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1장. 난세의 사자 (3)
“저도 서한을 내리면 될 일이라 생각됩니다만 질책하는 것은 좋지 않을 듯합니다. 소신이 보기에 영무예는 폐하를 죽일 의도가 없습니다. 그저 이 기회를 빌려 제후들을 협박하려는 것이지요. 폐하께서 부드러운 말로 타일러 폐하께 공경을 표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또 한 신하가 말했다.
황제가 화가 나 얼굴을 붉히려는데 또 한 신하가 나왔다.
“소신 생각도 그러합니다. 영무예가 입궁한 것은 황성에서 제일 높은 곳인 태청각의 명성을 동경해서일 뿐이라 들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입궁해 전망만 보았을 뿐 다른 불충한 마음은 없었습니다. 영무예는 남만의 촌사람이니 폐하께서 아량과 은총을 베푸시어 표면적으로라도 폐하께 공경을 표하게 하시면 따를 것입니다.”
황제는 더욱 분노했다.
또 한 신하가 나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폐하.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소신들의 말이 듣기에는 거슬릴 수 있으나 현재 상황이 그러합니다.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자가 영무예이니 그저 황실의 명예를 대가로 약간의 존중만 얻으시면 됩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근왕병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황제는 잠시 침묵하더니 힘없이 황좌에 주저앉고 말았다.
“근왕병이 오기는 오는 것인가…….”
황급한 발소리와 함께 내감 하나가 허둥지둥 달려 들어왔다.
“영… 영무예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막을 수가 없어요!”
황제가 놀라 자리를 떠났다. 그는 거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편전 뒤로 물러났다. 신하들도 질겁했다. 도살장에 갇힌 돼지와 양이 우왕좌왕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내감이 도착한 직후 더욱 묵직한 발걸음이 뒤쫓아 왔다. 누군가가 벌컥 동편전 입구의 발을 젖혔다. 넓게 스며드는 햇살 속에서 갑옷을 걸친 우람한 체구의 인영이 성큼 편전으로 들어왔다. 그는 입구에 선 채 멀찍이 떨어져 있는 황제를 싸늘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짙은 갈색으로 타오르는 숯처럼 환하게 빛났다.
“리… 리공 전하 오셨습니까.”
담이 제일 큰 신하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이따위 짓은 다들 그만두시오. 예서 내게 어찌 대응할지 논의할 필요 없소. 이곳에서 조회를 여는 것은 진즉 알고 있었소. 나는 여러분이 논의하는 일들에 관심 없소. 그저 오늘 나를 비롯해 적려와 뇌기 모든 군마가 천계성을 떠난다고 말하러 온 거요.”
천계의 수호사 리국공 영무예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또 한 가지 말해 주고 싶군. 나는 이 시시한 성에 흥미 없소. 내가 이 성을 취한 것은 단지 천하를 얻기 위한 발판에 불과했소! 나는 이 성이 없이도 천하를 얻을 수 있소. 그러니 버리고자 한다면 버리면 그만이오.”
영무예가 몸을 돌려 동편전을 나갔다.
동편전에는 어안이 벙벙해진 사람들만이 남았다. 한참 뒤, 황제는 몸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영무예는 그가 들이닥쳤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천계를 떠났다.
그는 황제 앞에서 대놓고 무례하게 자신이 천하를 쟁취할 것이라 선언하고 태청궁을 떠났다. 궁문 밖에 숯불처럼 붉은 준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5만 정예병의 리국 군사들이 그 뒤를 이었다.
황성의 대신들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던 잔악무도한 군대는 하루 만에 천계성에서 철수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리군이 주둔했던 숙영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개미 한 마리 없이 텅 빈 숙영지를 보고도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표면적으로 보기에 영무예는 그저 자신의 최측근인 지장(智將) 사현과 태청각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나 군신들은 그들이 황성에 흥미도 떨어졌고 고국이 동요하고 있으니 돌아갈 생각을 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학자들 중에 누군가는 영무예가 근육만 발달한 무장에 불과하다고 비웃었다. 그는 황성이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위치인지 전혀 모르며 힘 있는 사내가 여인을 얻고자 하듯 황성을 손에 넣으려 했고 손에 넣자 흥미를 잃고 돌아서 떠나 버렸다고 말이다. 영무예는 자신의 리국에 지나치게 연연했는데 이런 고향에 대한 의존은 그가 병법과 책략에 뛰어난 지도자가 아니며 포기를 모르고 시국을 판단하지 못하는 자임을 보여 준다. 영무예는 계속 황성을 점거하고 황제를 쥐락펴락하며 천계성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아 천하를 토벌할 수도 있었다. 이런 관점도 일부 역사학자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영무예와 사현이 나라도, 부모도, 집도 없는 사람들이라 했다. 영무예는 친형제를 죽인 자이고 사현은 애초에 리국 사람이 아니므로 이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야생마가 알을 품는 것과 같다고 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야생마는 드넓은 들판을 질주하도록 타고난 동물로 그들은 한 번 길을 나서면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영원히 진실을 알 수 없었다. 역사상 기괴하기로 이름난 이들 군신이 고국에 돌아가기로 한 이유는 오래도록 전쟁을 하지 않아서였다. 황성에서는 군마가 질주할 수 없어 살이 너무 많이 쪘다. 무기도 자주 사용하지 않으니 항상 날카롭게 갈고 기름을 발라 손질해 주어야 했다. 자신들이 서서히 늙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전쟁을 하루 멈추면 타국을 정복할 기회가 그만큼 줄어들기에 더는 기회를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갑옷을 걸치고 말에 올라 성 중의 성인 천계를 떠난 것이다.
이 놀라운 소식을 가진 전서구가 사흘 만에 초위국 공작의 궁전, 재궁 상공에 도착했다. 그러나 전서구가 가지고 온 화피지 두루마리는 초위국 공작의 손에 먼저 전해지지 않고 그것을 오래 기다려온 다른 이에게 전해졌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푸른 옷을 입은 참모가 잰걸음으로 다가와 황성에서 온 소식을 건넸다. 소식을 기다렸던 이는 등불 아래에서 천천히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는 연달아 세 번을 읽으며 그 사실을 확인했다.
“영무예가 벌써 황성을 떠나 정남쪽으로 진군했으니 이미 상양관에 도착했겠군. 황성 무리가 리국 내부 반란의 여파로 영무예가 어떻게 움직일지 정확히 예견했네. 영무예 같은 맹주의 마음을 정확히 예측하다니 황성의 야심만만한 이들 중에 정말 천재가 있나 보군.”
하얀 옷을 입은 장군은 등불 아래에서 감탄했으나 얼굴은 무표정했다.
“출정입니까? 장군!”
참모가 마음속 치미는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물었다.
“당연하지. 우리가 그리하는 것이 황성 야심가들의 뜻대로 되는 일이라 해도 현재 급선무는 수사자 영무예를 처리하는 것이다. 그가 살아있는 한 황성의 700년 역사는 그대로 끝이니.”
“제가 가서 즉시 출발을 준비하라 명하겠습니다. 군수품은 이미 채비가 끝났습니다!”
“아니다.”
하얀 옷을 입은 장군이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내 직접 명을 내리겠다.”
때는 윤 성제 3년 7월이었다. 황성을 떠난 영무예는 왕역(王域)과 리국 사이의 통로를 관통하려 3만 5천의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쇄하산 아래를 지나 동남쪽으로 빠르게 진군하고 있었다. 왕역과 리국은 인접해 있지 않았다. 영무예의 행군도 상으로는 반드시 초위국의 영지를 지나야 리국의 요충지인 창란도를 밟을 수 있고 그래야 고국으로 돌아갈 길을 찾았다고 할 수 있었다. 초위국은 천하가 다 아는 황실의 충신이다. 영무예가 병력을 일으키기 전 초위국의 3만 대군은 이미 건수강의 군함에서 한 달 넘게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물살이 가장 좋은 계절이었다. 건수강은 정예 장비를 갖춘 용맹한 병사들을 손쉽게 황성 입구인 ‘동륙 제2의 험준한 요충지’ 상양관 아래로 데려다 놓을 것이었다.
계획은 이미 여러 차례 확인했다. 여전히 백씨 황족을 구하려는 제후들은 이곳에서 리국 대군의 걸음을 붙잡고 영원히 머물게 할 것이다. 시체로든, 영혼으로든.
그해, 섭우열왕은 열일곱 살이었다.
남회성 교외, 밤하늘 아래 산의 모습은 뱀처럼 구불구불했다.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별하늘이 산골짜기의 평탄한 공터를 비추고 있었다. 주위의 산봉우리에서 내려다보면 속이 깊은 냄비처럼 생긴 골짜기였다.
작은 인영이 달빛 아래에서 열심히 돌을 날랐다. 그는 거대한 붉은색 돌을 옮겼는데 몇 걸음마다 한 번씩 멈추어 숨을 골라야 했다. 골짜기 한가운데에는 각양각색의 돌이 흩어져 있었다. 돌은 은색 가루로 그린 거대한 도안을 누르고 있었는데 공중에 있는 사람만이 거대한 도형의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후리후리한 노인은 멀찍이 서서 한마디도 말도 없이 왜소한 사내가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왜소한 사내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지도 않고 버티고 있을 거면 좀 도와주지그래? 난쟁이 친구가 헐떡거리면서 돌을 옮기는 걸 지켜만 보고 있는 게 고귀한 우족이 할 일인가?”
노인이 입을 뗐다.
“도와 달라고 하지도 않았잖는가? 하락족은 자신의 작품을 혼자 완성하는 것을 더없는 영예로 여기는 줄 알았는데.”
“나는 인간들 틈에서 살며 이익에 마음이 검게 그을려 진신(真神)의 길을 저버린 하락인일세. 그러니 도움이 필요하다고!”
“알았네.”
노인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둘은 함께 분발해 돌을 한 덩이, 또 한 덩이 날랐다. 하락인은 이따금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고 노인은 그의 지시에 따라 은색 선이 교차하는 어느 지점에 돌을 옮겨 놓았다.
“이봐! 덩치 큰 새! 푸른색 돌이 중심에서 벗어났잖아! 정확하게 옮겨야 한다니까!”
하락인이 재차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덩치 큰 새라고 부르지 말랬지!”
“알겠네. 위대하신 천무자, 고막 사달극 전하. 푸른색 돌을 밀라 방향으로 7척 이동해 주십시오.”
하락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익천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계속 난쟁이의 지시에 따랐다.
거대한 진법에 긴 시간을 소모한 두 사람은 마침내 한데 앉아 휴식을 취했다. 익천첨도 살짝 숨을 헐떡였다. 그는 우족 중에서도 드물게 강력한 힘을 가진 무사였다. 하지만 자신처럼 고귀한 인물이 이처럼 돌을 나르는 막노동을 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하락인에게 굼뜨다며 비웃음까지 당했다.
“하락의 진법에 왜 이리 많은 돌이 필요한지 생각 중이네. 난 줄곧 자네들의 것은 다 작고 정교하다고 생각했거든.”
익천첨이 소매로 이마에 살짝 배어 나온 땀을 닦으며 말을 꺼냈다.
“모르면 입 다물게. 키가 4척밖에 안 되는 하락인이 이런 일을 하는 게 뭐 쉬운 줄 아는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우리도 이런 진법은 쓰지 않아.”
하락인이 한숨을 뱉었다. 그는 익천첨의 등에 기대 쉬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휘엽(輝燁) 동굴의 성일천화(圣日天火)가 없어서 돌 속에 있는 불의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 이는 완전한 성분술(星焚術)이 아니어서 약간의 흠이 남을 수도 있네.”
익천첨의 안색이 살짝 변하더니 몸을 돌려 하락인의 옷깃을 낚아챘다.
“장난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이 성물을 수리하러 자네를 찾아온 것은 절대 이 성물에 어떤 손상도 생겨서는 안 되기 때문일세! 완전한 마목이두사과리아가 나와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