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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검 (35)
희야는 여귀진이 몇 걸음 도움닫기를 하더니 마른 나뭇가지를 힘껏 내던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근처 물속에 떨어진 나뭇가지는 유유히 몇 바퀴 돌았다. 희야는 이 의식의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그 힘은 느낄 수 있었다. 익천첨이 달빛 아래에서 그와 겨루며 “철갑은 영원하리.”라는 오래된 맹세를 외치던 것처럼 장엄했다.
희야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연갑 틈에서 강청색 반지를 꺼냈다.
“난 너한테 줄 게 없어. 이건 우리 집안 대대로 전해 오는 거야. 값이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야. 이 반지를 낄 때마다 혼자가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이 나와 함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희야는 마침내 손을 뻗어 여귀진 앞에 반지를 건넸다.
“너 줄게. 나 희야는 네 벗이야. 앞으로 넌 그 누구도 무서워할 것 없어.”
여귀진은 물끄러미 그 반지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펄쩍 뛰었다.
“나도 똑같은 게 있어!”
여귀진은 허리띠 틈에서 반지를 끄집어냈다.
“내가 깨어났을 때 이 반지가 손에 끼워져 있었어. 그때 유은이 끼고 있던 거야.”
희야는 의아한 얼굴로 반지를 가져가 손에 놓고 이리저리 비교해 보았다. 똑같은 모양의 반지였다. 심지어 같은 쇳물에서 나온, 같은 장인의 손에 만들어진 반지라는 점도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유일한 차이라면 안쪽에 새겨진 명문이었다.
북극성의 신이자 하늘의 제왕. 그 찬란한 빛은 시작도 끝도 없으리라.
북극성의 신이자 창청(蒼青)의 주인이 가없는 하늘을 자유로이 비상(飛翔)하리라.
“천구의 반지야.”
희야가 확신하며 말했다.
“천구만이 이런 반지를 가질 수 있어.”
“천구가 뭔데?”
여귀진의 물음에 희야는 일순 멍해졌다.
“나도 잘은 몰라. 우리 바꿔 갖자. 난 네 반지를, 넌 내 반지를 갖는 거야. 앞으로 우리 중 누가 위험에 처했을 때 이 반지의 매 문양을 주사에 묻혀서 편지에 찍어 보내면 편지를 받은 사람이 바로 구하러 가는 거야.”
“좋아!”
여귀진이 흥분하며 푸른 하늘의 군주 반지를 엄지에 끼웠다.
“야, 너희 한 사람이 하나씩만 가져야지. 욕심부리면 안 돼! 이건 나 줘!”
우연이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 단번에 희야 손의 반지를 빼앗아갔다.
“그건…….”
희야는 아쉬워하며 손을 뻗었지만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왜 그러는데? 뭐?”
우연이 씩씩대며 희야를 노려보았다.
희야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어들였다.
헐렁한 반지는 우연의 가느다랗고 곧은 가운뎃손가락에서 내처 흔들렸다.
“뭐가 이렇게 굵담?”
우연이 미간을 찡그렸다.
“엄지에 끼우고 활을 당길 때 쓰는 거야.”
여귀진이 시범을 보여 주었다.
“너희 만족이나 그렇게 활을 쏘지.”
우연이 입을 실쭉거리며 대꾸했다.
“엄지손가락에 끼면 너무 보기 흉해. 우리 가죽에 끼워서 손에다가 묶자.”
“그럼…….”
희야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냥 나 줘.”
“싫거든!”
우연이 반지를 높이 들어 올렸다.
“손가락에 못 끼면 쇠사슬을 사서 끼운 다음 목에 걸면 되지. 머리카락을 묶을 수도 있고, 손에 끼우고 사람을 때릴 수도 있고!”
희야는 낙담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흥! 좀생이! 장난친 거야! 우리 할아버지도 있어. 나한테는 별것도 아니네요!”
우연은 몰래 희야를 흘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쳐들고 씩씩대며 반지를 내던졌다.
멀리서 식연은 청회색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반지를 보았다. 빠르게 날아가는 모습은 마치 기러기가 하늘가를 가르는 궤적 같았다. 두 소년이 뒤쫓아 달려가더니 함께 청록빛의 깊은 못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뒤에서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소녀가 치기 어린 눈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곳이 성야(星野)의 매의 귀착지인가?
바위에 기댄 식연은 무심히 허리춤을 뒤적여 연초와 담뱃대를 꺼냈다. 조금 지치는 기분이었다. 더는 아무것도 묻고 싶지도 관여하고 싶지도 않아졌다.
“이 세상의 전쟁이란 어쩌면 신의 손바닥 안에서 던졌다 받았다 하는 놀이일지도 모르겠군.”
푸른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세 아이들은 떠나갔지만 목소리가 아득하게 전해져 왔다.
“검을 꺼내오지 못한 게 아쉽네.”
“우연. 갑자기 그 검은 왜?”
“커다랗고 오래된 물건이잖아. 가져다가 돈 받고 팔 수 있지 않겠어?”
“돈은 뭐 하게? 나한테 좀 있어. 그 검의 주인은 분명 영웅일 텐데 영웅의 무기를 돈을 받고 판다니… 에이…….”
“아소륵! 왜 이렇게 멍청하냐! 네 주머니에 그게 얼마나 된다고. 그 검을 팔면 엄청, 엄청 많이 받을 수 있을걸?”
“그렇게 엄청, 엄청 많은 돈으로 뭐 하게?”
“바보! 꽃도 사고, 나비도 사고, 연도 사고, 군밤도 사고, 땅콩도 살 수 있지! 써도, 써도 다 못 쓰면, 이 몸이 자량가에서 가장 높은 누각을 빌려서 돈을 뿌릴 수도 있고…….”
가을이 깊어지자 뜰의 돌바닥 위로 또 한 겹의 낙엽이 쌓였다. 석양빛은 엷은 구름층 너머로 비추는 탓에 살짝 어두웠다.
후원의 물고기를 기르는 연못가에 익천첨과 식연이 나란히 서 있었다. 식연은 손에 든 마지막 물고기 밥 한 알을 연못 가운데로 멀리 내던졌다. 물고기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단숨에 달려갔고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잔물결만이 남았다.
식연이 손을 탁탁 털며 말문을 열었다.
“조릉 일로 태부는 관직에서 물러났고 홍려시경은 평민으로 지위가 떨어졌으며 가산도 몰수되었습니다. 금군 도위 열둘이 해고되었고 당일 밤 당직을 섰던 군교처에서는 서른여섯이 죽었지요. 성안 수색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별일 없으시면 거동을 삼가십시오.”
“백리경홍은 이번 화재가 우연이 아님을 아는 것인가?”
“무너진 돌에 입구가 막혔다고는 하나 창운고치검이 숨겨져 있던 장소에서 일이 발생했고 소 첩여와 유은이 같은 날 밤 실종되었지요. 국주는 바보가 아닙니다. 성을 한 달째 수색하는 것도 다 익 종주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식연은 뒷짐을 진 채 연못 가운데를 바라보았다.
“언제 떠나실 예정입니까?”
익천첨이 고개를 저었다.
“천구를 위해 이 검을 되찾는 것이 생의 마지막 일이라 생각했네만 막상 검을 찾고 나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군.”
“손에 넣었다고 할 수 있는 겁니까?”
식연이 웃었다.
“반지를 그 아이 손에 끼워줄 때 이미 포기했네. 나는 이 검을 들지 못한다는 걸 알아. 아마 자네도 못 들겠지.”
“천구의 종주 누구도 허락하지 않던 검이 만족 세자를 받아들이다니. 참으로 우습군요.”
“그리 어린아이가 검에 잠식되고도 끝까지 버텨내다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군.”
식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륙은 광활하여 영웅이 자유로이 달릴 수 있는 곳이지요. 북륙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만족 철기병이 초원을 가로지르는 광경을 보았는데 천지를 뒤집을 듯한 기세더군요.”
“미안하네. 그간 내 자네를 온전히 믿을 수가 없어서 그 검의 비밀을 말해 주지 않았어.”
익천첨이 불쑥 말을 꺼냈다.
“비밀요?”
식연은 별로 놀라지 않는듯했다.
“일국의 공작인 백리경홍이 어째서 천구의 성물을 노렸는지 정말 의심해본 적 없나? 창운고치검을 손에 넣어도 그는 그것으로 천구 무사들을 전쟁에 동원할 수 없어.”
“의심했습니다. 국주가 난세의 용맹한 군주는 아니나 궁 안에서 망상이나 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절대 아니지요.”
“백리경홍.”
익천첨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가 창운고치검을 원했던 이유는 천구의 성물이어서가 아니네. 그는 혼이 새겨진 무기의 힘에는 관심도 없었어. 사실 그가 원했던 것은 열쇠라네. 오래된 천구의 무기고를 열 수 있는 열쇠.”
식연이 고개를 휙 돌렸다.
“무기고요?”
“사실 역대 7종주는 모두 알고 있네. 그 무기고의 소재를 본 사람은 없지만 말이야. 이제 진짜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아. 듣건대 이전 왕조인 주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더군. 천구의 대종주 하나가 하락과 동맹을 맺었다네. 가장 위급한 시기에 그는 무사단의 정예병을 이끌고 왕조가 토벌한 하락 유랑민들을 월주로 데려왔지. 그래서 위대한 화산 하락족은 전부 그를 따랐네. 그의 뜻에 따라 인류가 사용하기에 적합한 무기를 만들었지. 200년에 걸쳐 정교한 무기들이 무수하게 만들어졌네. 그중 혼이 새겨진 무기와 비술의 주문이 걸린 갑옷이 적잖았지. 가장 강력한 비술가가 법계기(法戒器)로 전장에서 전사한 영혼을 모아 무기 안에 집어넣었어. 마지막으로 이 장비들을 숨기기 위해 하락족은 큰 산을 통째로 뚫어서 무기고로 삼았네. 그리고 주위에 강력한 장애물을 설치하고 주술을 걸어 보호했지. 무기가 필요할 때면 창운고치검을 손에 든 대종주가 무기고의 문을 열 수 있어. 문이 열리는 즉시 그는 구주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무기를 가지게 되지.”
식연은 잠시 침묵했다.
“그래요? 그 문을 여시려는 겁니까? 보나마나 그것이 선생의 최대 염원이겠군요.”
“40년 전이라면 그리 했을 것이네. 하지만 지금은.”
익천첨은 침음했다.
“이 무기고가 열렸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모르겠네. 더 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더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지. 식 장군. 난 자네와 달라. 많이 늙었어. 자네가 비밀리에 한 일들을 알고 있네. 적잖은 천구의 후예가 자네를 따르지. 난 강력한 힘을 잘못된 사람이 쓰게 될까 봐 두려울 뿐이네. 그러느니 영원히 매장되는 편이 낫겠지!”
식연이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언제나 평안한 시대를 수호할 생각뿐이시군요. 푸른 바다의 매께서는 가장 충성스러운 천구 무사이십니다.”
“만족 세자를 만나볼 기회를 마련해줄 수 있겠나? 창운고치검을 장악한 이가 전쟁에 빠지는 것은 바라지 않아.”
식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은 저도 생각한 지 꽤 되었습니다. 제가 선생 대신 그 아이를 제자로 거두겠습니다. 우리가 그 검을 길들일 수 없다면 최소한 그것의 주인에게 검을 어찌 사용해야 할지 가르쳐줄 수 있겠지요.”
“더없이 좋군.”
익천첨이 돌아서 떠나려 했다.
“여쭙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식연이 불쑥 물었다.
“말하게.”
“줄곧 유장길은 천구의 반역자라 하셨지요. 그런데 천구의 대종주인 유장길이 왜 반역을 했는지요? 제가 아는 천구의 역사에서 반역을 한 대종주는 없었습니다.”
익천첨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자네도 7종주의 한 명이니 그 일들에 대해서도 마땅히 알아야겠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자네에게 말하지 못했네. 반역은 하나의 표현 방식이지. 유장길은 천구 조직을 배신하지는 않았지만 천구의 사명을 위반했네. 백씨 황족의 통치를 뒤집어엎고 자기 나라를 세우려 했어.”
“자기 나라를요?”
“진저리가 난 게지. 14년 전은 천구에 가장 암울한 시기였네. 여러 나라에서 천구 무사를 주살하는 행위가 극에 달했지. 그때는 3대 직계 친족 중에 천구가 하나라도 있으면 야북 혹한의 지방에 보내져 두 손과 키로 언 땅을 파내야 했고 영원히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어. 식 장군의 경우라면 아마 가죽을 벗기고 정수리에 물을 들이붓는 사형 방식을 피할 수 없었을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