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11화 (11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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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검 (36)

익천첨의 조용한 목소리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유장길은 7종주 중에 가장 젊었어. 이 일로 그는 내내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녔지. 진북국에 그의 방식을 지지하는 사람이 300~400명이 되었네. 그들은 주점에서 비밀 모의를 하며 마땅한 인물을 찾아 천구의 뜻을 황제에게 전달하고자 했네.”

“나머지 종주들의 생각은 어떠했습니까?”

“권력을 가진 자와 협력하지 않는 것이 천구의 전통이지. 그리되면 천구는 야심가 수중의 무기로 전락할 테니까. 그래서 나머지 종주들은 진력을 다해 그를 말렸네. 그때 나는 진북에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고 끝내 양측이 모두 와해되었다는 것만 안다네. 유장길을 지지하던 300~400명의 사람들은 전부 황성 정위군의 손에 죽었어. 모든 지지를 잃은 유장길은 제후들에게 희망을 걸었네. 그는 진북국 국주 뇌천엽을 알현했어. 그 후 7개월간 월주와 완주의 제후들도 비밀리에 그의 호소에 응답하기 시작했네. 그때 나머지 종주들이 급히 불러 진북에 갔는데 도착하고 보니 상황은 이미 우리 손을 한참 벗어나 있더군!”

“유장길이 백씨를 밀어내고 새로 나라를 세우자 했습니까?”

“그렇네! 우리는 고민할 시간이 별로 없었어. 되도록 빨리 내부에서 그를 반역자로서 처벌해야만 했어. 여섯 명 모두 유장길을 토벌하는 서신에 각자의 반지로 매의 휘장을 찍었네. 나와 자네 스승도 함께였지. 천구의 규칙에 여섯 종주의 반지를 가진 사람은 성야의 매 반지를 가진 대종주를 따라야 하지. 그러나 이 여섯 명이 여섯 개의 반지로 대종주에게 반대를 하고 나서면 대종주는 탄핵이 돼. 그 서신은 동시에 격살령(格殺令)이기도 해서 그 서신이 보내진 순간, 유장길은 천구의 적이 된 것이지!”

“야심 때문이었군요.”

익천첨은 한참을 침묵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내 반드시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이 있어. 유장길은 스스로의 야심을 위해 그리한 게 아니야. 천구를 구하고 싶었던 것뿐이지. 그는 더 이상 우리의 인내와 희생이 결과를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았던 게야. 나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에서 이리 말했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적 앞에서 인자함은 나약함의 일종일 뿐이기에 절대적인 권력만이 난세의 야심가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적 앞에서 인자함은 나약함의 일종이다…….”

식연이 나직하게 말을 뱉었다.

“맞는 말 같은가?”

식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익천첨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되풀이되는 권력 제패에 지나지 않았지. 식연 자네라도 태청궁의 제왕 자리에 오르면 권력에 타락하고 말 것이네. 자네가 탐욕에 빠지지 않겠다고 장담한들 자네의 권력을 물려받을 사람도 자네의 이상과 뜻을 계승하리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르겠네. 난 이미 늙었어. 제후의 교수대에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내 마음을 잃을까 그것이 두렵네. 나와 함께 전투했던 천구 무사들에게 미안한 일이지. 내게 천구의 불씨를 널리 전하라며 희생해 간 그들을 나는 절대 잊지 않을 것이네!”

익천첨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유장길은 한때 내가 제일 좋게 본 사람이네. 하지만 끝내 그를 추살(追殺)한 것도 나였어.”

“종주께서 가장 좋게 본 사람이라…….”

식연이 하늘의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요즘 자주 생각합니다.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한 사람이 그렇게 강한 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겁니까? 희망도 없고 모든 활로가 막히고 벗도 가족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으며 세상에 믿어주는 이라고는 매(魅) 하나뿐인, 그런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도 검을 뽑아 들고 결전을 벌이다니…….”

익천첨이 허리춤에서 서신 한 통을 꺼내 식연에게 건넸다.

“이걸 보게.”

식연은 의아해하며 서신을 펼쳤다.

“내가 유장길의 행적을 따라 하당에 올 수 있고 그의 마지막 행방도 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내게 말해 주었기 때문이네. 그는 마지막으로 한 친우를 통해 내게 영월의 검을 전해 주었지. 영월의 검은 검자루가 비어 있었고 그 안에는 제후 명단이 적힌 서신이 숨겨져 있었네.”

“유장길을 옹호하며 황제에 대항한 제후들 말입니까?!”

식연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명단의 첫 번째 이름을 보게.”

“백리… 경홍!”

“16년 전 애제는 형을 죽이고 즉위했지. 제후들은 암암리에 정통이 아니라며 그를 존중하지 않았어. 애제는 제후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강제로 우림천군을 확충하고 터무니없는 세금을 징수했어. 제후들에 대한 착취와 압박은 풍염 황제의 북벌 때에 육박했네. 당시 제후들은 따로 새 황제를 세울 생각이 있었지만 앞장설 사람이 없었지. 그때 유장길이 나타난 거야. 그는 천구의 수장에다가 명문가의 후손이기도 했지. 유씨 가문은 지금도 운중 일대에 큰 세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운중 엽씨에 버금가는 대귀족이야. 그 외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실 한 가지가 있지. 유장길의 아내 성이 두 글자라네. 백리.”

“백리!”

“자네 짐작이 맞아. 유은의 어미가 백리경홍의 친질녀라네. 그래서 앞장서서 유장길을 지지한 게 바로 백리경홍이었어. 유장길이 남하한 것도 종국에 백리경홍에게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유장길은 천구 종주회가 자신을 탄핵할 줄 몰랐네. 황성의 백리 가문 가주인 백리장청이 그의 상상을 한참 뛰어넘는 대응을 하리라는 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 유장길이 제후 연맹의 큰 꿈을 꾸고 있을 때 황성의 사자는 이미 백리장청의 친필 서신을 가지고 각 제후국 도성에 도착해 제후들과 따로 담판을 지었네. 이것이 그 유명한 ‘군신삼약(君臣三約)’일세. 그렇게 황제와 제후들 사이에 묵계가 성립되었어. 제후들은 황제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황제는 2만 우림천군을 유지하되 동시에 세금을 개국 때만큼 내렸어. 제후들은 목적을 달성했고 황성의 정위군은 남회에서 유장길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네.”

“백… 백리경홍이 그를 배신했군요!”

익천첨이 소리 없이 웃었다.

“또 누가 있겠나? 황제를 옹호하는 자가 바로 백리 가문의 가주인 백리장청인데 분가한 백리경홍이 끈 떨어진 무사의 편에 설 수 있겠는가?”

식연은 서신을 익천첨에게 돌려주었다.

“이 검을 위해 피비린내 가득한 길을 걷고 죽음을 무릅쓴 노력을 하며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 것이 전부 한 미치광이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망상 때문이란 말입니까?”

익천첨은 서신을 챙겨 넣었다.

“유장길은 좌우에 든 두 자루의 검을 믿고 일을 도모했네. 왼손의 영월검에는 제후의 명단이 숨겨져 있고 오른손의 창운고치검은 천구 무기고를 여는 열쇠였으니까. 그는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천계성에 병력을 배치하고 자신의 나라를 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네. 하지만 제후들이 가진 강병이든 천구의 무기든 그의 것이 아닌데 어리석었지. 그는 제후들 손아귀의 꼭두각시일 뿐이었어. 제후들은 그를 이용해 천구의 무기고를 열고자 했을 뿐인데 이 가련한 꼭두각시는 도리어 제가 모든 것의 주인이라 생각했지.”

두 사람은 조용해졌다. 구름은 천천히 움직였고 물고기는 낮게 가라앉았다. 식연은 고개를 숙이고 수면을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무엇을 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물고기 구경을 좋아하나?”

한참이 지나고 익천첨이 물었다.

“유장길이 이 연못 안의 물고기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가 너른 바다를 헤엄치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그를 위해 파 놓은 연못이었던 게지요.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 ‘바다’에 물보라를 일으키는 꿈을 꾸었고요.”

“우리도 그처럼 다른 사람이 파놓은 연못에서 헤엄치고 있다고 생각하나?”

“사실 그 여인을 생각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자기가 진정으로 증오해야 할 상대가 눈앞에 있다는 걸 몰랐네요.”

두 사람은 더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담뱃대를 물고 가만히 서서 물고기를 바라보았다. 햇살에 드리운 울타리 그림자가 차츰 동쪽으로 옮겨가며 길어졌다. 점차 햇살은 어두워져 갔고 주위는 온통 희뿌옇게 변했다. 연초는 다 탔지만 두 사람은 차갑게 식은 담뱃대를 문 채 계속 물고기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 수면이 일그러졌다. 가느다란 빗방울이 흩뿌려졌고 수면 위로 물보라가 튀었다. 무수하게 일어난 잔물결이 끝내 하나로 뒤섞였다. 두 사람은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서 처마 아래로 돌아왔다. 비가 갑자기 커졌다. 콩알만 한 물방울이 지붕과 뜰 안의 돌바닥을 후두둑 때렸다. 돌 틈으로 금세 가느다란 급류가 생겨났다.

“비가 오는군요. 금 있으십니까?”

불쑥 고개를 돌린 식연이 익천첨에게 물었다.

“동륙의 장금은 없지만 해거리를 한 낡은 공후가 하나 있네. 오는 내내 가지고 다녔지.”

“공후가 딱 좋습니다. 고아한 장금을 어찌 저 같은 이가 탈 수 있겠습니까.”

익천첨은 방으로 들어가 낡은 공후를 가지고 나왔다. 칠을 하지 않은 공후는 고아하고 소박했다. 유동나무(桐油面) 기름이 칠해진 표면은 이미 닳아서 까슬해졌다. 식연은 시험삼아 현을 튕겨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익 선생께서 이 공후를 내내 지니고 계셨을 만하군요. 확실히 현이 좋네요.”

“장군도 금 연주를 즐기는 줄 몰랐군. 장차가 조금 남았으니 차를 끓여 장군의 연주를 들으세. 내 술을 마시지 않아 술로 장군의 대담한 기백을 돋우지 못해 아쉽군.”

“시골의 곡조 몇 가락을 탈 수 있을 뿐입니다. 대담한 기백이랄게 무에 있겠습니까.”

식연은 빙그레 웃었다.

익천첨은 장차가 담긴 나무함과 다구를 챙겨 나왔다. 집 안은 온통 캄캄했다.

식연은 금을 연주하지 않고 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마주한 채 공후를 안고 있었다.

익천첨은 불현듯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순간의 정적 또한 깰 수 없었다. 매의 눈을 가진 우족임에도 비의 장막 너머로 검은 윤곽만이 보였다. 사내의 옆선은 또렷하고 깨끗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는 시선을 아래로 드리워 공후를 바라보았다.

식연은 소매를 한 번 털고는 길게 읊조렸다.

“묘당은 높고 화려한데 들려오는 제악 소리는 낡았구나

초는 다 타들어 가고 어렴풋한 노랫소리만 들리나니”

시작음이 매우 높았다. 예스럽고 은근한 것이 무당의 노랫소리 같았다. 바깥의 빗소리마저도 삽시간에 식연에게 압도되었다.

담뱃대가 현 위를 튕겼지만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공후의 현이 약간 젖어 픽 소리만 났다. 식연의 담뱃대가 그 자리에 멈춘 채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들어주는 이도 없는데 금은 켜서 무엇하나?”

식연은 가볍게 웃으며 공후를 내려놓고는 일어나 폭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역사]

성제 원년, 동륙은 평안했고 전쟁은 없었다.

그해 북극성이 중주의 성야로 진입했다. 검처럼 날카로운 유성우가 쏟아져 몇 곳의 농토가 훼손되었다. 흠천감은 불안해 태청궁 황제에게 성도(星圖)를 올렸다. 며칠 뒤, 하당 동궁 지하에 있는 조릉에서 불이 나 건설된 지 수백 년 된 정전과 측전 수십 채가 잿더미가 되었다. 새로 즉위한 황제는 불길한 징조라 여겨 천하의 죄수를 특별 사면했고 빈곤한 12개 지방의 세금을 면해 주었다. 직접 뇌안산 태창봉에 올라 제를 지내고 <죄기기문(罪己祈文)>을 올렸으며 겨울이 되어서야 천계로 돌아왔다.

황성의 사관은 하당의 무전도지휘 식연이 만족 세자 여귀진의 스승을 자청해 군을 지휘하고 진을 배치하는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것을 기록하지 않았다.

비가 많이 내리는 가을날, 남회성에서 한 노인이 비단을 풀어 젖히고 거대한 고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혼백이 여전히 포효하고 있었다. 진정으로 피비린내 나는 바람이 어느덧 동륙 하늘에 시커먼 진운(陣雲)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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