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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첫 출정 (3)
대윤 성제 3년 8월, 대치 중이던 상양관은 마침내 결전의 장소로 바뀌었다. 6국 제후들은 ‘의갑근왕령’에 연서(連署)1)하고 리국과 2차전을 정식 선포했다. 대윤의 황제가 고대하던 2차 근왕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시작되었다.
초위국 제후 초위공은 무양후 어전월장군 백의를 출정시키고 직접 120리를 배웅 나왔다. 건수에 이르러서는 <연꽃을 따다(採蓮)>라는 노래를 부르며 작별을 고했다. 백의는 1만 병마와 군수품, 마바리2) 6만 필을 이끌고 상양관 아래로 향했다. 초위국의 최정예 부대인 산진 정예병은 이미 건수 강물의 힘을 빌려 사전에 출발했다.
하당국 제후 당공 백리경홍은 무전도지휘 식연을 통솔자로 보냈다. 대류영의 2만 대군이 깃발을 휘날리며 출발했다. 20만 근의 군수품 수레도 함께였다.
순국의 감국(監國)3) 중신 양추송은 순국공 오지윤을 대신해 명을 전하며 둔전(屯田)4)에서 요양하던 명장 화엽을 재기용했다. 동륙에는 추악한 호랑이 ‘추호’로 알려졌지만 풍호철기에게는 존칭으로 ‘호신(虎神)’이라 불리는 명장이 다시 그의 칼을 들었다. 풍호 철기군은 하룻밤에 300리를 돌진하는 빠른 속도로 북쪽에서부터 황성의 뒤편으로 달려가 영무예가 황성 북부를 지키고자 남겨둔 적려 군단을 위협했다.
향후 20년을 핏빛으로 비출 혼이 새겨진 무기, 호아창과 영월도가 소년들의 손아귀에서 신수(神獸)처럼 우렁차게 울었다. 두 무기는 시뻘건 피와 다른 금속과의 부딪침을 갈망한 지 오래였다.
무기는 상자 안에 오래 두어서는 안 된다. 난세의 여러 명장도 미래의 제왕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갑주를 정비하고 각 가문의 휘장을 표기한 커다란 깃발을 내건 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전장으로 향했다. 그때 수사자는 상양관 깊은 곳에서 발톱을 핥으며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 성제 3년, 8월 이레.
희야가 고개를 들었다. 먹빛 깃발이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식연의 머리 위로 휘몰아쳤다. 순흑색 파도 같았다.
창백한 하늘 아래 하당의 2만 대군이 8개 방진을 이룬 채 천천히 초원을 이동했다. 식연은 측면의 한쪽 산머리에 말을 세우고 원근 거리의 지형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로 희야가 깃발을 들고 있었다. 여귀진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장도를 등허리에 맨 채 말을 타고 부근에서 경비를 섰다. 여귀진은 맡은 직무 없이 군과 동행하는 귀족 자제일 뿐이었다. 그러나 식연에게는 그와 함께 출정하는 모든 사람이 그의 부하였기에 여귀진도 갑옷을 벗지 않은 지 장장 열하루가 되었다. 검령을 잡은 식원은 책임이 더 막중했다. 그는 산 아래 대오의 본진 한가운데에서 식연을 대신해 머무르며 삼군을 통제했다.
식원이 녹색 기를 휘두르자 좌우 양군이 완만히 이동했다. 거대한 학의 형태가 양 날개를 접은 것처럼 방대하고 질서정연한 군진이 서서히 하나의 긴 띠로 모였다. 경졸(輕卒)5)과 노수(弩手)6)가 뒤섞인 대오가 중군(中軍)7)에서 전진해 최전방 전선을 차지했다. 2만 하당군은 곧 전방의 산골짜기를 통과할 것이었다.
이곳은 암람산의 한 갈래로 푸릇푸릇 무성하게 죽 잇대어진 산이 일대의 골짜기를 에워싸고 있었다. 하당 대군은 산골짜기를 전진한 지 벌써 열하루째였다. 식연 외에 아무도 내일의 노정을 알지 못했다. 식연은 담뱃대를 물고 묵묵히 하늘가의 엷은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군. 상양관에 도착하려면 며칠을 더 가야 합니까?”
희야가 물었다.
“하루.”
“하루요?”
시선을 맞춘 여귀진과 희야는 조금 놀랐다. 식연의 행군도는 그림에 불과했기에 말에 오른 후로는 줄곧 건드리지 않았다. 대군은 식연의 지휘에 따라 이동했고 출정 전 그려둔 노선에서는 이탈한 지 오래였다. 암람산에 진입하면서부터 그들은 연일 구불구불한 산길을 전진했다. 그리고 이제 막 산간 지대를 빠져나가려는 참인데 어느덧 상양관에 가까워져 있었다.
“이 산골짜기는 삽매곡이라 한다. 이곳을 나가면 광활한 평원으로 250리만 더 가면 되지. 내일 빠르게 달리면 기병대는 먼저 상양관에 도착할 수 있다. 백의 그들보다 많이 늦지 않길 바라야지.”
식연은 말안장에 툭툭 담뱃대를 털었다.
“이 길은 지도에 없는데요.”
희야가 말했다. 식연을 따른 시일이 제법 되더니 제법 지도를 볼 줄 알게 된 모양이었다.
“전에 이 산에서 산적질을 했다. 산에서 먹고사는 산적이 모르는 길이 있겠느냐?”
식연은 고개를 돌려 두 제자를 보았다. 그는 웃는 듯 마는 듯 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 주위로 800리까지의 지형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여귀진은 깜짝 놀랐다. 식연이 농담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식연이 하당의 관리가 되기 전, 그러니까 12년 전 그가 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건 식원도 마찬가지였다. 식연은 한가로울 때면 강산을 논하거나 스스로의 삶을 이야기하곤 했다. 당시의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처럼 묘사했지만 그의 묘사를 한데 모아놓고 보면 어느 해는 항상 텅 비어 있었다.
“희야. 내 명을 전해라. 전군(前軍)은 필요 없는 군수품을 버리고 전속으로 행군하라! 후군(後軍)은 천천히 뒤따른다.”
식연이 호령했다.
“기병대는 오늘밤 말을 먹이고 내일 질주하여 반드시 저녁 전에 상양관에 접근해 주둔한다! 낙오하는 부대는 군법에 따라 처리하겠다!”
“네!”
희야는 품에 안고 있던 사령기(司令旗)를 여귀진에게 던져 주고 청추마(青騅馬)8)의 말머리를 돌려 산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여귀진은 먹빛 깃발을 품에 안고 깃대 아랫부분의 강철 창날을 발아래 암석에 꽂았다.
여귀진은 순간 아연해지더니 낯빛이 급변했다.
“장군!”
“뭐지?”
식연이 고개를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여귀진의 음성에서 무언가 성가신 일이 발생했음을 감지했다.
“누군가가 부근에서 행군을 하고 있습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요. 멀어야 30리에 불과합니다!”
수중의 깃대를 꽉 움켜쥔 그는 귀를 바짝 대고 정신을 집중해 소리를 들었다.
만족 무사들은 행군할 때 말안장을 베고 잠을 자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지면의 진동으로 부근에 대군의 움직임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데 예민한 사람은 상대의 수와 거리는 물론 경기병인지 중기병인지까지 추론해낼 수 있었다. 여귀진은 북륙에서 행군해본 적은 없지만 이런 기술은 사냥할 때 이미 배웠더랬다. 현재 깃대를 통해 전해져오는 진동은 보병이나 3천 명쯤 되는 하당군 기병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식연은 손을 깃대에 대고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빠르구나…. 적인지 아군인지 모르겠군.”
“기병입니다.”
여귀진이 대답했다.
“인원수는 알 수 없으나 기병대가 질주하며 접근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
“멀어야 20리입니다.”
식연은 허리춤의 만궁(彎弓)을 꺼내 활시위에 화살을 얹었다. 향전(響箭)9) 한 대가 날카로운 소리를 울리며 하늘로 쏘아졌다.
산 아래로 명령을 전달할 새가 없었다. 향전이 쏘아지고 삼군은 전력으로 산골짜기를 통과해 바깥 평원에서 수비진을 펼쳤다. 세 사람은 말을 몰아 회오리바람처럼 언덕 아래로 내달렸다. 식원은 이미 군중(軍中)에서 웅장한 진군 호각을 불었다.
그들이 산비탈을 달려가며 전군을 따라잡았을 때 초원 끄트머리 지평선에서는 벌써 어렴풋하게 먼지가 일었다. 삼군은 이미 산골짜기를 통과했다. 노수가 진 앞에 일직선을 이루며 흩어져 있었고 중간에는 선봉 부대의 경기병이 섞여 있었다. 모든 경졸은 뒤편에서 1만 5천 명의 린갑진을 이루었다. 린갑진은 방어에 가장 강한 진형 중 하나였다. 이제 모두가 발아래의 진동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5리.”
식연이 나직하게 말했다.
“저들이 순국의 풍호 철기병이 아니라면…….”
식연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피처럼 검붉은 깃발이 먼지 속에서 서서히 떠올랐다. 지금 밝기로는 깃발의 휘장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희야는 온몸을 흠칫 떨었다. 거센 쇠발굽 소리 속에서 그는 뜻밖에 노랫소리를 들었다.
“수많은 산을 넘으니 아득한 들판이고
아득한 들판 너머는 큰 강이로다
큰 강을 건너니 막다른 바다라
전장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구나”
시작은 한 사람이었는데 노래의 말미에 가서는 삼군이 일제히 호응했다.
“수많은 산을 넘고,
큰 강을 건너니
막다른 바다라
멀고도 먼 길이여
내 백골을 너른 바다에 거두어 주오
낡은 활 잡아당겨 하늘의 늑대를 쏘리니.”
장가(葬歌)였다. 희야는 이토록 비장하고 웅장한 노랫소리는 난생처음 들어보았다. 그들은 발음이 똑똑하지 않았다. 발음이 부정확한 변경 지역 사람들이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노랫소리를 비웃을 수 없었다. 노래 속에서 그만큼 웅대한 포부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맞은편에서 적갑 기병이 광풍처럼 초원을 휩쓸며, 전장에 뼈를 묻는 노래를 목청껏 부르며 다가왔다. 그들은 상대방의 깃발을 보고서도 전혀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생사 따위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저 이대로 말을 놓아 달리고 또 달려 천산만수(千山滿水)를 뚫고 하늘 끝까지 달릴 생각뿐인 것 같았다.
커다란 깃발이 펄럭이고 마침내 깃발의 휘장이 희야의 눈에 들어왔다. 무수한 낙뢰로 이루어진 화환 하나가 펄럭이는 붉은 깃발 속에 드러났다. 리국 영씨 가문의 ‘뇌열지화(雷烈之花)’였다.
리공 영무예의 ‘뇌기군’이었다!
“낡은 활을 잡아당겨 하늘의 늑대를 쏘리니…. 전쟁의 뜻을 꺾지 않았군.”
식연이 허리춤의 검자루를 살며시 어루만지며 말했다.
“천하 영웅들의 만남은 언제나 준비할 새 없이 찾아오는구나.”
“장군. 어째서 대비가 안 된 저들을 즉시 공격하지 않는 겁니까?”
여귀진이 물었다.
“위무왕 전하의 뇌기는 언제든 적진으로 돌격할 수 있다. 대비를 했든 안 했든 아무 상관없지. 저들은 이미 우리를 보았다. <가무위(歌無畏)>를 부른 것은 우리 군에게 건방 떨지 말라 경고한 것이다. 저들은 벌써 우리가 준비되지 않은 틈에 돌격해 갑옷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전멸시킬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식연이 미소를 지었지만 그리 편안한 미소는 아니었다.
“이곳에서 위무왕의 대군을 마주칠 줄은 몰랐군. 상양관의 방어선이 이미 뚫린 것인가? 싸우더라도 이 사내에게 먼저 인사는 하고 싸워야겠지?”
* * *
1) 하나의 문서에 여러 사람이 잇따라 서명함.
2) 짐 싣는 말.
3) 중국의 고대 정치 제도 중 하나로 군주가 자리를 비웠을 때 혹은 친정이 어려울 때 대신 국사를 돌보는 일. 섭정과 유사하나 약간의 차이가 있다.
4)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한 토지.
5) 혼자서 다룰 수 있는 무기로 무장을 한 병졸.
6) 화살이 잇따라 나가도록 장치한 쇠뇌를 쏘는 사수.
7) 전군(全軍)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던 중심 부대.
8) 중국 6대 준마 중의 하나.
9) 예전에, 전쟁 때에 쓰던 화살의 하나. 끝에 속이 빈 깍지를 달아 붙인 것으로 쏘면 공기에 부딪혀 소리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