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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난세의 사자 (9)
오후, 유풍당. 백리경홍이 식연에게 하사한 저택 안.
식연은 책상에 앉아 글을 적고 있었다. 희야가 살그머니 서재로 들어와 계단 아래 섰다. 식연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계속 붓을 움직였다.
삭삭. 빠르게 글을 써 내려가는 소리만 들렸다. 참다못한 희야가 살그머니 뒤돌아 도망치려는 순간 뒤에서 식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일 여귀진 세자와 나가 술 마시고 행패나 부릴 줄 알지 참을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구나!”
희야는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짹소리도 하지 못했다.
식연은 서류더미에서 한 묶음의 문서를 꺼내 책상에 던졌다.
“어젯밤의 말썽이 다가 아니지. 여기 지난달 동성 성문수의 보고서가 있다. 누가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싸움을 벌였는데 한쪽은 사내 둘에 여인 하나이고 다른 한쪽은 16명의 호족 자제들이었다는군. 머릿수가 많은 쪽은 여덟이나 다쳤는데 수가 적은 쪽은 전혀 다치지 않았으며 달아나면서 순찰을 돌던 교위 하나까지 때려눕혔다고. 하나는 하당 군관에 하나는 만족 세자라. 소년 영웅들 나셨구나!”
희야는 속으로 뜨끔했다. 자신과 여귀진이 무슨 짓을 하든 스승의 눈을 피해갈 수 없는 모양이었다.
“대단한 영웅이야! 배짱이 아주 두둑해!”
책상을 두드리는 식연의 얼굴에서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종군한 지 5년. 전쟁에는 나가지도 않았는데 의적질부터 배웠구나. 주점에서 이름을 떨치고 길거리에서 주먹을 휘두르다니. 5년 전 내가 너를 군에 끌어들였다만 네게 시정의 협객 기질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구나!”
“군적에서 빼실 겁니까?”
입술을 꾹 말아 물고 침묵하던 희야는 한참 만에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군적에서 빼주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리 간단한 일인 줄 알아?”
희야가 홱 고개를 들었다. 노기를 띤 식연의 눈을 본 그는 문득 궁지에 몰린 기분이 들었다. 희야가 군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식연이 도와준 덕분이었다. 한데 식연마저도 그를 군에서 쫓아내 버린다면 망망한 이 세상에 더는 그를 믿고 추천해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희겸정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희창야에게 부장의 직위를 얻어 주었고 머지않아 곧 군장을 하고 부임할 것이었다. 그러나 희야는 군에 들어온 지 벌써 5년인데 아직 무전청영위였으며 본질적으로는 식연을 모시는 소졸에 불과했다.
세상 두려운 것 없는 희야였지만 지금은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그도 어젯밤 일이 수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홍려경과 남회성의 유명 기녀가 탄 마차를 누군가가 길거리에서 갈라 버리는 바람에 뭇사람들 앞에서 알몸이 드러난 사건은 사소하게 취급하려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희야도 듣는 귀가 있었다. 오전에 홍려경은 노령으로 관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상소를 올리며 병세가 심각해 입궐할 수 없다 했다. 국주는 깜짝 놀라 금오위를 시켜 병문안을 보냈다.
희야는 평생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식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희야는 애써 고개를 들고 식연을 마주 보았다. 고집스러운 성격이 겨우 그를 버티게 했다.
군적에서 빠진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희야는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았다.
식연이 냉소를 흘렸다.
“몇 년이나 봉급을 받아놓고 이대로 가버리겠다고? 군이 돈을 들여 폐물을 키운다면 나라는 누가 지키겠느냐? 한가하게 싸움박질이나 할 바에야 나와 출정이나 하자꾸나. 네놈은 무능한 폐물이지만 전장에서 죽는 것이 시정잡배가 되는 것보다 낫겠지.”
“출정이라고요?”
희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흥분한 그는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
하당은 문치(文治)로써 발전한 나라로 오랫동안 여간해서는 전쟁이 나지 않았다. 군에도 계급이 있었으며 모두가 천하에 큰 난리가 일어나 자신들이 공을 세우고 지위를 얻어 가문이 봉전(封典)을 받고 세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출정 인원에도 제한이 있어서 돈을 주고 연줄을 대야 했다. 술 마시고 도박하고 동료를 팬 희야는 군에서 쫓겨나지 않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으니 출정이라는 경사가 자신에게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죽음이 두렵다 한들 이미 늦었다. 선봉 장좌(將佐) 희야는 명을 받들라!”
식연이 금부(金符) 하나를 던지며 외쳤다.
“삼군은 이미 준비를 마쳤으니 내일 오시에 출발한다. 늦으면 군법에 따라 가차없이 처리할 것이다!”
“상양관으로요?”
비틀거리며 앞으로 몇 걸음 달려간 희야는 선봉부대 통솔을 위임하는 금부를 받아들었다. 제 귀로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 그는 식연을 모시는 소졸로 뇌운정가 무리보다도 계급이 낮았다. 그런데 오늘 금부를 받아들게 되면서 그는 갑옷을 걸치고 선봉대를 이끌며 800명의 경기병 부대를 지휘하는 통령이 되었다. 지위도 기장(騎將) 위였다.
식연은 책상에 동륙의 4주 16국 지도를 펼쳤다. 검처럼 날카로운 붓끝이 북부산과 암람산 산맥이 교차하는 지점을 가리켰다.
“동륙 4개 주는 뇌안, 쇄하, 암람, 북부 4개 산맥으로 나뉜다. 기본적으로 십자 형태를 이루지. 황성인 천계는 북부산과 암람산 사이의 평원에 위치하며 이 두 개의 산이 교차하는 지점이 바로 ‘동륙 제2의 상양관’이다.”
희야는 정신을 집중해 식연의 붙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높고 가파른 산봉우리 사이로 관문 하나가 황성을 봉쇄하며 600리 평원을 마주하고 있었다.
“황제를 구하러 가는 겁니까? 리국과 싸우는 거예요?”
희야는 상양관 아래에서 제후들이 리국 군대를 포위했음을 알고 있었다. 어제 올라온 군사 정보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희야는 직책이 특수하다 보니 많은 비밀 정보를 볼 수 있었다.
“그럼 누구와 싸우겠느냐? 초위국과 전쟁이라도 하려고? 현재 영무예는 이곳에 가로막혀 있다. 상양관은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으로 이리 가지 않으면 1천200리나 돌아가야 하지. 상양관이 영무예에게 뚫리면 후환을 남기는 꼴이 된다. 그러면 더는 그를 잡고 싶어도.”
식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동륙에는 없을 것이야.”
“그럼 저희는 늦지 않았습니까!”
희야는 손바닥에 땀이 났다. 꼼짝 않고 있었지만 어서 전장에 뛰어들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초위국과 다른 나라의 대군은 이미 도착해 상양관 아래에서 리국 군대와 대치 중인걸요!”
“늦어? 이렇게 빠른 움직임은 처음이다. 하당과의 거리를 생각하면 원래 소식은 며칠 늦게 전해지기 마련이지. 국주께서 근왕 출병의 명을 내리자마자 삼군은 오늘 아침 준비를 마쳤고 내일이면 출발할 수 있다. 병사를 통솔할 장좌들은 이미 급령을 받았고 집에 무슨 일이 있든 내일 아침까지 대류영으로 집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군법에 따라 처리되지. 평소 준비에만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아느냐?”
희야는 멍하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략 보름이 걸린다. 우리도 빠른 편이지만 초위국은 더 발빨랐다. 영무예가 상양관에 도착하기도 전에 초위국의 3만 정예병이 이미 상양관으로 진군했지. 나머지 나라들도 사전에 초위국 국경 내에 군대를 배치해 두었으니 초위국의 3만 정예병과 거의 동시에 도착할 것이다. 내 종군한 이래 이토록 많은 군대가 이렇게 빨리 모이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분명 사전에 정보를 얻어 미리 준비한 것이겠군요.”
“맞다.”
식연이 칭찬했다.
“몇 년간 내게 병법을 배우더니 드디어 생각이 좀 트였나 보구나. 하지만 이상한 점은 대체 어떤 사람이 영무예가 귀국할 것을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루 반을 꼬박 생각해 보았는데도 이해가 안 되는구나.”
“어차피 전쟁 아닙니까. 이해해도 출정해야 하고 이해되지 않아도 출정해야 하니 사전에 정보를 얻는 것이 어쨌든 좋지 않겠습니까!”
“꼭 그렇지는 않다.”
식연이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우리에게 너무 좋은 기회 같구나. 너무 좋은 일에는 음모의 냄새가 풍기게 마련이지. 내가 너무 완고한 것일 수도 있으나 나는 평생 가장 좋은 것과는 인연이 없었다. 하여 나는 내 행운을 별로 믿지 않는다.”
그는 의미심장하게 말하고는 눈을 가늘이며 넋을 놓았다.
“어쩌면…….”
희야는 식연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쇄하산 전투로 피해가 막심했으니 각 제후국에서도 실패를 교훈 삼아 전보다 빨리 모였을 수도 있죠.”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녀석이로군. 제후들이 병력을 연합할 때는 반드시 질질 끌며 암투를 벌이게 되어 있다. 실패를 반성한다고 단시간에 해결될 일이 아니지.”
식연이 코웃음을 쳤다.
“한데 재미있는 일이 있다. 골치 아픈 일이기도 하고.”
“무슨 일인지요?”
희야가 귀를 쫑긋 세웠다.
식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리국 대군 중에 우리 하당에서 원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 아주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 모든 제후국에서 빼앗아가고 싶어 하지. 하여 우리도 반드시 행군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영무예가 상양관 포위를 뚫으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얻을 수 없게 돼.”
“누군데요?”
희야의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희야는 본인이 잘 속는다는 걸 알면서도 참지 못했다. 식연은 이야기를 할 때면 꼭 이야기꾼 같았다. 항상 느릿느릿 말꼬리를 끌어서 뒷이야기가 궁금해지게 만들었다. 희야는 좀처럼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았는데 식연이 무슨 말을 할 때면 술술 풀어놓지 않아서 희야는 애가 탔다. 매번 자신이 계속 이야기를 해달라고 매달리는 것 같았다. 그런 까닭에 다른 스승이 제게 병법을 가르친다면 식연의 절반만큼도 성과를 내지 못할 것임을 희야도 알았다. 아마 스승이 가르치고 있으면 희야의 정신은 하늘 밖에 날아가 있을 것이었다.
식연은 꼭 희야를 안달복달하게 만든 다음 느긋하게 웃으며 말해 주었다.
“초위국의 소주 공주다. 초위국 국주의 영애로 황제의 뜻에 따라 황성의 태청궁에서 살았지. 황성이 명목상 황실의 근거지라고는 하나 사실상 영무예의 별채나 다름없다. 그래서 초위국에서는 사자 영무예의 손아귀에 놓인 공주를 매우 걱정하고 있다. 동륙 사람들 모두가 알다시피 영무예는 수사자다. 굶주리지 않으면 관심 없는 것은 흘근거리며 상관도 하지 않지. 그러나 불쑥 떠오르는 그때는 뼈도 남기지 않고 단숨에 공주를 먹어치울 것이다.”
“정말 예쁘게 생긴 공주인가 봅니다? 영무예가 그녀를 거두면 초위국은 위신이 떨어지는 그런 거지요?”
희야는 제가 이해한 줄 알았다.
“성급하기는!”
식연이 희야의 코를 툭 쳤다.
“어찌 이리 경솔하게 결론을 내리느냐? 전쟁터에서는 위기에 직면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이리 외곬으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적을 노릴 때도 적의 성격과 수법을 알아야 하지. 영무예는 색을 밝히는 자가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태청궁에 쳐들어가자마자 황제의 후궁에 살았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황실의 체면이 깎이는 일이지. 온 천하의 제후가 머리에 녹색 모자1)를 쓰는 꼴이 되는 것이다.”
“후궁에는 황제의 부인이 살잖아요. 근데 왜 천하 제후들의 체면이 깎이죠?”
희야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둔한 것. 네가 사는 남회는 풍기가 문란하며 충군이니 애국이니 그리 따지지도 않지. 그러나 황실은 천하의 주인이다. 황제가 아내를 얻는 것은 천하를 위함이요, 아내를 얻어 아이를 낳는 일은 만물을 생성하는 것으로 천하 만백성의 길조이니라. 그러므로 황제의 아내는 천하의 어미요…….”
“그럼 천하에는 어머니가 아주 많겠네요?”
희야가 끼어들었다.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
식연은 기가 막혔다.
“요점은 그게 아니다. 제후는 황제에게 자손이라 할 수 있다. 황제는 아비로서 토지를 아들들에게 나누어준 것이지. 제후는 자식으로서 부친을 공경하고 효도해야 한다. 누군가가 황제의 여인을 범하는 것은 제후의 어미와 할미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니 제후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지.”
“아!”
그제야 희야가 깨달은 듯 고개를 까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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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문화에서는 남자가 녹색 모자를 쓰면 아내가 바람났다는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