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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난세의 사자 (4)
하락인이 익천첨의 손을 비틀어 떼고는 불쾌해하며 옷깃을 정돈했다.
“알겠네, 알겠어. 난쟁이 친구 놀라게 좀 하지 말게. 마목이두사과리아를 다시금 절단할 수 있는 무기는 어쩌면 아직 세상에 안 나타났을지도…. 서절이근두랍공을 만난 게 아니라면 말이야.”
익천첨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부러진 창을 보여 주었을 때 자네는 서절이근두랍공이 깨어났다는 걸 알았겠지?”
“그걸 말이라고. 이 세상에서 맹호의 이빨을 부러뜨릴 또 다른 무기는 떠올릴 수가 없는걸. 하지만 자네가 말을 하지 않으니 대놓고 묻기가 어려웠지.”
하락인이 익천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익살스러워 보이는 하락인의 눈빛은 지금 산처럼 묵직했다.
“그럼 이제 묻겠네. 누군가가 쇄혼룡의 검을 깨운 것이 맞는가?”
익천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자네인가?”
익천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네.”
“아유. 천만다행이군. 그럼 야단날 정도의 상황은 아니네.”
하락인은 홀가분하게 말했다.
“무슨 뜻이지?”
익천첨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네 같은 늙은이가 천구의 대종주가 된다는 건 절대 믿을 수 없다는 소리지.”
익천첨이 쓴웃음을 지었다.
“검을 뽑은 사람을 만나볼 수 있을까?”
하락인은 더는 농담하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익천첨이 고개를 저었다.
“검을 뽑긴 했으나 그가 꼭 천구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는 없네. 역사상 검을 뽑았어도 천구를 이어받지 못한 사람은 적지 않으니.”
“그렇지. 이 검을 뽑은 것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도 아니고. 내가 그 사람의 옆에 있었다면 말렸을 것이네.”
“자네는 검이 뽑히길 원하지 않나?”
익천첨이 물었다.
“쇄혼룡의 검이 아닌가.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검일지도 몰라. 검은 피가 응결되어 나타나는 검이니까. 자네는 어떤가? 천무자께서는 검이 깨어나기를 바랐는가?”
하락인이 물었다.
“모르겠네.”
익천첨은 잠시 침음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성물이자 마기이지. 검이지만 양날이라 스스로를 해칠 수도 있어. 그러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적에게 빼앗기느니 내 손에 쥐는 게 낫네.”
“우족이지만 천무자 고막은 줄곧 긍지에 찬 사자였지. 사자는 절대 제 송곳니를 남에게 내 주지 않아.”
하락인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가끔 생각하네. 자네와 유장길이야말로 같은 부류라고.”
익천첨은 잠시 묵묵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준비는 다 됐나? 그럼 시작하지.”
그가 몸을 일으켜 달빛 속으로 걸어 나갔다. 색색의 암석들이 거대한 은빛 성진(星陣) 위에서 수백 장 길이로 이어져 있었다. 흡사 별이 지나가는 궤도 같았다. 성진의 중앙에는 부러진 창이 비스듬하게 흙더미에 꽂혀 있었다. 이미 목재 창대는 빼냈고 거의 호랑이 형태만 남은 창날과 부러진 철심, 그리고 나머지 철심 반 토막이 한쪽의 푸른색 바위에 평평하게 놓여 있었다. 새카만 망치도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락인이 일어나서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의 진신께 고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진신을 저버린 지 오래된 줄 알았는데?”
익천첨이 말했다.
“하지만 내 기술은 그녀의 계시를 받았으니 내 마음과 영혼도 그녀에게 구원을 받아야 하지.”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은 하락인이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신이시여. 대지의 혼과 불을 하사하심에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탄광과도 같은 힘이 대지 깊은 곳에서 타올라 붉은색 암장(巖漿)을 강물로 변하게 해 주소서. 진신의 힘과 의지를 받들어 앞으로 나아가며 횃불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리리.”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하락어로 성가(聖歌)를 읊었다. 그의 목소리는 돌연 나직해졌다가 높아졌다가 했다. 난쟁이 종족이 모닥불을 에워싸고 춤을 추며 북을 두드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화염 속에서 그들의 새로운 작품은 타들어 갔으나 태고 이래로 신이 남긴 지식이 응집되었다.
“하락인으로 태어났으니 평생 하락인일세. 그것이 자네의 핏줄이야. 더는 버렸느니 하는 우스갯소리는 하지 말게.”
익천첨이 탄식했다. 그는 키가 너무 커서 몸을 숙여야만 하락인 친구의 어깨를 두드릴 수 있었다.
“내가 어디를 떠돌아다니든 청주의 푸른 숲에 속해 있는 것처럼 말이야.”
하락인이 일어섰다. 그는 가슴 앞의 주머니에서 새카만 끌을 꺼내 온 힘을 다해 은빛 도안의 가장자리를 파냈다. 끌과 지면이 부딪치며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은빛 가루는 유황처럼 찬란한 불꽃을 터트렸다. 불기운이 은빛 선의 궤적을 따라 빠르게 나아갔다. 불이 붙은 곳에는 휘황찬란한 불꽃이 튀었고 빛살이 비처럼 쏟아져 나왔다.
바닥 전체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뜨거운 바람이 성진 중앙에서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익천첨과 하락인은 사나운 불길의 기세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암석 지면이 뜨겁게 변했고 후끈한 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각양각색의 돌들이 곧 쪼개지려는 듯 울림이 일었다.
익천첨은 누군가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는 뭉게뭉게 피어나는 증기 속을 보았다. 가물가물 자취 없는 금빛 형상들이 보였다.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오래된 창을 둘러싼 채 노래하고 춤을 추며 하늘을 향해 성가를 낭송했다. 그러자 창에서 푸른색 화염이 곧게 솟아나더니 곧게 하늘을 향했다. 한 자루의 거대한 청색 검을 방불케 했다.
익천첨은 애써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화염 무늬 속, 형상들은 있는 듯 없는 듯 했고 노랫소리는 수천수만 리 밖에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저 검에 죽임을 당한 자들이네. 그들의 영혼 조각이 소생해 흉기를 기리는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는 것이야. 하락에서는 가장 비통한 노래 중 하나로 여긴다네. 우리는 무기를 주조하는 날 불더미를 둘러싸고 이 노래를 부르지. 이런 무기를 만든 스스로의 죄를 참회하는 것이네.”
하락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높고 청예한 여인의 목소리가 우뚝 솟아났다. 마치 은빛 선이 공중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흐릿한 청색 형상이 푸른 화염 속에서 몸을 쭉 폈다. 여인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에워싼 채 노래하며 춤추는 형상들을 굽어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몸이 아득하게 피어오르는 증기 속에서 흐릿하게 변했다. 그녀가 손을 뻗었다. 아련하게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듯했다. 형상들은 그녀를 향해 경건하게 무릎을 꿇었다.
“저건 뭐지?”
익천첨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환상의 경지.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다 똑같지는 않아.”
하락인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네 눈에 보이는 모습은 주조의 여인 같군. 하락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락가 중 하나로 맹호의 이빨에 봉인된 첫 번째 영혼이지.”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군.”
익천첨이 중얼중얼 말했다.
“비통하기 때문이라네. 가장 위대한 창조물과 가장 흉악한 무기가 모두 그녀의 손에서 나왔으니까.”
하락인이 한숨을 내쉬더니 분개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하락인의 마음속에서는 모두 똑같은 성물인데 이게 다 난폭한 자네들 천구에서 기어코 빼앗아가 이리된 게 아닌가.”
익천첨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하게. 한창 젊은이도 아니고 말이야. 친애하는 마로강조, 그런 우스갯소리는 관두게. 자네가 바로 그 천구일세.”
“암, 그렇지! 한데 그게 뭐? 내가 천구인 것은 형제자매가 없는 내게 어머니가 자기 반지를 물려주었기 때문이라고. 등 떠밀린 거란 말이네!”
하락인의 말투는 더없이 진지했다.
시선을 맞춘 두 사람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덩치 큰 새. 자네가 궁금해할지도 모를 일이 있네.”
하락인이 말문을 열었다.
“뭔데?”
익천첨은 친구의 말속에서 정중함을 느꼈다.
“여덟 달쯤 전에 하락의 사절단이 남회에 왔었네. 내게서 사강의 쇳물 조제법을 알아갔지.”
“사강?”
익천첨의 새하얀 눈썹이 꿈틀했다.
“산호금과 장미탁은처럼 극도로 특수한 금속이지. 하락의 성전(聖典)인 <혼인서(魂印書)>에 나오는 비밀 재료 중 하나일세. 나중에 <혼인서>가 금서로 지정되면서 그 안의 조제법과 기법들은 극소수만 인정되었고 그 또한 공표된 최고의 기술을 가진 하락인만 알 수 있도록 허락되었어. 사강이 그중 하나이네. 하지만 사강은 제조하기가 정말 어렵네. 사강을 얻더라도 대량으로 반복 주조해야만 갑옷 조각으로 사용할 수 있지. 그래서 북망산의 하락족 중에서도 이런 기법은 아주 드물게 전해졌네.”
“그러니까… 이 금속이 갑옷에 쓰인다는 말인가?”
하락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재료지. 그러나 치명적인 결점이 있네.”
“뭔가?”
“반복해 실험을 해 보니 사강이 2천 겹 이상 겹쳐져야만 정교한 무기에 찔려도 완벽히 막아낼 수 있어. 두께가 충분하지 않은 사강 갑옷과 투구는 한마디로 쓰레기지. 그러나 일단 두께가 충분하면 거의 모든 무기의 공격을 막을 수 있네.”
하락인이 익천첨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갑옷의 사강이 2천 겹이 넘으면 두께가 대략 손가락 하나 반만 하고 전체 갑주(甲冑)의 무게가 최소 80근이 나간다네. 내가 아는 갑옷 중에 사강으로 만든 것은 딱 하나야.”
“철부도…….”
익천첨은 나직이 말하며 애써 침착해 보이려 했다.
“맞네. 그들이 사강 쇳물의 조제법을 얻고 철의 짐승 같은 기병이 세상에 다시 나타났지. 누가 이 모든 것을 주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풍염 황제가 완전히 섬멸해 버린 철부도가 아직 잊히지 않았다네!”
“자네가 알려주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하락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가 틀렸네, 고막. 내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내가 만난 이는 고향에서 온 사자였네. 내 조제법이 없더라도 그들에게는 충분히 우수한 기술자들이 있으니 1년 안에 기준에 맞는 사강 쇳물을 만들어냈을 거야. 그들이 이 일을 하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은 이상 내가 막을 도리는 없네.”
“하락도… 이 전쟁에 휘말리겠는가?”
익천첨이 침음했다.
“우족은?”
“아마도 피할 수 없겠지. 한주 초원을 지나는 검은 깃발을 든 사자가 어찌 청주의 숲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벌써 한주에 갔나?”
하락인이 깜짝 놀랐다.
“이미 자네 고향에도 갔을 걸세.”
익천첨의 볼 선이 칼날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참. 마로강조. 자네는 왜 사절단과 함께 뇌안산으로 돌아가지 않았나? 자네는 전쟁을 싫어하잖아. 자네의 지혜와 솜씨면 ‘부환(夫環)’으로 봉해질 수도 있지 않은가!”
마로강조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해 줄 리 없네. 그들은 나를 죽일 거야. 자네가 지금 사달극 성방으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지.”
익천첨은 입을 다물었다.
“익천첨. 천구에게 미래가 있겠는가?”
하락인이 물음에 익천첨은 느릿하게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의 깃발이 다시 동륙 대지에 휘날릴 걸세. 벌써 북극성의 빛이 내 어깨에 비추는 것을 보았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