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22화 (122/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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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난세의 사자 (11)

희야는 몹시 놀랐다. 한 번도 식연의 입에서 이런 상스러운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또한 식연이 이렇게 사납고 직접적으로 막말을 던질 줄도 몰랐다. 희야는 물끄러미 제 스승을 바라보았다. 스승의 눈은 칼빛이 반사된 듯 번쩍거렸다.

“그걸 생각해 봐야 하느냐? 그들이 언제 너를 존중한 적 있더냐? 뭘 보고 널 존중하겠느냐? 비천한 집안 자제에 첩실 소생이고 네 부친도 너를 짐이라 여기는데 동료가 너를 존중해 주길 바라느냐? 저들의 출신이 어떤지, 뭘 중시하는지 알아야지. 그들이 중시하는 건 작위고 전공이고 돈이다! 넌 아무것도 없다! 한데 그들이 널 존중해주길 바랄 수 있겠느냐? 너는 저들이 널 존중해주지 않을 것임을 진즉 깨달았지만 인정하지 않았고 두각을 드러내고 싶어 했지.”

식연은 호통쳤다.

“왜 저들을 아예 죽여버리지 않고?”

희야는 식연의 말들이 묵직한 망치처럼 제 가슴을 쳐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식연은 진정하고 희야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넌 포부는 크지만 팔자가 박복하다. 네가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주지 않아. 하지만 너는 어떻게든 가지려고 해. 그러려면 목숨을 걸고 쟁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네가 그 한 사람, 두 사람을 죽여도 세상에는 여전히 널 무시하는 천 명, 만 명의 사람이 존재할 것이다. 아느냐? 네가 천계성의 황제여도 리국공 영무예는 너를 무시할 것이야. 영무예는 천계성에서 6년을 있으면서도 황제를 애써 죽이려고조차 하지 않았어!”

희야는 식연의 응시하는 눈길에 감히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힘껏 고개만 끄덕였다.

“네 손에는 창이 있다. 아주 오래된 창이지. 네 증조부가 그것을 들었을 때 그를 마주한 모든 사람이 벌벌 떨었다. 누가 감히 그를 무시할 수 있었겠느냐? 전무후무한 무사가 되려면 한 사람이 아니라 천하와 싸워야 한다!”

“창을… 잃어버렸습니다.”

희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직 있다. 그 안에는 네 증조부의 영혼이 있어.”

식연이 웃으며 나직이 말했다.

희야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땀이 샘물처럼 온몸의 모공 하나하나에서 넘쳐흘러 주체할 수 없었다.

식연은 물러가라며 손을 내저었다.

“내 말을 잘 생각해 봐라. 너는 내 제자이니 내 기개를 지녀야지. 마목이두사과리아, 거대한 용을 죽이기 위해 만든 창으로 쥐를 죽일 셈이냐?”

식연은 고개를 숙이고 공문에 회신할 뿐,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희야는 내의가 땀에 흠뻑 젖은 것 같았다. 그는 짹소리도 내지 못하고 조용히 물러갔다.

문가에 다다랐을 무렵 등 뒤에서 식연의 그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3년 전 나와 백의는 추엽산성에서 처음 그 사내를 만났다. 우리는 그를 죽이려 했다! 이 난세에 위무왕 영무예를 죽이는 것보다 더한 공적은 없을 테니까! 너는 곧 이 강적을 만나게 될 것이다. 적려와 뇌기는 천하무쌍이지. 하지만 기뻐해야 할 것이다. 드디어 그들과 마주할 기회가 생겼으니까.”

희야의 뒷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자마자 식연의 등 뒤에서 천이 젖혀졌다. 후리후리한 노인이 흰색 베옷을 입고 느릿느릿 별당에서 걸어 나왔다.

“녀석이 자네 때문에 많이 놀랐군.”

노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녀석의 증조부 같은 사내가 되려면 이런 일에 놀라서야 되겠습니까? 요새 좀 게을러지고 영 발전하려는 의지가 없더군요.”

“시대가 다르지 않나. 우리 세대에는 많은 사내들이 영웅이 되고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고자 했지. 희양이 직궁에 있을 때 소근심, 엽정훈, 이릉심이 그의 벗이었네. 그 사내들이 한데 모이면 천하를 뒤집을 수 있었어. 하지만 이 아이에게는 어떤 친구가 있는가? 희야는 너무 외로워. 저 아이는 그저 자기를 증명하고 싶을 뿐이네.”

식연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희야는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녀석에게 자질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처음 보자마자 알아챘지요.”

노인도 웃음을 터뜨렸다.

“제자 하나를 격려하기 위해 그리 격앙된 말을 하다니 자네는 정말 최고의 스승이군.”

“짐짓 그런 척을 한 부분도 있고 진심인 부분도 있습니다. 희야의 창술은 많이 발전했는지요?”

“‘쇄갑’을 익숙하게 사용할 정도가 되었네. 다음 단계는 ‘심랑’인데 이 단계를 넘는 것이 쉽지 않아. 창술을 이 단계까지 운용하면 이미 기술(技術)이 아니라 심술(心術)이네. 모두의 마음에는 늑대가 있어. 관건은 언제 그 늑대를 방출하느냐 하는 것일세.”

“여귀진은요?”

“똑똑한 녀석이네. 기술의 장악력은 희야보다 나아. 하지만 최후의 승부를 가르는 순간의 혈기가 없네. 그것이 그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지.”

노인이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라면 창운고치검을 장악할 기회를 잃을 걸세. 이번에 여귀진도 함께 출정하는 일은 처리가 되었나?”

“이미 말씀드렸고 국주께서도 그를 데리고 출정하는 데 동의하셨습니다. 동륙 군대의 위엄만 경험하게 해 주면 된다면서요.”

“좋아. 때가 되었네. 청년들은 갈고 닦을 필요가 있지. 진정한 출정을 나서기에 앞서 완벽한 훈련이 필요해.”

희씨 저택.

황혼이 질 무렵이었다. 저택은 초롱과 오색천으로 장식되었고 주방에서는 온 사방에 음식 냄새를 풍겼다.

하녀며 머슴이며 할 것 없이 은화 열 냥을 상으로 받고 기쁜 얼굴로 분주하게 요리를 준비했다. 중당에는 커다란 항아리가 하나 있었는데 안에는 청유가 가득 차 있고 기름 위로 불이 붙은 가느다란 심지 하나가 떠 있었다. ‘천수등(天壽燈)’이라고 하는 하당의 풍속으로 생일날 불을 붙이고 사람을 두어 지켰다. 10일을 타면 수명이 10년 늘고, 20일을 타면 수명이 20년이 늘어난다는 길한 의미를 담고 있다.

생일의 주인공은 희씨 가문의 가주인 희겸정이 아니라 그의 둘째 아들인 희창야였다. 부부는 차남과 함께 처마 아래에서 주마등을 갖고 놀았다. 등의 8면은 모두 시로 채워져 있었는데 한쪽 면만 트여서 시를 볼 수 있었다. 희창야가 살며시 옆으로 밀자 등이 빠르게 돌아갔다. 위쪽의 말 한 필이 움직이는 것 같더니 이내 멈추었고 한쪽 면에 짧은 시가 나타났다.

검을 메고 사막을 향하니

말을 타고 세상 끝까지 가는구나.

목마르면 맑은 샘물을 마시고

밤이면 야인의 집에서 묵네.

희씨 부인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게 무슨 징조람. 나쁜 걸 골랐네!”

그 주마등은 운명을 점치는 등이었다. 사내아이가 열다섯이 되면 운명을 점쳐보는 장난감으로 창야가 얻은 시는 최고의 길조가 아니었다.

이런 것을 믿지 않는 희겸정은 그저 웃으며 말했다.

“나쁜 것만은 아니오. 부귀할 징조는 아니지만 검을 메고 사막을 향해 가고 말을 타고 세상 끝까지 가고 목마르면 맑은 샘물도 마시고 밤이면 민가에서 묵기도 한다니 호걸의 기개가 있어.”

“호걸의 기개는 갖다 어디에 쓰게요?”

희겸정의 부인이 투덜댔다.

“평생 근심 없고 평안해야죠. 창야, 아까 그건 인정할 수 없어. 다시 돌려보렴.”

창야는 고분고분 손가락으로 주마등을 다시 밀었다. 멈추었을 때는 다른 시로 바뀌어 있었다.

진귀한 의복을 갖춰 입고 궁궐에 드니

높디높은 산들도 알현하러 오는구나

바다가 넘치고 산이 무너지고 해가 저물면

용의 구름을 빌려 긴 하늘로 들어가네

“좋구나, 좋아!”

부인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희겸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앞말과 뒷말이 이어지지가 않는데 좋기는 뭐가 좋소?”

“입궁하고 천자를 알현하는 건 언제나 귀한 징조잖아요…….”

말을 하던 부인이 돌연 멈칫했다. 이내 즐거운 기색은 사라지고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희씨 가문의 장자인 희야가 소리도 없이 계단 아래 서서 싸늘한 눈초리로 부부와 아우의 단란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첩은 오래전 세상을 떠났다. 희씨 부인은 원래부터 희야를 좋아하지 않았고 희겸정도 희야의 냉혹한 성격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가가 모두 집에 이런 아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회피하며 그가 오가든 말든 될 대로 되라고 내버려두었다.

“집에 돌아올 줄은 아느냐?”

희겸정은 차갑게 옷소매를 휙 내둘렀다. 희야는 보름째 집을 찾지 않았다. 무전도지휘 수하의 청영위 직무를 맏은 후로 집에 돌아오는 일이 드물었다. 매달 받는 녹봉은 집에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다. 희겸정도 얼마 안 되는 푼돈을 신경 쓰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들이 밖으로만 떠돌고 효심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으니 그로서도 관심을 쏟기가 쉽지 않았다.

“곧 갈 거예요.”

“허허. 대단한 낯짝이구나. 아비된 이에게 모처럼 만에 찾아와 얼굴 한 번 비춰주고는 곧 간다니.”

창야와 부인의 손을 잡은 희겸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당으로 들어가 탁자에 앉았다. 맏이는 부르지도 않았다.

“말씀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아이쿠!”

요리를 내오던 하녀 하나가 실수로 희야에게 부딪쳤고 요리가 가득 담긴 사기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어딜 들이받는 게야!”

부인이 대노했다.

“너는 오늘이 네 아우의 생일인 것도 모르니?”

하당의 풍속에서는 생일날 사발이나 접시를 깨면 불길한 징조라 여겼다.

“저놈 성격을 몰라 그러시오?”

그런 풍속을 믿지 않는 희겸정은 부인의 어깨를 꾹 누르며 하녀를 향해 손을 내둘렀다.

“치워라.”

하녀는 당황하며 무표정한 장공자, 희야를 흘긋 쳐다보고는 잰걸음으로 쓰레받기를 가지러 갔다. 희겸정은 부아가 치밀어 희야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요리를 내오는 하녀들이 줄지어 들어갔다. 그들은 희야의 앞을 스쳐 가면서도 한마디 건네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희야는 눈앞의 모든 일이 저와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그곳에 서 있었다.

묵묵히 고개를 돌린 희야는 주마등을 밀었다. 주마등의 말이 희야의 손가락 아래 빠르게 회전했다. 생기 없는 두 눈에 운명의 시가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그는 벌써 열일곱이었지만 운명을 점치는 놀이는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순간, 희야는 불현듯 자신의 미래가 무엇인지 강렬하게 알고 싶어졌다. 주마등이 멈추었다. 등은 두 시의 중간에 멈추었다. 희야에게 보이는 것은 그저 말 한 필뿐이었다.

희야는 멍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희겸정은 주마등 앞에 넋을 놓고 있는 맏이를 흘긋 쳐다보았다. 갑자기 불꽃이 일더니 주위의 등롱에 불이 붙었다. 불은 극도로 빠르게 타올랐고 주마등은 금세 잿더미가 되었다. 희야는 언제나 그랬듯 불길을 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녀들이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오자 희야는 휙 몸을 돌려 무거운 창을 들고 성큼성큼 문을 나갔다.

문은 희야의 등 뒤에서 굳게 잠겼다. 쾅. 굉음이 울렸다. 누군가가 도자기 같은 것을 매섭게 문에 내던진 듯했다. 희야의 마음이 싸늘해졌다. 그 자기 조각이 희야의 마음을 베어 온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희야는 묵묵히 석양을 마주했다. 그저 내일 출정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얻기 어려운 기회라고, 공을 세울 수도 있고 전장에서 죽을 수도 있지만 희씨 가문을 빛낼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제 증조부와 같은 영웅이 되고 싶다고도 말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진심으로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희야는 깨달았다.

석양 아래, 희야의 맞은편에서 말을 타고 칼을 찬 소년 하나가 그와 마주 보고 있었다.

여귀진은 막 궁에서 나와 이곳에 도착한 터였다. 하인을 시켜 알리기도 전에 희야가 대문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대문이 굳게 닫히고 문 안쪽에서 쾅 하며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희야와 마주 선 여귀진은 그의 눈에 차츰 맺혀가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발견했다. 여귀진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곳에 말을 세우고 서서 점점 날카로워지는 검을 바라보듯 그렇게 제 친구를 바라보았다. 한참 만에 여귀진이 말을 꺼냈다.

“아까 내무부에서 국주의 명을 전해왔어. 하당군과 함께 출정해서 직접 전투 상황을 살펴보라고 말이야. 이번에도 우리는 같은 편이네.”

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돈 좀 있냐?”

여귀진은 순간 놀라서 멍해졌다. 매월 그가 사용하는 돈은 궁에서 지급했다. 도박판에 쓴 금수 200냥은 이미 식연에게 몰수당해 되찾아올 수 없었다. 게다가 북륙의 세자라고는 해도 어쨌든 남회에 인질로 구류된 몸이라 필요하다고 바로 돈이 생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귀진은 곧 웃으며 희야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술 마실 돈은 충분해, 가자!”

희야는 묵묵히 제 친구의 미소를 바라보다가 덥석 그의 손을 잡고 몸을 날려 여귀진의 말에 올라탔다.

해 질 무렵의 거리에는 행인이 많았다. 여귀진은 말고삐를 휙 잡아당기며 채찍질까지 한 차례 더했다. 그러자 북륙의 준마가 길게 울부짖으며 놀란 인파를 가르고 핏빛 석양을 향해 달려갔다. 거리의 사람들은 우왕좌왕 피하며 물러났고 소년들의 웃음소리가 사람들의 아우성을 뚫고 나왔다.

희야가 밖을 나가자마자 뒤에서 희겸정의 부인이 내던진 접시가 문에 부딪쳐 깨졌다.

“내 원 참.”

희겸정은 짜증을 내며 다가가 부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찌 부인까지 물건을 던지는 거요? 오늘은 창야의 생일이오. 물건을 깨부수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잖소. 어미가 되어 애한테 화를 내는 거요?”

“난 쟤 엄마가 아니에요. 누가 쟤 엄마래요? 쟤 엄마는 그 천한 계집이라고요! 저 녀석 안중에 내가 있긴 하답니까? 당신은 있대요? 창야가 쟤 눈에 아우이기는 한가요? 이게 다 당신이 저 녀석을 감싸줘서 생긴 못된 버릇 아니에요! 이번에는 또 뭐 하러 왔대요? 일부러 제 아우의 생일을 엉망으로 만들고 주마등도 태웠어요. 심보가 정말 악독하다니까! 창야 죽으라고 저주하는 거 아녜요?”

부인이 말하면서 탁자에 엎어져 엉엉 울었다.

창야는 영리한 아이였다. 얼른 제 어미에게 달라붙어 팔을 잡아당겼다.

상황이 이리 난감해질 줄 몰랐던 희겸정은 멋쩍게 손을 마주 비비며 나직한 목소리로 부인을 위로했다.

“허! 다 끝났소. 지난 일이 아니오. 주방에 요리를 새로 하라 하지. 오늘 창야의 생일이니 우리 세 식구 즐겁게 보냅시다.”

“즐겁게 보내긴 뭘 보내요! 엉망이 됐구먼.”

부인의 통곡 소리는 점점 더 사나워졌다.

“희야가 일부러 등을 태운 것도 아니잖소. 등불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고. 희야도 만지작거렸을 뿐이오. 그냥 장난감인데 뭘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요?”

희겸정이 인상을 구겼다.

“아직도 그 녀석을 감싸는군요!”

부인은 머리칼이 흐트러지고 목소리도 쉬었지만 몸가짐은 개의치 않고 고함을 쳐댔다.

“당신 아직도 그 천박한 여자를 생각하는 거잖아요! 그 여자의 용모와 경망스러운 행실을 떠올리겠지! 어떻게 잊겠어요! 그러니 그 여자 아들까지 역성들어 주지! 당신 마음이 그 여자를 못 잊어요. 당신네 남자들은 전부 그 여자를 못 잊는다고요!”

부인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느라 급변하는 희겸정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제 부인을 달래던 씁쓸한 미소가 그대로 굳어지더니 차츰 다른 표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미쳤소? 다시는 그 여자 얘기 꺼내지 마시오!”

희겸정은 성난 목소리를 나직하게 목구멍 안으로 억눌렀다. 그가 웬일로 아내에게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은 질겁한 것 같기도 하고 부인을 잡아먹을 듯 흉악해 보이기도 했다.

“그 여자는… 요괴요!”

희겸정의 부인은 놀라 아연해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훌쩍임을 멈추고 딴사람으로 변한 듯한 남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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