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21화 (12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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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난세의 사자 (10)

“소주 공주가 위험한 이유는 그녀의 조국이 황실에 충성하는 초위국이기 때문이다. 초위국은 영무예의 가장 큰 적이다. 영무예가 단칼에 소주 공주를 베어 버린다면 초위국 국주의 마음속 살점을 잘라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초위국 국주는 여공작으로 신분이 낮은 안평군에게 시집을 갔다. 피붙이라고는 소주 공주 하나인지라, 딸자식을 끔찍이 여기는 마음이 나라를 아끼는 마음 못지않다. 하여 올해 초 우리는 초위국과의 밀약에 따라 초위국에 40만 금수의 군비를 증여하고 초위국은 황성의 세력을 이용해 몰래 소주 공주를 데려와 남회에 머물게 하려 했다. 양국은 그렇게 동맹을 맺었지. 제후국 중 우리 하당은 가장 부유하고 초위국은 군사력이 가장 강하니 실로 보기 드문 동맹이다. 그런데 영무예가 황성을 떠나면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을 벌였다. 황제를 헌신짝 버리듯 하고 소주 공주를 데리고 간 것이다!”

“아, 인질!”

“그렇다. 영무예는 천하에 무서울 게 없는 자이나 꺼리는 사람이 딱 하나 있다.”

“누구요?”

“백의. 초위국 조정과 재야에서 막강한 권력을 지닌 중신이자 천하 명장 중에서도 으뜸가는 사람이지. 영무예가 소주 공주를 동행한 것은 백의가 이 기회에 그와 결전을 벌이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것이다!”

“백의 장군!”

희야도 아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희야는 온몸이 흠칫 떨렸다.

‘천하 명장 중의 으뜸!’

희야는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소주 공주가 이대로 리국에 가게 된다면 우리도 녹색 모자를 쓰는 꼴이 된다. 40만 금수도 리국을 대신해 보낸 예물이 되는 셈이지.”

“예물요?”

희야는 또다시 어리둥절해져 식연을 쳐다보며 설명을 기다렸다.

“제후 간 동맹은 십중팔구 혼인을 바탕으로 한다. 어차피 자식을 낳는 것이 국주에게는 힘든 일도 아니니까. 자식들은 어울리는 집안과 혼인하고 나라는 동맹까지 맺을 수 있는데 하기 싫을 이유가 없지. 하당도 본래 초위국과 동맹을 맺으며 소주 공주와 욱 세자를 맺어주려 했다. 한데 공주가 리국의 구원성 가게 되면 영무예가 제 아들 중 하나와 짝을 지어주며 자식 몇 낳게 해도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하여 초위국에 보낸 금수도 리국을 대신해 초위국에 예물을 보내준 셈이 되는 것이다.”

식연은 양손을 으쓱해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더구나 우리 세자의 정혼자가 강제로 남에게 시집을 갔으니 신하된 자로서 우리도 책임을 면할 수 없지 않겠느냐?”

“저랑은 상관없죠. 욱 세자의 일인데요.”

희야는 대류영에서 연무를 선보일 때 멀찍이 떨어져 있던 연약하고 섬세한 소년을 보았다. 여귀진에게 세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내자식이 여자의 치마폭에 쌓여 지내다니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주 공주에 관해 한 가지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다.”

식연이 빙그레 웃으며 희야를 보았다.

“무슨 비밀이죠?”

희야는 저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점에서 이야기꾼 선생이 성목을 탁 내리칠 때처럼 그랬다.

“가히 충격적인 비밀이지. 소주 공주가 희 황제의 사생아로 그의 유일한 혈육이라는구나!”

“황제의 딸이라고요?”

희야도 화들짝 놀랐다.

“선황제의 딸이라 해야겠지. 초위국 국주도 백씨 성을 쓴다. 황실의 한 갈래지. 장미 황제는 심사숙고해 초위국에 상양관이라는 요충지를 분봉(分封)했다. 당시 북쪽에서는 순국 오씨가 당올관을 지키며 북륙의 만족에 대항했고 남쪽의 초위국은 상양관 밖에서 황성을 지켰다. 그리하여 황성은 난공불락이었지. 리국의 적려와 뇌기가 강하기는 하지만 초위국 땅을 넘어 상양관으로 진군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영무예는 패주이자 보기 드문 귀재다. 그는 상양관을 공격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기병을 이끌고 천연요새를 넘어 곧장 천계성으로 쳐들어갔지. 뇌안산 장벽이 뚫리고 조정이 뒤흔들렸다. 그해 초국공 백보지는 직접 군을 이끌고 출격했어. 제후국 연합군을 통솔하며 쇄하산 팔록원에서 리국과 결전을 치렀지만 패전해 죽고 말았다. 남은 핏줄은 딸 하나였고 아명이 순아였으니 본명이 백순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현재 초위국 여공작으로 감히 그녀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지.”

“초위국 여공작은… 신분이 낮은 안평군에게 시집갔다면서요? 그러고 황제와 자식을 낳다니 근친혼 아니에요? 제가 듣기로는 근친혼으로 낳은 자식은 바보가 된다던데.”

식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쯧! 그게 무슨 헛소리냐? 700년 전 분가해 벌써 30대에 걸친 원친(遠親)이 생겼거늘. 무슨 근친혼이야?”

희야는 이해가 잘되지 않았지만 얌전히 “아, 네” 하고 대꾸했다.

“백보지의 딸은 그해 열다섯이었고 마침 천계성에서 지내고 있었다. 열여섯 되는 해에 초위국으로 돌아가 초봄인 4월에 혼인했다. 한데 소주 공주는 10월에 태어났지. 혼인한 지 여섯 달 만에 어찌 아이를 낳는단 말이냐?”

식연은 의중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장군 말씀은 여섯 달 만의 조산이 드문 일이란 겁니까?”

식연은 진지한 제자의 까만 눈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 잠시 적막이 흘렀다. 식연은 희야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네 사고방식은 정말 보통 사람들과 현저하게 다르구나. 이런 것을 누구한테도 배운 적 없느냐? 회임하고 여섯 달 만에 아이를 낳으면 십중팔구는 사산이다. 그런 아리따운 공주가 태어날 수 없어. 더구나 공작은 황궁에서 지냈는데 황궁 안의 어느 남자가 감히 초위국의 영애를 취하겠느냐?”

“가르쳐 준 사람 없습니다. 저희 집 사람들은 저랑 말도 섞기 싫어하는걸요. 아소륵이라고 알까요? 누구한테 물어보겠습니까?”

희야가 말을 이었다.

“초위국 영애를 건드린 건 황제겠군요!”

식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으나 십중팔구는 그러하다. 백순 공작은 젊었을 때 절세미인이었으니 황제가 그녀에게 끌렸다고 해도 충분히 말이 되지. 여섯 달 만의 출산은 당연히 남의 눈을 속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선황제가 생전에 본 적도 없는 공주를 얼마나 아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증거도 있다.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공주에 봉했고 선황제가 직접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하락족이 백금으로 만든 작은 돛단배도 하사했지. 그 배는 잔잔한 호수에서 스스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바람이 없는 날씨에도 황성의 태청지를 가로지를 수 있는 진귀한 장난감이지. 제 자식이 아니면 어찌 일개 제후의 자식에게 그리 마음을 쓸 수 있겠느냐?”

“황제가 미녀 공작과 딸을 그리 좋아했다면 직접 데리고 살면 되잖아요.”

식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희 황제는 생전에 여색을 즐기지 않았다. 후궁도 가까이하지 않았지. 하여 자식이 하나도 없다. 누군가는 황제가 제 자식이 영무예의 박해를 받을까 봐 두려워 끝까지 자식을 낳지 않으려 했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그러니 소주 공주가 정말 자기 딸이라고 해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영무예는 수월해졌다. 희 황제가 죽고 영무예는 자연스럽게 희 황제의 사촌 아우인 광창왕 백회를 즉위시켰다. 바로 천계성의 현 황제이지. 이 일은 이쯤에서 일단락되어야 했으나 황성에는 그것이 달갑지 않은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선 신하들이 소주 공주를 초위국에서 데려와 태청궁에서 키워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현 황제의 막내아들과 혼인시켜야 한다면서 말이지. 사실 이 막내아들은 이제 겨우 두 살 하고도 7개월이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그보다 한참 나이 많은 공주와 혼인을 시킨다니 핑계가 분명했다.

하지만 황성의 일부 사람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움직였어. 결국 황제는 소주 공주를 황성으로 데려오라 직접 성지를 내렸고 초위국 공작도 응할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소주 공주가 황성에 도착하자마자 희 황제의 핏줄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누군가가 어린 여황제를 세우려 한 것 같더구나.”

“대체 어떤 사람들이죠?”

희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희야도 그 안의 음모를 알아챘다.

“모른다. 그동안 나도 황성에 그런 무리가 있다고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능력은 알 수 있었지.”

식연이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장미당’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았느냐?”

“아뇨.”

“모르는 게 맞지. 그자들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면 영무예가 벌써 모조리 죽였을 테니까.”

식연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장미당’이라는 이름은 풍염 황제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세상에 알려졌지만 어떤 조직인지는 줄곧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존재할 것이다. 손을 써 소주 공주를 황성으로 데려온 것만 보아도 그들의 능력을 알 수 있지. 초위국 정권은 백의가 장악하고 있으니 보통 수완은 아닐 것이다. 소주 공주가 황성에 간 지 반년 만에 백의는 소주 공주의 정혼자를 정식으로 확정 지어두려고 방향을 틀어 우리 하당과 동맹을 맺고자 했다. 이것도 꽤 강한 수였지.

하지만 양국이 정치하며 조정에서 암암리에 힘을 겨루는 사이 영무예는 공주를 짊어지고 리국으로 돌아갔다. 대신들은 영무예를 남쪽 오랑캐라며 비웃지만 이 남쪽 오랑캐가 무슨 일을 벌이면 대신들의 수완으로는 막을 수가 없으니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국의 적려와 뇌기는 동륙 내에 적수가 없으니 우리 하당의 군마로는 이기기 쉽지 않겠죠.”

“적려가 가는 곳마다 시체로 뒤덮이지. 내 어찌 모르겠느냐? 하지만 이번에 출정하는 이들은 누구도 자신이 영무예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식연은 실눈을 뜨고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난세의 진정한 패주가 영무예인지 아닌지는 아직 미지수다. 많은 사람이 영무예의 자리를 간절히 빼앗고 싶어 한다. 영무예는 이미 칼을 드러냈다. 그자의 칼은 적려와 뇌기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아직 허리춤에 칼을 감추고 뽑지 않았다. 이번 근왕 출병이 그들에게는 칼을 시험해볼 절호의 기회이지!”

희야는 얼이 빠졌다. 식연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싸웠느냐?”

식연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며 엄숙해졌다.

“제가 속임수를 써서 걔네들 돈을 땄습니다.”

“그리고?”

희야는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저를 무시했습니다. 매번 저와 싸우려고 하죠. 이번에도 저와 싸울 구실을 찾은 것뿐입니다. 저보다 자기들이 강하다고 생각해요. 누구네는 돈이 많고 누구네 집은 수백 년의 전공(戰功)이 있어요. 누구네는 대귀족에 집안사람들이 하나같이 거물이죠. 하지만 우리 집은 귀족 칭호도 버려진 지 오래인 데다 저는 그런 집에서도 무시당하는 존재니까요. 걔들은 군숙에서 저를 이기지도 못하면서 승복하지 않고 굴복시키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전 굴복하지 않을 거예요!”

희야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갈라졌지만 여전히 사나웠다.

“절대로 그 녀석들에게 머리 숙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싸워서 승부를 가리겠다? 고작 네 지기 싫은 그 허영심을 채우려고?”

식연이 싸늘하게 비웃었다.

“그 자식들의 눈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저를 볼 때 정말 경멸하는 눈빛이거든요.”

희야는 고개를 숙였다.

“개소리 집어쳐!”

식연은 분노해 버럭 호통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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