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19화 (119/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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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난세의 사자 (8)

식연이 가볍게 웃으며 몸을 돌려 말에 올라타더니 놀란 만마(輓馬)를 쫓아갔다. 식원은 속으로 죽는소리를 하며 뒤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마차가 버드나무 한 그루를 지날 때 식연이 돌연 웃으며 말했다.

“됐다! 이미 승부가 났구나!”

버들가지가 검을 든 무사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는 순간 장대를 든 무사가 홀연히 뛰어올랐다. 그는 공중에서 몸을 쭉 펼쳤다. 거대한 검은색 매가 두 날개를 활짝 펼친 것 같았다. 이어 강하고 사나운 바람이 바위를 가르듯 세로로 내리쳐졌다.

그는 온몸의 무게를 실어 허공에서 채찍질하듯 장대를 내리쳤다!

상대가 검을 들고 막았다. 검날 위로 2척 길이의 장대 토막이 날아갔다. 그러나 장대의 기세는 줄지 않았고 긴 칼처럼 마차 지붕 덮개를 갈랐다. 손에 장대를 든 무사가 땅에 내려서고 이어 마차 지붕 전체가 한 줄기 옅은 연기 속에서 쩍 갈라졌다. 당황한 마부가 말 두 필의 고삐를 필사적으로 잡아당겼고 지붕 위에서 검을 들고 있던 무사는 마차 안으로 고꾸라졌다.

그러나 장대를 든 무사는 완승을 거두지 못했다. 그가 검을 든 무사와 대치하고 있을 때 나머지 두 명의 무사가 긴 줄의 양 끝을 잡고서 재빨리 쫓아왔던 것이다. 그는 착지하자마자 밧줄에 꽁꽁 묶였다. 두 무사는 긴 줄을 잡아당기고서 그의 둘레를 빙빙 달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게 잡아당겨 실타래가 되어버린 그를 자빠뜨렸다.

네 명의 무사가 반항할 수 없는 상대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맞추더니 일제히 손에 든 무기를 내던지고 발을 들어 상대를 잔인하게 밟았다. 딱딱한 장화를 신은 무사들은 무자비하게 발길질을 해댔다. 그들은 발로 차면서 욕을 퍼부었다.

“도망쳐 봐. 일어나서 계속 도망쳐 보라고. 잡종 새끼, 밟아 죽여 버릴 테다!”

의아하게도 밟히는 이는 찍소리도 내지 않았다.

멀리서 말을 세우고 지켜보던 식연은 유유히 담뱃대에 불을 붙이더니 편안하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창백한 얼굴의 조카를 보았다.

“식원. 너는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식원이 힘껏 고개를 저었다.

“순찰 도는 병사들에게 알리고 오겠습니다.”

“병사는 뭣하러?”

식연이 웃으며 물었다.

“너도 군인이 아니더냐?”

식연은 난처해하는 조카의 모습을 보고는 돌연 웃음을 터뜨리더니 천천히 말을 몰아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무명옷을 입고 외출한 데다 밤이 깊어 신분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무사들은 상상 이상으로 오만했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발로 차면서 연신 욕을 퍼부었다.

“여보시게들. 달도 밝고 바람도 맑으니 참으로 흥취 돋는 밤이지 않소!”

식연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당신이 낄 자리가 아니오. 죽고 싶지 않으면 우리 눈앞에서 꺼지시오!”

“허허.”

식연은 제 조카를 보며 웃더니 안색이 돌변했다.

“뇌운정가, 엽정홍, 방기소, 팽련운!”

천둥 같은 목소리에 무사들은 깜짝 놀라 발을 공중에 멈춘 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들이 고개를 돌려 웃는 듯 마는 듯한 사내의 얼굴을 또렷이 본 순간, 주위는 땅에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장… 장군!”

네 사람은 혼비백산해 장군에게 예를 올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희야 소장군도 있었군? 네 둘도 없는 친구인 내 조카가 아까부터 네 안위를 꽤나 걱정하더구나. 안색이 아직도 좋지 않아.”

식연이 빙그레 웃으며 바닥의 ‘실타래’를 쳐다보았다.

식원은 제 친구가 또 길거리에서 싸움을 벌였다는 것을 진즉 알아보았다. 맨손으로 창을 빼앗는 기술은 대류영 내에서도 흔히 볼 수 없었다. 더더군다나 이 정도 배짱으로 밤에 말을 질주하며 길거리에서 목숨 걸고 싸울 사람도 희야뿐이었다.

멀리서 또 한 마리 말이 번개처럼 다가왔다. 식연이 시선을 돌려보니 말 등에 탄 젊은 무사가 두렵고 초조한 표정으로 칼집이 꽂힌 장도를 쥐고 있었다. 급하게 달려온 젊은 무사는 길가의 무장한 무사들이 줄에 단단히 감긴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보고 틀림없이 제 친구가 붙잡혔구나 생각했다. 현장에 있는 사람의 신분을 확인할 새도 없이 말을 몰아 다가간 그는 급히 말고삐를 늦추고 훌쩍 뛰어오르며 허공에서 장도를 휘둘러 먼저 식연의 어깨를 공격했다!

장도의 길이는 장대의 절반에 못 미쳤다. 그러나 젊은 무사가 휘두르는 장도에서는 아까 희야가 장대를 휘둘러 마차를 부수던 그 위세가 느껴졌다. 그는 말고삐를 늦추고 몸을 내밀며 칼을 휘둘렀다. 이 세 동작의 조화가 흠잡을 데 없었다. 칼은 칼집 안에서도 우레와 같은 위력을 띠었다. 식연은 피식 웃더니 검을 뽑지도 않고 어깨를 슥 낮추었다. 그러자 상대의 일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몸을 틀며 비키려던 순간 식연은 뜻밖에 상대의 다리에 세게 뺨을 한 대 맞고 말았다!

새로 도착한 무사는 말을 탄 채 몇 걸음 달려 나가다가 멀리에서 멈춰 섰다. 불현듯 이상한 낌새를 느낀 젊은 무사가 얼굴을 가린 채 말 배를 차며 그대로 달아나려 했다.

“남회성에 그런 칼 힘을 가진 자는 하나.”

식연이 싸늘하게 외쳤다.

“세자. 도망가긴 어딜 도망가십니까?”

여귀진은 어쩔 도리 없이 말에서 굴러 내려왔다. 그는 얌전히 말을 붙잡고 고개를 숙인 채 식연의 앞으로 걸어왔다. 남회성 대류영의 소년 장군들이 전부 식연의 옆에 서 있었다. 여귀진과 희야는 식연의 문하생이었고 나머지는 식연의 군숙(軍塾)에서 병술과 진법을 배웠다. 스승과 제자가 거리에서 한데 모였는데 분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색했다. 식연은 코웃음을 치며 담뱃대를 꺼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사고를 쳤다는 것을 아는 제자들도 조마조마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었다. 묶여 있는 희야는 고개를 숙이고 설 기회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었지?”

한참 뒤 식연이 태연하게 물었다.

몇몇 무사들은 서로 눈짓을 건넸다. 태위부의 자제인 뇌운정가가 부친의 명성을 믿고 살짝 용기를 내 고개를 쳐들고 대답했다.

“희야가 저희 돈을 갈취했습니다!”

“희야가 왜 너희 돈을 갈취했지?”

“저 자식이 도박에서 지니까 사기를 쳤습니다. 저희는…….”

방기소는 변명을 마치기도 전에 불현듯 자기가 입을 잘못 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머지 몇 명이 표독스럽게 그를 노려보았다. 엽정홍은 몰래 발을 움직여 방기소의 발등을 세게 밟았다.

“오?”

식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여서 도박까지 하셨다? 하지만 내가 아는 희야는 빈털터리인데 너희와 도박을 할 돈이 어디서 났지?”

“제가… 빌려줬습니다.”

여귀진이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박판에서 돈을 잃었으면 승복해야지!”

식연은 노기를 띤 얼굴로 바닥의 희야를 보며 말을 이었다.

“승복하지도 못할 거면서 도박을 해? 네가 맞아죽는 것은 별일 아니다. 그러나 내 얼굴에 먹칠을 하다니!”

희야는 이를 악물고 뇌운정가 일행을 차갑게 쏘아보고는 고개를 돌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저들이 먼저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희야는…….”

여귀진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무례?”

식연이 눈썹을 치켰다.

말문이 막힌 여귀진은 고개를 숙인 채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식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못된 심보를 가진 제자들을 쳐다보더니 돌연 활짝 웃었다. 그 웃음에 무거웠던 분위기가 일순 호전되었다.

“뭐 이것도 괜찮구나. 우리 하당은 힘이 많이 이울고 상무 정신도 많이 쇠퇴했지. 기루에서 시간을 허비하느니 몸을 쓰며 무예를 연마하는 것이 낫지, 암.”

제자들은 누그러진 표정으로 차분하게 말하는 식연을 보고 죽다 살아난 기분이 들었다. 희야까지도 눈빛이 수그러들었다.

“세자께서는 신분이 존귀하니 내가 처벌하기 곤란하고. 나머지는 석 달치 감봉에 처한다!”

식연이 손가락 세 개를 세웠다.

“신체 단련을 좋아하는 너희들이니 돌아가면 보름간 중노동도 하거라!”

머리에 벼락을 맞은 듯 모두 고개를 들고 물끄러미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귀족 소년들에게 감봉은 별 문제가 아니지만 보름간의 중노동은 그야말로 환장할 일이었다.

“장군.”

그래도 배짱이 조금 더 있는 뇌운정가가 앞으로 나왔다.

“도박을 한 것은 군율에 따르면 감봉 한 달에 불과하며 싸움도 두 달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 저희는 중노동까지 해야 합니까?”

식연이 코웃음을 쳤다.

“도박을 하고 싸움을 하여 벌한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가 군무에 태만하여 벌을 내린 것이다! 이 나라의 기둥인 당당한 네 명의 군관이 고작 희야 하나에게 떡이 되게 맞고도 모자라 적의 말을 잡을 때 쓰는 밧줄까지 사용하여 하당 군인의 체면을 떨어뜨렸다. 보름의 중노동도 약과인 줄 알아라!”

식연이 휙 소매를 털며 돌아서 떠나려던 순간, 뜻밖에 희야가 입을 열었다.

“장군. 저는 이겼는데 왜 보름간 중노동을 해야 합니까?”

식연은 고개를 돌려 곁눈질로 희야를 흘깃 보았다.

“너는 도박에 지고도 빚을 떼먹어 벌하는 것이다. 노름하는 자세가 아주 엉망이야!”

그는 속이 후련한 듯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느릿느릿 걸어갔다. 기죽은 제자들 무리를 남겨두고 식원만이 바짝 그의 뒤를 쫓았다. 자기 말을 붙들고 길가를 따라 버드나무 아래를 걷던 식연이 고개를 돌려 제 조카를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네 낯빛이 어찌…….”

식원은 참담한 얼굴로 조용히 희야가 갈라 버린 홍려시 마차를 가리켰다.

식연이 고개를 돌려보았다. 얼굴에 띤 미소가 삽시간에 얼어붙는 듯하더니 서서히 한 줄기 씁쓸함이 더해졌다. 달빛 아래 드러난 마차에는 홍려시경 단침악이 맨몸을 드러낸 채 덜덜 떨고 있었다. 곁으로 가녀린 알몸의 여인이 앉아 있었는데 남회성 기루에서 유명한 무희 소소추였다.

“단 대인. 안녕하십니까…….”

식연이 소매를 맞잡고 장읍을 올렸다.

“식 장군…….”

홍려시경은 여전히 떨고 있었다.

“저 녀석이 제자가 된 후로 제 걱정이 나날이 늘어만 갑니다.”

식연이 고개를 돌려 희야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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