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17화 (11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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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난세의 사자 (6)

우연은 득의양양해서는 방싯 웃으며 무심히 툭 잔을 열었다. 고개를 내밀어본 방기소는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그 자리에서 까무러칠 뻔했다. 일부러 그의 성질을 돋우려는 듯 주사위 세 개가 하나같이 6이 나왔다. 이보다 더 클 수 없는, 가장 ‘큰’ 숫자였다.

“바지 벗어! 벗으라고!”

우연이 손뼉을 치고 웃으며 팔짝팔짝 뛰었다.

“네 앞에 있는 고만큼의 돈으로는 반도 못 대. 오늘 이 몸이 은혜를 베풀어 주지. 바지 벗은 채로 말 타고 돌아가면 그거로 깔끔하게 청산해 줄게!”

희야는 방기소가 바지를 벗든 말든 관심 없었다. 그는 군복 외투를 벗어 양쪽 소매를 단단히 묶은 다음 금수를 한 움큼, 또 한 움큼 쑤셔 넣었다. 들어 올리니 빵빵한 두 주머니가 나왔다.

“1년간 술값 걱정 없겠네.”

희야는 금수를 들고 무게를 가늠해 보며 여귀진에게 말했다.

여귀진은 기쁘지 않았다. 그는 돼지 간처럼 시뻘게진 방기소의 얼굴을 보며 다급히 우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됐어. 그만해. 한 번만 봐주자. 매정하게 그럴 필요 없잖아.”

“안 봐줄 거야!”

우연이 소매를 휙 뿌리치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재밌잖아!”

“재미…….”

여귀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아무래도 평생 우연의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탁자를 탁 내리친 방기소는 잡아먹을 듯이 희야와 여귀진, 우연을 둘러보았다.

희야는 한 걸음 살짝 물러나며 손으로 탁자 가장자리를 잡았다. 창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탁자로 방어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 있었다. 방기소가 패배에 눈이 뒤집혀 손찌검을 하려 한다면 절대 뜻대로 되게 해주지 않을 것이었다. 군에 들어간 지 몇 년 된 희야는 방기소 일행과 피범벅이 될 때까지 싸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희야 혼자 몇 명에서 십수 명까지 상대했지만 언제나 막상막하로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방기소는 천천히 손을 뗐다. 탁자에는 짙은 색의 비취 황(璜)1) 하나가 남았다. 매우 작은 크기로 우연의 손바닥 절반만 했다. 중앙에는 짙은 녹색 구멍이 있었는데 옥의 비취색이 전부 거기에서 흘러나온 것 같았다.

“용혈취다! 구멍도 있어! 아까 탁자에 있던 금수의 열 배를 줘도 못 사는 거야!”

패배에 눈이 벌게진 방기소는 마지막으로 제 어미가 죽기 전에 그에게 남긴 패물을 걸었다.

“지금까지 내가 봐준 거야! 다시 한판 하자! 지면, 이거 너희가 가져가!”

방기소가 씩씩댔다.

우연의 눈이 그 비취에 환하게 빛나는 듯했다. 그녀는 비취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더니 폴짝 뛰며 말했다.

“약속지켜라!”

“잠깐! 거저먹을 생각은 마! 너희가 지면 어쩔 건데?”

방기소가 음산하게 희야를 쳐다보았다.

희야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방기소를 응시했다. 살기와 적의를 느낀 희야는 삽시간에 눈빛을 싸늘하게 굳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고 싶은데?”

방기소가 음흉하게 웃으며 우연을 가리켰다.

“너희가 지면 저 여자애는 우리랑 간다!”

“무슨 개소리야!”

희야가 탁자를 내리치며 이를 악물었다. 무쇠라도 물어뜯은 것처럼 볼 근육이 불룩 튀어나왔다.

여귀진이 우연의 손을 잡아당기며 작게 한 걸음 물러났다. 칼을 지니고 출궁한 여귀진은 소리 없이 칼자루를 틀어쥐었다.

“좋아!”

우연이 손을 들었다.

“하지만 하룻밤만이야. 내일 아침에는 멀쩡하게 돌려보내야 해. 우리 여귀진 세자와 희야 공자는 별로 착한 사람이 아니거든. 괜히 두 사람한테 미움 사지 말라고!”

깜짝 놀란 방기소가 시선으로 우연을 집적거리듯 훑었다.

“걱정 마. 하룻밤이야. 내일 아침엔 얌전히 보내줄게! 장담컨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후회하고 말고는 네가 할 소린 아니고.”

우연이 혀를 쑥 내밀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연은 탁자 위로 올라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잔을 잡았다.

“희야! 우리가 딴 돈 다 걸어!”

희야는 굳은 얼굴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우연의 성격을 알았다. 하지만 방기소가 질이 좋은 남자가 아니란 것도 아는 그였다. 방기소는 아홉 살에 벌써 기루에서 짙은 화장을 한 여인들과 어울리며 그녀들에게 돈을 펑펑 썼다.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꽤 명망이 있는 것도 다 동료들과 함께 퇴폐적인 춤을 구경하고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는 데 기꺼이 돈을 썼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이기면 금수는 너랑 아소륵이 다 가져. 비취황은 내가 가질게.”

우연은 건들건들 희야의 어깨를 툭 쳤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틀림없다니까!”

희야는 군말 없이 금수를 전부 밀어놓았다. 그가 아는 우연은 남의 손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남의 판잣집을 무너뜨려서 달밤에 함께 도망친 적도 있었다. 여귀진이 희야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는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풀지 않고 별말 없이 조용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희야는 천천히 한 걸음 물러나며 문 있는 쪽을 흘긋 보았다.

방기소는 이미 눈이 뒤집혔다. 정통 노름꾼인 그는 맞은편의 두 소년, 용기를 제일로 여기는 젊은 군관과 기품 있고 겸허한 만족 세자가 빚을 떼먹고 도망칠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나누며 그들의 자그마한 유랑 부대를 이끄는 두 사람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갖은 모략을 쓰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애초에 신의를 따지지 않는 방기소는 도박에 눈이 뒤집혀 깨닫지 못했다. 이 두 사람이 주사위가 흔들릴 때부터 딴 속셈을 품었다는 것을.

주사위가 잔 속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양쪽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온 세상에 이 잔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탁. 우연이 탁자에 잔을 내려놓았다. 주사위 소리가 그쳤다.

“정했으면 손 떼! 이 한 판에 생사가 갈린다. 돈을 바라는 자는 돈을 위해 죽고, 옥을 바라는 자는 옥을 위해 죽고, 여자를 원하는 자는 여자를 위해 죽으리라. 망설이지 마시고! 정했으면 이제 연다!”

우연이 크게 소리쳤다.

“정했어!”

희야가 외쳤다.

“나도야!”

방기소도 크게 외쳤다.

희야는 역시 크다에 걸었고 방기소는 작다에 걸었다.

우연은 잔을 열고 두 팔을 들어 올리며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잔 속에는 가지런히 6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여전히 이보다 더 클 수 없는 가장 ‘큰’ 숫자였다.

“얻지 못할 것은 끝까지 얻을 수 없는 법!”

우연이 손을 뻗어 비취 황을 잡으려 했다.

“잠깐!”

뇌운정가가 고함쳤다.

우연은 순간 아연해졌다.

뇌운정가가 우연이 들고 있던 잔을 휙 빼앗아갔다. 많은 사람이 주시하는 가운데 뇌운정가의 손가락이 잔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잔 바닥의 반촌 두께인 붉은 나무판이 살짝 튕기더니 그 위에 있던 세 알의 주사위가 뒤집어졌다.

“사기야! 너희 사기쳤어!”

엽정홍이 펄쩍 뛰었다.

“사기를 쳐? 너희 뒤지고 싶지! 어디 감히 사기를 쳐?”

죽다 살아난 방기소는 목소리가 천둥치듯 쩌렁쩌렁했다.

우연은 몸을 날려 탁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우연이 속임수를 쓴 것이 들통 났다. 우연이 어떻게 농간을 부렸는지 방기소나 뇌운정가가 알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잔 바닥의 나무판이 움직이니 미심쩍은 구석이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우연은 그저 잔술수를 부린 것뿐이었다. 그녀는 인족이 아니라 우족이었기에 청력이 일반인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예민했다. 주사위가 잔 바닥에서 미끄러지고 멈추는 순간의 소리도 구분할 수 있었다.

더구나 우연은 이런 도박장이 처음도 아니었다. 심지어 주인장과도 약간 친분이 있어서 이곳에서 노름을 할 때면 자신 있었다. 그녀는 바닥이 얇은 잔으로 바꿨다. 소리를 들어서 자기가 이겼을 때는 가만히 두고 상대가 이기면 톡 쳤다. 그러면 판세가 뒤집어졌다.

방기소의 시선은 우연의 귓불과 뺨, 가슴을 알짱거렸다. 귀엽고 고상해 보이는 이 소녀가 잔술수의 명수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속임수가 들통 난 지금, 맞은편의 네 사람이 음험한 얼굴로 한 발짝씩 다가왔다.

“사기? 내가 무슨 사기를 쳤는데? 난 노름밖에 안 했어! 이 몸이 착하다고 해서 행패도 못 부릴 줄 알아?”

우연은 고함치면서 쌩 물러나더니 가림막을 지나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방기소 일행은 여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희야는 한 발을 들어 탁자를 뒤엎어 버렸다. 그는 탁자를 엎기 전 번개처럼 탁자 위의 금수가 가득 찬 주머니를 낚아채 어깨에 짊어지더니 뒤돌아 정확하게 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등에도 눈이 달린 것 같았다. 여귀진은 칼을 들고 네 사람과 아주 잠깐 대치하다가 앞으로 한 걸음 몰아붙이는 시늉을 했다. 훈련원에서 여귀진의 칼을 겪어본 적 있던 방기소 일행은 그 위세가 두려워 막 피하려는 찰나, 여귀진은 휙 돌아서더니 재빨리 달아났다.

달빛 아래 세 인영이 불 밝힌 도박장에서 잇따라 뛰어 나오더니 서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다.

“흩어져! 따로 도망치자!”

희야의 목소리가 어둠을 관통했다.

몇 번째인지 모른다. 남회성 사람들에게 미운털이 박힌 이 소년, 소녀는 또 한 번 목숨 건 도주를 시작했다. 수차례의 연습을 거친 큰 공연이 다시 무대에 오른 것 같았다.

하당국, 남회성 안.

8월 초사흘은 이미 초가을었다. 점차 가을바람이 일었다. 거리 양쪽의 초목 위로 무성한 가을빛이 넘쳐흘렀다. 야경꾼의 딱따기 소리는 가을날의 시름을 더했다.

탁발 장군부. 간소한 중당(中堂)에 주인과 손님 양측이 멀찍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연초가 타며 푸른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새카만 도포를 입은 손님이 담배를 태우며 정원의 무궁화 나무에 시선을 두었다.

“리국의 적려와 뇌기는 천하의 강병인데 식연 장군께서는 준비가 되셨소?”

주인이 침묵을 깼다.

“국주께서 금부철마인을 하사하며 출정을 명하셨소. 일국의 주인이 뱉은 말은 산보다도 무거운 법.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니 나는 그저 국주의 당부를 저버리지 않고 승리해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랄 뿐이오.”

“식 장군은 황실의 봉호도 있고 국주께서도 신임하는 중신이 아니오. 영무예를 토벌하는 일은 군국의 대사인데 나야 그렇다 쳐도, 정녕 식 장군과도 상의를 하지 않은 것이오?”

“주갑에 봉랍으로 봉해진 검인과 조서를 궁의 내관이 직접 내 집으로 가지고 왔더이다. 나는 국주의 얼굴도 뵙지 못했소.”

중당에는 오랫동안 정적이 흘렀다. 손님이 천천히 연기를 한 모금 토해냈다.

“그렇다면 출정이 국주께서 내린 결정이란 거요?”

주인이 갈색 눈동자를 들어 올리며 손님을 직시했다.

“그건 내가 물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오. 제후에게 녹을 받고 있으니 그저 명을 받들어 역당을 토벌할밖에. 탁발 장군은 내 처지를 이해하겠지요. 국주께서 직접 사람을 보내 병부를 주고 만날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은 말을 얹지 말라는 암시요.”

손님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주인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요! 2만 병사와 군마를 내일 배정해 두겠소. 군량과 마초, 전차와 무기도 식 장군이 필요한 만큼 준비해 두지요. 다른 볼일이 없다면 이만 배웅해야 할 것 같소.”

“내일 다 준비가 되겠소?”

“솔직히 말씀드리겠소. 한 달 전 이미 국주께 지시를 받았소. 언제든 출정할 수 있도록 군마와 식량을 준비해 두라고 말이오.”

“잘됐구려!”

손님이 탁자를 탁, 치며 일어나 문을 나섰다.

그가 중당을 나서 밝은 달 아래에 섰을 때 등 뒤에서 주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무예가 이번에 황성을 매우 갑작스럽게 떠났소. 한데 어쩐지 국주께서는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던 듯하더군. 군 경험이 오래된 나와 장군도 영무예의 동향을 감지하지 못했는데 국주께서는 알고 계셨소. 누가 말해준 거요? 누군가가 몰래 이 일을 꾸미고 있었던 거요?”

“확인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선 긴말할 필요가 없소. 이번 근왕 출병 건은 나도 탁발 장군과 마찬가지로 전혀 몰랐소.”

손님은 곧장 문을 나갔다.

주인은 홀로 중당에 앉아 손님이 남긴 차를 보았다. 찻잔 가득한 차를 손님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 * *

1) 반원형의 패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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