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16화 (116/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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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난세의 사자 (5)

“그런 소식을 들으니 매우 기쁘구먼. 나는 그저 장인에 불과하니 자네들 같은 사람과 비교할 수는 없지. 쓸 줄 아는 건 망치뿐이고 칼과 검은 다루지 못하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네!”

하락인이 고개를 들어 익천첨을 보았다. 두 사람은 키 차이가 거의 두 배나 되었다. 하락인은 힘껏 손을 뻗어 익천첨의 어깨를 두드렸다. 익천첨은 깜짝 놀랐다. 하락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그 한기가 익천첨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땅의 불이 용솟음치듯 푸른 화염이 하늘로 휘말려 올라갔다. 푸른 화염 속 부러진 검은색 창의 형상이 솟구쳐 오르는 불길 속에서 격렬하게 흔들렸다.

“청백색은 순수한 불꽃의 색이지. 더 타들어 가면 투명해져. 돌의 불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네. 바로 지금이야!”

하락인이 나직하게 외쳤다.

그의 피부가 돌연 새파랗게 변했다. 얼음 속에서 동사한 사람 같았다. 익천첨이 넋을 놓은 동안 그는 성큼성큼 화염 속으로 들어갔다. 화염은 그에게 전혀 해를 입히지 못했다. 그의 피부에 닿은 화염은 즉시 소멸했다. 그는 타들어 가는 성진 가운데 부러진 창이 있는 방향으로 성큼 내달렸다.

“이런 한술(寒術)이 있었군.”

익천첨은 감탄했다.

화염에 에워싸인 하락인은 전력을 다해 질주했다. 그의 등장에 엎드려 절하던 영혼들이 기겁했다. 영혼들은 순간 당황하며 일제히 뒤로 물러났고 한데 모여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더니 돌연 무언가를 깨달은 듯 흉악하게 하락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형상은 길게 늘어지고 비틀렸다. 공중에서 긴 손톱을 가진 손이 나와 하락인의 머리를 향해 뻗어나갔다. 푸른 화염 속에 우뚝 서 있던 아락가가 돌연 사라지고 부러진 창이 우렁차고 처량하게 울었다.

영혼들은 하락인을 해치지 못했다. 그들의 형상은 하락인에게 접근하는 순간 전부 흩어졌다. 하락인은 부러진 창 옆으로 달려가 어느새 뜨겁게 달구어진 쇠망치를 잡았다. 그리고 두 동강난 철심을 한데 모아 암석에 대고 힘껏 망치로 쳤다.

그의 망치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망치질을 할 때마다 청백색 불꽃이 사방으로 튀며 날아갔다.

화염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익천첨은 밖에서 온 힘을 다해 망치질을 하는 하락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수염과 머리카락에 불이 붙었다가 순식간에 꺼졌다. 옷은 누렇게 말라갔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혼신을 다해 망치질을 할 뿐이었다.

금빛 형상들은 그를 에워싼 채 까치발을 하고서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녔다. 그들은 이따금 하락인의 등 뒤를 빼곡히 둘러싸기도 했고 이따금 그의 머리 위로 기어오르기도 했다. 여인의 모습을 닮은 형상 하나는 이상하리만치 유연하게 변해 뱀처럼 요염하게 하락인의 목을 휘감았다. 다른 형상들은 그의 뒤에서 날카로운 손톱을 내밀었다.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것들은 날아올라 공중에서 긴 이빨을 드러냈다!

익천첨은 가슴이 바짝 조여들었다. 눈앞의 모든 것이 화염 속 환상일 뿐이라고 거듭 상기했지만 여전히 얼음장 같은 손이 그의 심장을 틀어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하락인의 묵직한 망치질을 막지 못했다. 그는 망치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 내리치기를 거듭했다. 대지가 그의 망치질에 갈라지려 했다!

익천첨은 자신의 벗을 보며 묵묵히 눈을 감고 망치 소리만을 귀에 담았다.

익천첨은 바깥의 열기가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이었다. 눈꺼풀로도 막을 수 없던 빛과 열기가 돌연 사라졌다.

그는 긴장한 채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에서는 흰색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대지는 화염에 새카맣게 탔다. 금빛과 청백색 화염도 모두 사그라졌다. 불길은 처음 타오를 때보다도 훨씬 빠르게 꺼졌다. 아까 전의 모든 상황이 어디까지가 화염이었고 어디까지가 환상이었는지 익천첨 스스로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는 불이 났던 곳으로 달려가며 큰 소리로 벗의 이름을 외쳤다.

“마로강조! 마로강조!”

새카만 암석 뒤에서 깡마른 팔 하나가 천천히 올라왔다.

익천첨은 한달음에 달려갔다. 난쟁이 마로강조가 새카만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온몸은 숯처럼 새카맣게 탔고 옷도 전부 불길에 타버렸다. 두 눈만 영롱하게 빛났다.

익천첨은 그를 안아 들고 머리를 제 팔에 기대게 했다. 익천첨은 그의 콧김을 더듬어보고는 마음을 놓았다.

“그만 좀 만지게. 눈 뜨고 있잖아. 나 안 죽었네!”

하락인은 갈라진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직 살아 있어. 늙디늙은 하락인이 어디 그리 쉽게 죽을까!”

말을 마친 그는 웃었다. 하얗고 귀여운 치아는 전혀 나이 먹은 노인네 같지 않았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들어 올렸다. 새카만 창은 어느새 하나로 이어졌고 탁은으로 된 호랑이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익천첨은 검을 받아 들고 힘껏 돌려 보았다. 긴 창이 진동하며 위잉 벌 울음소리를 냈다.

“새로운 나무 창대만 달면 돼. 나머지는 우리 하락인이 있는 곳에선 아이들도 할 수 있는 일이지. 나 같은 늙은이까지는 필요 없어.”

하락인이 나직이 말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피곤하군. 나 좀 쉬겠네.”

“고맙네, 친구.”

익천첨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하락인이 다시 눈을 떴다.

“참, 아이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자네 공주님은 잘 지내나?”

익천첨은 순간 멍 했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모르겠네. 이젠 갈수록 공주 같지가 않아.”

“탁…… 탁…… 탁……….”

주사위가 작은 나무잔 속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투명하리만치 뽀얀 손이 나무잔을 탁 내려놓자 탁자는 돌연 조용해졌다. 주사위를 흔들던 소녀가 좌우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리따운 눈매를 한껏 위로 치켜 올리며 위풍당당하게 사람들을 흘겨보았다.

“결정 잘하고 정했으면 손 떼. 돈을 딸 운은 물론이거니와 돈 잃을 배짱도 있어야지. 큰 게 나오면 조상님 묏자리를 잘 써서 덕을 보는 것이고 작은 게 나오면 그저 재물복 없는 팔자를 탓할 밖에.”

소녀는 열대여섯 남짓해 보였지만 말본새는 도박판에서 수십 년 굴러먹은 노름꾼 같았다.

“다시 묻는다. 확실히 결정했어?”

이곳은 작은 도박장으로 도박판 사이마다 천으로 된 가림막이 쳐져 있고 안에는 작은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노름꾼들은 그 주위를 빙 둘러서 있고 그들 앞에는 저마다 금수가 쌓여 있었다. 불빛 아래로 금수가 누른빛을 띠며 사람들의 눈을 환하게 비추었다. 이 탁자를 에워싼 이들은 모두 젊은 군관으로 가장 나이 많은 이도 열일곱, 열여덟을 넘지 않았다. 절반은 새카만 어린갑을 입고 어깨에는 하당의 금국화 군 휘장을 늘어뜨렸다.

그중 하나는 옷과 장신구가 소박하지만 고상했다. 열대여섯 먹은 소년이었는데 새하얀 홑두루마기를 입었다. 옷깃에는 청색과 금색 실로 국화 넝쿨이 수놓아져 있었다. 소년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탁자 아래에서 소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우연… 우연…. 웬만큼 이겼으면 이제 그만해.”

우연은 소년의 손을 우렁찬 소리가 날 정도로 때렸다.

“싫어! 싫다고! 오늘 저 자식들 주머니 탈탈 털어주고 갈 거야! 어디 맘껏 날뛰어 보라지! 내가 나서지 않으면 저치들은 남회성 도박판에 도리도 없는 줄 알걸?”

탁자의 사람은 양측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청년 넷이었는데 모두 하당의 젊은 군관으로 방기소, 엽정홍, 뇌운정가, 팽련운이었다. 그들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다른 한쪽은 셋이었다. 여귀진과 희야는 머슴처럼 우연의 등 뒤에 서서 눈이 휘둥그레진 채 소녀가 능숙하게 잔을 흔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탁자의 금수 대부분이 우연의 앞에 쌓여 있었다. 우연은 코를 찡그리며 코끝을 살짝 들어 올리고는 맞은편의 네 사람에게 위세를 부렸다.

원래 도박하러 온 것은 희야였다. 오늘 대류영에서 훈련이 있었는데 방기소 일행은 미리 짜고 희야를 도박판에 불러들여 겨루게 만들고 희야가 질 수밖에 없는 판을 만들려 했다. 그들의 계획은 훌륭했다. 희야는 도박에 문외한이었다. 규칙은커녕 주사위 숫자도 제대로 계산할 줄 몰랐기에 어떤 판에서든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으니 희야는 빈털터리라 도박판에 금수 한 냥도 걸기 힘들다는 것. 희야는 대꾸도 않고 뒤돌아 가버렸다. 희야를 비웃어주려 했던 방기소는 뜻대로 되지 않자 언짢았다. 그는 말을 타고 희야의 뒤를 쫓아가며 연신 놀려대다가 맞은편에서 오던 우연과 여귀진을 마주쳤다.

남회에 온 지 오래된 여귀진은 궁 출입에 제약을 받지 않았다. 원래는 해가 지면 희야, 우연과 함께 강물에 등롱 떠내려 보내는 것을 구경하러 강가에 가려고 했다. 그래서 일찌감치 선생에게 오늘 숙제를 제출하고 궁을 나와 우연을 불러 희야를 만나러 왔다. 그런데 방기소의 조롱에 얼굴이 굳은 우연은 두말없이 여귀진에게 돈을 빌렸다. 여귀진은 수중에 돈이 없지도 않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성격이라 즉시 돈을 꺼내 두 손으로 우연에게 건넸다.

우연은 희야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걱정 마. 한판 하러 가자. 이 누님이 있는 한 이깟 양아치들은 걱정할 것 없어!”

어리둥절한 희야와 여귀진은 서로를 쳐다보고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자신만만한 우연을 무력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우연은 큭큭 웃을 뿐이었다. 거들먹거림이나 위세 따위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그저 남을 골리는 데 성공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희야는 돈을 거는 데도 허둥지둥했다. 눈 깜짝할 새에 탁자의 금수 대부분이 상대 쪽으로 넘어갔고 희야 쪽에는 드문드문 너덧 냥의 금수만 남았다. 여귀진은 한쪽에서 보면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방기소는 한 손으로 잔을 흔들며 한 손으로 돈을 걸었다. 그는 뻔뻔하게 웃으며 우연을 쳐다보았다.

우연은 버럭 성을 내며 잔을 빼앗았다. 그리고 희야에게 제 뒤에서 돈을 걸라고 명령했다. 신기하게도 우연이 나서자 판세가 즉시 바뀌었다. 우연은 희야에게 큰 데 걸지 작은 데 걸지도 말해 주지 않았다. 희야는 매번 망설이며 돈을 걸 뿐이었다. 한데 열어보면 십중팔구는 희야의 승리였다. 희야는 연달아 승리했고 점점 기세등등해졌다. 금수도 위풍당당하게 턱 내려놓았다. 방기소 일행은 자신들 앞에 있던 돈이 재차 되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돈을 꺼내 모은 이들은 가장 노름에 능한 방기소에게 다시 한번 돈을 걸었다.

그때 우연이 탁자에 잔을 내려놓았다. 희야는 모든 금수를 ‘크다’에 걸었다. 방기소는 선택의 여지 없이 ‘적다’였다.

돈을 건 두 사람은 1척 떨어진 거리에서 시뻘게진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제는 운을 건 한 판이었다. 이렇다 할 전술 따위는 없었다. 이기는 쪽은 계속 이겼고 지고 있던 방기소 일행은 정말 바지까지 벗어야 할 판이었다.

“정했어!”

희야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나도 정했어!”

방기소가 이를 갈았다. 이들 중에 방기소의 가업이 가장 컸고 판돈도 가장 많이 냈다. 그러나 지금은 내리 져서 주머니가 텅 비었다. 제 아비의 총애를 받는 그였지만 이번에는 집의 돈을 훔쳐 나온 것이었기에 땡전 한 푼 없이 돌아간다면 좋은 말로를 보지 못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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