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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난세의 사자 (2)
윤 성제 3년 7월, 늦여름.
황성, 천계성.
깊은 밤. 우뚝 솟은 태청각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반듯이 드러누운 거인처럼 어둠 속에서 깊이 잠들어 있고 멀리 골목에서만 어렴풋하게 불빛이 새어 나왔다. 밤바람이 살짝 서늘했다. 갑옷을 걸친 사람이 태청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붉은색 전포(戰袍)가 느릿하게 펄럭였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너른 도포에 넓은 허리띠를 한 사내가 한 계단씩 올라오더니 갑옷을 걸친 사람의 뒤에서 장읍을 올리며 예를 갖추었다.
“백윤이 죽기 전에 이곳에서 제 도시를 바라보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고 하더군.”
갑옷을 걸친 사람이 무심하게 말했다.
“이곳이 천계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합니다. 태청각이라고는 하나 사실상 탑 같지요.”
너른 도포를 입은 사내도 무심하게 대답했다.
“참으로 고요하군.”
“어찌 고요하겠습니까?”
너른 도포의 사내가 웃었다. 다정한 미소였지만 거침없는 조소가 어려 있었다.
“이곳은 세상 권력의 중심인 천계입니다. 소리 없는 곳에도 격렬한 천둥은 들끓지요. 천계는 잠든 사자입니다. 잠에서 깨면 사람을 잡아먹을 것입니다.”
“밤이 깊었는데 무슨 일인가?”
갑옷을 걸친 사내는 한담을 나눌 생각이 없었다.
“큰일이 아니면 왕야께서 사색에 잠겨 계실 때 방해해선 안 된다는 규칙은 저, 사현도 잘 알고 있습니다. 리국의 밀정이 보고해 왔습니다. 구원성의 형세가 일촉즉발이라 합니다. 묵리현후가 스스로를 리공이라 칭할 준비를 하나 봅니다.”
갑옷을 걸친 사내가 돌아섰다. 음산한 눈빛의 짙은 갈색 눈동자는 타오르는 숯처럼 몹시도 밝았다.
“내 조카가 황제에게 충성하려나 보군. 리국의 백성을 이끌고 황실을 구하러 황성에 와서 제 백부를 죽이고 황제께 수급(首級)을 바치려는 것인가?”
“네.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그는 장공자가 나라를 다스릴 힘이 없으며 우매하고 잔인하다는 것. 또한 올봄 각지의 굶주린 백성들 다수가 아사했다는 것을 핑계로 대면서 장공자를 퇴위시키고 정권을 백성에게 돌려줄 준비를 하고 있다더군요.”
갑옷을 걸친 사내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고 내 아들은 그저 리국의 세자일 뿐이다. 이 세상에 세자의 퇴위라는 말이 어디 있더냐? 정권도 백성에게 돌려준다는 것인가 아니면 내 귀여운 조카님께서 민중을 등에 업고 궁에 들어가 구원성의 주인이 되겠다는 것인가?”
“어쩌겠습니까. 각지의 청원이 실상 그러한 것을요. 묵리현후의 말도 맞습니다. 장공자가 나라를 다스릴 재목이 못 된다는 것은 왕야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갑옷을 걸친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능한 놈인 건 알지만 어찌 되었든 내 아들이네. 이 정도로 쓸모없어졌다고는 믿고 싶지 않군.”
“매우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왕야, 하루빨리 결단을 내리십시오.”
너른 도포를 입은 사내가 길게 절을 올렸다.
“사현. 어찌해야겠는가?”
“왕야의 군기가 구원성 꼭대기에 다시 꽂힌다면 감히 누구도 정권 반납이니 퇴위니 하는 말을 입에 담지 못할 것입니다.”
갑옷을 걸친 사내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한참 뒤,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사현. 우리가 황성에 갇힌 지 여섯 해가 다 되어 가지?”
“네. 한 달 후면 여섯 해가 됩니다. 6년 전 제가 왕야와 함께 군기를 천계성 꼭대기에 꽂았었지요. 저는 그 순간을 평생 못 잊을 겁니다.”
“황성을 얻고 제후들을 크게 이겼으나 우리에 갇힌 짐승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니.”
갑옷을 걸친 사내가 “허허.” 냉소하며 말을 이었다.
“내 이번에 종군 이래 가장 졸렬한 수를 두어 세간의 비웃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군.”
“5천 뇌기병의 기습과 쇄하산 혈전의 대승. 이처럼 후대에 찬란하게 빛날 전적을 감히 누가 비웃겠습니까. 그러나 이번 수를 조금 급하게 두긴 하셨습니다. 지금의 형세로는 황성을 계속 점거해 봐야 크게 득 될 것이 없습니다. 황제를 우리 손바닥 안에 두었으나 제후들이 황제에게 반드시 충성한다고 할 수 없으니 수중의 인질이 별 쓸모가 없지요. 제후국의 대군이 우리와 리국을 갈라놓은 터라 우리는 천계성의 자원으로 자생해야 하는데 최근 병력의 보충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묵리현후가 일을 벌인 이유도 꼭 제후들이 뒤에서 교사하고 선동해서라고 할 수만도 없습니다. 왕야께서 구원성에 걸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고국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너른 도포를 입은 사내가 재차 장읍을 올렸다.
“다시 한번 왕야께 속히 결단을 내려주실 것을 청하옵니다.”
“내 조카가 나를 원망하는 것이겠지? 그러니 저리 쉽게 선동되었을 게야.”
“왕야께서 그의 아비이자 왕야의 친아우를 죽이셨으니 원망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나는 그 녀석을 가르치고 키우면서 불공평하게 대한 적이 없네. 그러나 그의 아비는 내 목에 칼을 겨누었지. 내가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었겠나? 설마 내가 형제간의 정을 생각해 녀석의 아비가 내 목을 베게 두었어야 했나? 조카가 그런 백부의 인의에 감동해 내 기일에 엉엉 울며 원혼을 위로하게 두었어야 해?”
너른 도포를 입은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왕야 같은 분이 이리 불평하시면 안 됩니다. 세상 사람은 왕야가 친아우를 죽였다는 것만 기억합니다. 그들은 당시 묵리현후가 칼을 들고 왕야를 낭떠러지로 몰아간 것은 이미 잊었습니다. 왕야께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왕야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묵리현후도 예외는 아니지요. 이것이 패왕(霸王)으로서 왕야의 운명입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미련하군.”
갑옷을 걸친 사내의 싸늘한 말에 너른 도포를 입은 사내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다. 미소는 음산했으나 눈빛은 온화했다.
“끝내 이 도시를 포기하게 되었군요. 아쉬우십니까?”
사내가 손을 내둘러 먼 곳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모든 도시의 성인 천계가 아닙니까. 여인에 비유하자면 천하제일의 미인이지요. 이곳의 누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구름처럼 많고 미녀들이 줄을 잇지요. 부귀하기로 치면 완주의 남회성도 비할 바가 못 될 겁니다. 우리는 왔지만 결국엔 떠나야 하고요.”
“맞네. 조금 아쉽군.”
갑옷을 입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인도 평생 곁에 있어 주기는 어렵지. 더구나 이 도시에서 나는 비단이 아닌 갑옷을 걸친 사람일세. 이 도시의 땅 한 뼘, 한 뼘이 모두 우리 리국 자제들의 피로 얻은 것임을 나는 알고 있네. 피로 물든 이 땅을 여인의 가슴으로 여기고 눌러앉을 정도는 아니야.”
돌연 몸을 돌린 사내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말을 덧붙였다.
“자네 생각대로 삼군에 명하게. 준비를 마치면 내게 보고하고!”
“명 받들겠습니다!”
너른 도포를 입은 사내, 리국 뇌기군 좌도통 사현이 널따란 도포를 단번에 풀어헤치더니 보지도 않고 바닥에 내버린 채 영무예를 뒤따랐다. 도포 아래 입고 있던 은빛 어린갑이 달빛 아래 섬뜩하게 빛났다.
지금 이곳은 온통 갑옷을 걸치고 허리에 칼을 찬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였다.
시녀가 황금으로 수놓아 짠 황포를 올렸다. 대윤의 황제, 후대에 성제라 불리는 백회가 비(妃)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 올라 황포를 걸쳤다.
이곳은 태청궁의 동 편전으로 창 너머 우뚝 솟은 태청각이 보였다. 아침 햇살은 따스하고 부드러웠으나 편전 안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영무예가 천계성의 주인이 된 후로 황제는 조회를 여는 일이 거의 드물었다. 백회가 역대 선황제들과 비교해 꼭 아둔하고 무능한 황제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도 조정에서 위엄을 펼쳐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엄숙한 사자 영무예가 한쪽에 서 있으면 황제가 무슨 말을 해도 온순한 양이 끙끙거리는 것에 불과했다. 사자가 순한 양을 먹어치우지 않은 것은 그가 아직 굶주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실 대신들은 상의 끝에 황제에게 조회를 적게 열 것을 권했다. 일이 생기면 이 편전에서 논의했다. 날이 밝기 전에 북궁문에서 내감들이 대신들을 몰래 들여왔고 회의를 마치면 이들은 당직한 관원들과 함께 퇴청하며 영무예의 이목을 피했다.
이런 울분 가득한 작은 조정이 어느새 2년째 지속되고 있었다. 황제 백회가 다스리는 땅도 이 편전뿐인 셈이었다.
“아이고. 등이 꺾일 것 같군. 어젯밤에 바람을 맞아서 그런가.”
황제가 나직하게 탄식하며 억지로 몸을 꼿꼿이 세웠다.
제법 영리한 편인 비들이 얼른 다가가 등을 두드려주었다. 등을 차지하지 못한 이들은 두 다리를 주물렀다. 황제에 즉위하기 전 백회는 향락만을 추구하던 광창왕이었다. 평생 절반의 시간은 글을 읽으며 보내고 절반의 시간은 여인의 품에서 보냈다. 허약한 체력으로 매일 아침 이곳에서 정사를 논의하려니 항상 몸 어딘가가 편치 않았다.
신하들은 아래에서 허리를 반쯤 숙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경들. 무슨 일이든 편히 말해 보시오.”
황제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 영무예가 뇌기 무사 100명을 데리고 궁에 들어오더니 태청각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다가 갔소. 내 이곳에서 밤새 잠도 못 자고 전전긍긍하다가 영무예가 떠나고 새벽에야 잠시 눈을 붙였다오. 황제로서 내 체면이 말이 아니구려. 할 말들 있으면 하시오. 듣고 있소.”
군신들은 서로 눈짓을 했다.
“초위국 백의 장군의 밀사가 어제 안부를 여쭙는 서신을 올렸습니다. 제후들이 폐하의 고난을 잊지 않았으니 안심하십시오.”
대신 하나가 몇 발자국 나와 아뢰었다.
“내 고난을 잊지 않아?”
황제가 씁쓸하게 웃었다.
“영무예처럼 강한 힘이 없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죄다 영무예와 같은 마음을 품은 자들인데 누가 내 생사를 생각하겠소?”
“폐하. 마음을 크게 가지십시오. 다른 제후들은 역심을 품었을지 모르나 초위국의 백의 장군은 나라의 충신으로 목숨을 맡기셔도 됩니다.”
또 한 신하가 대열에서 나왔다.
“맡길 목숨조차 없을까 봐 걱정이오!”
황제는 짜증스럽게 신하를 물리며 두 손을 펼치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영무예가 이렇게 깊은 밤 궁에 들어오는 것은 태청궁을 제집 후원으로 여기기 때문이겠지. 나를 죽이라는 명을 받은 뇌기병 100명이 쳐들어오면 그 누가 막을 수 있소? 아침에는 붙어 있던 목이 밤사이 어디로 갈지 단언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나더러 무슨 자신감으로 제후가 구하러 오기를 기다리란 거요?”
“그 점은 폐하께서 영무예에게 서한을 내리시면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태청궁은 본디 대윤 역대 황제가 정무를 주관하는 곳으로 응당 존엄이 있게 마련이지요. 영무예가 아무리 제후라 한들 조칙을 받지 않고 입궁할 특권은 없습니다!”
나이 든 중신 하나가 말을 꺼냈다.
“특권이 없어?”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