쏟아지면 말의 속도를 조절해 피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뇌기군은 잇달아 군마의 가죽 방패를 들어 올려 머리 위를 가리더니 화살비를 맞으며 계속 전진했다. 하당의 노수들은 무인 집안에서 모집한 이들이 아니라 대부분 길거리에서 한가로이 빈둥거리는 소년들이었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노는 힘이 강하지 않았다. 아까 검은 갑옷을 입은 리군 기병이 들고 있던 경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화살은 기세 좋게 활을 떠나지만 적진에 떨어질 때가 되면 적군을 살상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가죽 방패도 뚫지 못했다.
홍갈색 화살촉이 적조를 뚫고 나왔다. 가장 경험이 노련한 노병들이 활 공격의 최전선에 모였다.
뇌기군은 어느새 하당 군영의 입구에 바싹 다가왔다. 여귀진은 영월도의 칼자루를 쥐고 흙먼지를 머금은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주위를 둘러보자 노수들은 이미 허둥지둥 중군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세자… 빨리 가십시오! 빨리요! 저들은 뇌기군이란 말입니다!”
백리경홍이 여귀진을 보호하라 보낸 금오위 통령 방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칼을 쥐고 말을 세운 여귀진은 정면에서 덮쳐오는 적조를 직시하며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노수들을 데리고 차례로 후퇴해요. 내가 마지막으로 갈 테니.”
“그… 그럼 세자의 위엄만 믿겠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방산도 국주의 명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대사면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말머리를 돌려 본진으로 달아나기 급급했다.
여귀진은 그의 뒷모습을 흘긋 쳐다보고는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귀진도 국주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방산이 말은 그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실제 그가 맡은 다른 임무는 여귀진의 도주를 방비하는 것이었다. 이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여귀진을 현장에서 죽일 권한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방산은 만사 제쳐두고 달아날 생각뿐이었고 말의 다리가 더 길지 못한 것이 원망스러운 모습이었다.
여귀진은 고향의 무사들이 떠올랐다. 만족 사내들의 혈관에 흐르는 그것은 독주 같았다. 그들이 돌격하는 모습을 보면 독주를 마신 듯 뜨거운 피가 들끓었다.
여귀진은 갈색 눈을 가늘게 뜨고 바람을 거슬러 다가오는 뇌기군을 주시하며 살며시 칼자루를 어루만졌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리군의 천부장, 우군도통령 장박이 두 자루의 군도를 휘두르며 맨 앞에서 달려왔다. 그는 등에 여섯 개의 삼각기를 꽂고 굶주린 호랑이처럼 맹렬하게 포효했다. 그러나 그가 하당 군영 앞에 다가왔을 때 노수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지고 없었다. 만족식 표범 갖옷과 동륙의 옅은 남색 중갑을 걸친 소년 하나만이 말을 세우고 선 채 허리춤의 장도를 쥐고 고개를 틀어 그의 광풍 같은 기세에 맞섰다.
“공격!”
장박이 말에서 뛰어오르며 군도를 비스듬하게 내리쳤다.
여귀진은 영월도의 칼자루를 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칼집에 귀신이라도 숨어 있었던 것처럼 그는 처음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여귀진이 갑자기 힘을 주었다! 칼이 칼집 내벽을 쓸며 미끄러져 나왔고 우웅 하는 진동이 울렸다!
장박은 불현듯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매서운 살기를 느꼈다. 오랜 전장 경험이 그에게 알려주었다. 놀랍게도 상대는 그의 장도 아래 말머리를 돌려 도망가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 그는 공격을 포기하고 왼쪽 칼로 공격하는 척하며 오른쪽 칼로 둘 사이를 막았다. 여귀진은 허리를 쭉 펴며 두 손으로 영월도를 잡았다. 그리고 그 칼로 서늘한 빛줄기를 그리며 장박의 말 복부를 겨냥했다. 여귀진은 강력한 기세로 군마를 베려 했다.
탕 소리가 나며 두 사람의 칼이 튕겨져 나갔다.
장박은 공격을 거두며 여귀진의 공세를 튕겨냈다. 여귀진도 즉시 몸을 기울여 상대를 압박해오는 장박의 왼손 칼을 피했다. 두 사람은 첫 대결에서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장박의 말은 발목을 접질렸는지 땅에 넘어졌다.
“감히 리국의 장박에게 대적하다니 이름이 무어냐?”
장박이 쌍도를 휘두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청양부, 여귀진이다!”
두 사람에게는 겨우 통성명을 할 기회밖에 없었다. 뒤편의 뇌기군이 어느새 덮쳐오고 있었다. 여귀진은 칼등으로 말의 엉덩이를 쳐 전속력으로 후퇴했다. 장박의 군마와 쌍도가 여귀진의 뒤를 바싹 쫓아왔다. 장박의 바로 뒤에서 적조가 두 사람을 하당군의 1만 5천 경졸(輕卒)들에게로 밀어붙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