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08화 (108/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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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검 (33)

“유은! 이제 검은 내버려 두고 가!”

여인이 소리쳤다.

“검은 내 거야, 내 거라고!”

유은이 혀로 이를 핥았다.

“난 이미 힘을 얻었어!”

“유은! 그건 죽은 혼의 검이다! 네 아버지처럼 되지 마! 안 돼!”

여인의 표정은 애처롭고 비통했다.

유은은 아연해져 그 자리에 멈추었다. 희야는 아직 부러진 창의 반 토막을 손에 들고 있었지만 선뜻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유은의 표정이 계속 변했다. 망연했다가도 악독해졌다.

“죽기 싫어… 나 죽기 싫어……. 살려줘! 살려줘!”

유은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얼굴에 몇 차례 경련이 일더니 다시금 광기 어린 웃음이 떠올랐다.

“난 이미 힘을 얻었어. 유씨 가문을 이을 수 있어. 나는 위대한 무사야. 아무도 날 무시할 수 없어!”

유은은 갑자기 애원했다.

“날 먹어치우지 마…. 날 집어삼키지 마…….”

유은의 손에 들린 검은 더 이상 검이라 할 수 없었다. 검 전체가 녹아내린 듯했다. 삼엄하고 신비로운 강청색(鋼靑色) 빛살이 흐르며 쇳물이 끓어오르듯 형태가 변했다. 무언가가 안에서 거칠게 빠져나오려 하지만 이내 다른 무언가에 붙잡혀 돌아가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것들은 쇳물 속에서 서로를 죽이고 물어뜯고 집어삼켰다. 쇳물은 돌연 폭발하더니 유은의 말라버린 팔로 흘러 들어가 한 가닥 한 가닥 그의 팔을 타고 뻗어 나갔다. 검이 그의 몸을 집어삼켜 그와 하나가 되려 했다! 희야는 시체의 상처가 왜 그렇게 이상했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무언가에 베인 것이 아니라 이 검에 다가갔다가 쇳물에 잠식되어 찢겨나간 것이었다.

유은이 여귀진의 정수리로 검을 내리쳤다.

희야는 손에 든 토막 난 창으로 마지막 순간 매섭게 유은의 가슴을 찔렀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두 줄기 울부짖음이 대전 안을 소용돌이쳤다. 호아창의 창날은 빛이 없는 한 덩이 새카만 색으로 변했다. 창날로부터 1촌 거리까지 스며들었던 쇳물은 미친 듯이 회오리치며 끊임없이 유은의 가슴을 찢어발겼지만 창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

쇳물은 돌연 창날을 떠나 유은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은의 온몸이 쇳물에 휩싸였다! 비틀린 청색 쇳물은 거대한 물거품으로 변해 유은을 에워싸고 출렁이더니 돌연 그를 집어삼켰고 청색은 이내 핏빛을 띠었다.

물거품이 폭발하며 산산이 조각났다. 남은 것은 잘게 부서진 백골뿐이었다.

쇳물이 희야의 몸에 튀었다. 검의 파편이 한데 모여들었다. 희야의 손에 들린 창이 떨어져 바닥의 돌 틈에 꽂혔다. 점점 더 많은 파편이 모여들어 검의 형태로 응집되기 시작했다. 희야는 손으로 검자루를 움켜잡았다.

출렁이는 검이 곧 형태를 갖추려 했다. 여귀진은 허리의 부상을 누른 채 제 벗을 바라보았다.

“가! 우연 데리고 가! 빨리!”

희야가 여귀진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희야…….”

“빨리 가! 나도 이걸 만졌으니… 유은처럼 될 거야.”

희야의 손은 이미 불기가 사그라진 잿빛을 띠었다.

“아니야!”

여귀진이 앞으로 한 걸음 나와 힘껏 검자루를 쥐고 희야를 세게 밀쳐냈다.

“아소륵…….”

여귀진은 마지막으로 희야와 우연의 목소리를 들었다. 끝소리가 가물가물 멀어져 갔다.

아니, 그가 모두에게서 멀어져 갔다. 발아래로 어둠의 문이 열리고 여귀진은 소리 없이 빠져들었다. 일체의 빛과 그림자, 하늘과 대지가 차단되었다. 그는 깊고 적막한 곳에 홀로 서 있었다. 붉디붉은 거대한 쇳덩이를 들고서.

“하하하하. 허허허허. 히히히. 흐흐…….”

수많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웃고 있었다. 약간의 광기와 약간의 탄식이 어린 웃음소리였다.

“또 누군가가 왔구나. 또 누군가가 왔어.”

여귀진은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백한 그림자가 수도 없었다. 그들은 여귀진을 에워싸고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궁극의 결말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대를 이어 검을 뽑는구나. 어째서… 어째서지. 이유가 무엇일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인파 밖에서 들려왔다.

대전에 들어오기 전 여귀진의 귓가에 맴돌았던 그 목소리였다.

“왔다! 왔어! 빨리 가자! 빨리 가!”

크게 웃어대던 형상들이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여귀진은 휙 돌아섰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웃고 있던 형상들은 사라졌고 그 말을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가는 게 두려울 뿐이다. 온통 피로 물든 장면이 두렵고, 또한 구차하게 흐느끼며 죽어가는 것이 두렵도다.”

그 목소리는 아직 존재했다. 검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리 같았다.

“어디 있죠?”

여귀진이 소리쳤다.

“돌아보아라.”

여귀진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핏빛 발자국이 멀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고개를 들자 그 사람이 보였다. 그는 손에 붉은색 거대한 고검을 들고 있었는데 어둠 속에 녹아 있어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두 눈만 보였다.

“잡아라.”

그 사람이 검을 건넸다. 거부할 수 없는 제왕의 목소리였다.

여귀진은 덜덜 떨며 손을 뻗어 검을 받아들었다. 무시무시한 열기가 그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혈관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여귀진은 온 힘을 다해 포효했다. 순간 생명이 다시 그의 몸으로 돌아왔다. 혈기는 왕성해졌고 명성과 위엄은 용처럼 기세등등했다. 검 스스로 포효하기 시작했다. 금속의 울림이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태고시대의 용이 여귀진의 뒤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여귀진은 일곱 걸음 앞으로 나와 거대한 검을 바닥의 돌 틈에 세게 꽂아 넣고서 검을 짚은 채 앞을 바라보았다. 온 세상을 군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데 모여 강력한 음파로 변한 두 목소리가 폐쇄된 묘실(墓室) 안으로 요동치며 퍼져나갔다. 맹렬한 바람처럼 잔돌을 휘감고 화염마저 휩쓸어버렸다. 희야와 우연은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까무러쳤다.

식연은 검을 휘둘러 마지막 강시의 머리를 베고 발로 돌문을 차서 열었다. 용의 포효와도 같은 목소리가 그를 덮쳐왔다. 거센 바람 속의 돌멩이에 식연은 뺨이 긁혔다.

“지금… 이게…….”

식연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불길 너머로 음전 정중앙에 가냘픈 인영이 신성한 검을 짚고 서 있었다.

“저 아이가 천구를 계승할 마지막 인물인 것인가?”

익천첨이 은색 창을 떨구었다. 잠시 말이 없던 그는 무릎을 꿇었다. 손을 꽉 말아 쥐며 반지를 겉으로 드러내 보인 익천첨이 입을 뗐다.

“북극성 신의 광휘가 네 두 어깨에 비추리라. 우리는 존엄으로 긍지를 느끼고 용기로서 영예를 얻노라. 철갑은 영원하리.”

“저 아이가 마지막으로 천구를 계승할 사람인가?”

여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귀진은 뒤로 나동그라졌다.

여인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활짝 열린 돌문 근처에 식연의 인영이 보였다. 두 사람은 청유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 너머로 시선을 맞추었다. 여인은 일어섰다. 아직 움직일 수 있는 한쪽 팔로 세 아이를 하나씩 대전 밖으로 밀어냈다. 타들어 가는 서까래가 연신 떨어졌다. 그녀는 종말의 날 쏟아지는 불비 아래 서 있는 것 같았다.

왕왕거리는 울림이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식연은 안색이 돌변했다.

“호수의 물을 들이붓기 시작했습니다!”

“어쩌지?”

익천첨은 긴장이 되었다.

“물이 계속 차오를 테니 올라가는 통로를 따라 헤엄쳐 나가면 됩니다.”

식연이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불바다만 넘으면 여인을 끌어낼 수 있었다. 화염은 두렵지 않았다. 무너지는 대전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식연은 여인이 그에게서 아주 멀리 있는 것 같았다. 평생 그녀의 손에도 가 닿지 못할 만큼 아주 멀리에.

“미안해요. 결국… 난 끝까지 가지 못했네요.”

여인이 나직이 말했다. 식연이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인은 뒤돌아 그 해골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곁에 선 그녀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해골이 가볍게 진동하더니 늑골이 차례로 열리기 시작했다. 유은이 검을 뽑을 때와 똑같았다. 한쪽 다리를 들어 말 등에 훌쩍 올라탄 여인이 지친 듯 몸을 기대자 늑골이 다시 하나, 하나 닫혔다. 전체 골격과 여인이 하나로 합쳐졌고 두 사람은 더 이상 헤어지지 않게 되었다. 말은 여전히 조용히 바닥에 엎드린 채였다. 한데 어떻게 된 일인지 말이 일어나 그의 주인과 여인을 데리고 말꼬리를 흔들며 천천히 하늘가로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식연은 깨달았다.

기뻐도 슬퍼도 눈물이 흐르지 않으니, 사람은 늙고, 용사도 재가 되기 마련이라

700년 전 대윤의 개국 황제가 장미 공주의 영혼을 향해 부른 이 시구(詩句)가 돌연 식연의 뇌리를 스쳤다. 돌이켜볼 때마다 늘 꽃이 졌고, 물은 차가워졌으며,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후회를 했으면서도 결국 그는 또 그녀가 꽃잎처럼 시들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타들어 가던 대들보가 마침내 무너져 모든 시야를 차단했다. 옆면의 돌벽이 갈라졌다. 물소리는 우레와 같았다. 하늘에 접한 물 벽이 무너져 내리고 휘말려 올라간 하얀 거품이 그의 머리 위를 누르는 듯했다.

식연은 소용돌이치며 출렁이는 물에 휩쓸려갔다. 그는 전력을 다해 헤엄쳐 나아가 희야와 우연을 끌어안았다. 범람한 물이 그를 밖으로 밀어냈다. 불이 꺼지던 마지막 순간, 그는 물속에서 사력을 다해 여귀진을 구한 익천첨을 보았다. 그는 쓰개로 고검을 감싸고 검과 여귀진을 왼팔에 끌어안았다. 오른손으로는 반지를 꽉 그러쥐었다. 물에 반지 표면의 먼지가 씻겨 내려갔다. 익천첨은 수백 년의 세월에도 여전히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쇳빛 매에 입을 맞추었다.

익천첨은 반지를 여귀진의 엄지에 끼우고 주먹을 쥐여 주었다.

희야가 눈을 뜨려 안간힘을 썼지만 겨우 가느다랗게 실눈을 뜰 수 있을 뿐이었다. 눈꺼풀이 들러붙은 것처럼 무거웠다.

“깼느냐?”

누군가 조용히 물었다.

희야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을 한 사람은 뒷짐을 진 채 창가에 서 있었다. 밝은 햇살에 어슴푸레한 뒷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강렬한 햇빛에 희야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렸다.

그 사람이 천천히 침대 가로 걸어왔다.

“꼬박 하루를 잤다.”

“누… 누구세요?”

빛에 눈이 적응되자 희야는 상대의 용모가 또렷이 보였다.

수려한 외모의 청년이었다. 대략 스물 남짓 되어 보이는 그는 가벼운 면갑 차림에 키가 크고 늘씬했다. 몸에는 진한 술 냄새가 배어 있어 냄새만 맡아도 취할 것 같았다. 그러나 청년의 두 눈은 맑고 깨끗했다. 희야는 청년이 손에 쥐고 있는 얇은 백동 술 단지를 보고 분명 독주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사규라고 한다.”

청년이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넌 날 모른다. 기억할 필요도 없어. 너를 여기에 데려다주라는 부탁을 받았을 뿐이다. 다행히 너희 모두 무사하여 나도 사명(使命)을 완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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