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06화 (106/360)

106

6장. 검 (31)

희야는 잠이 들 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주위로 더는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공허했고 하늘하늘 나부끼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앞뒤좌우를 또렷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는 몰랐지만 머리 위의 하늘이 매우 낮고 유난히 짙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비가 내리기라도 하는지 축축하고 끈적끈적했다.

‘여긴 어디지…. 어딜까…….’

희야는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가슴도 텅 비어 버렸는지 메아리가 들리는 듯했다.

여기가 어디지? 여긴 어딜까? 희야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잊고 있던 무언가가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 이것은 함정이다. 희야는 자신이 곧 집어삼켜질 것임을 알았다. 서서히 기억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마귀와도 같은 것이 눈앞으로 떠올랐다. 희야는 달아나고 싶었지만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주위에 다 사람인가?

희야는 무언가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어둠 속에 숨겨진 숨소리와 거대한 그림자들이 희야를 에워쌌다. 그를 단단히 둘러싼 성벽 같았다. 이들은 뭘 하려는 거지? 눈이 핏빛은 아닐까? 사람을 죽일 칼이나 차가운 물에 흠뻑 적신 채찍을 들고 있지는 않나?

채찍? 왜 채찍이지? 기억의 끈 같다. 우물 가장 깊숙한 곳에 이어진 기억의 끈.

우물? 우물 안에 뭐가 있지? 뭐가 있지?

우물 안에 사람이 있어…….

여귀진과 우연의 눈에는 지옥과도 같은 장면이었다.

희야가 밀려 들어가면서 말라붙었던 피의 원이 선홍색으로 돌아왔다. 피의 원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면서 더 많은 피가 벽돌 틈에서 콸콸 쏟아져 나왔다. 사람 몸에서 막 흘러나온 듯 약간의 열기도 머금고 있었다. 희야의 신발 바닥이 피에 닿자마자 발갛게 물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피가 서서히 장화를 타고 위로 역행해 흘러갔다.

대전에 들어선 순간 여귀진의 머릿속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재발했다. 누가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희야! 희야, 빨리 도망쳐!”

여귀진은 일체 상관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희야는 여귀진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원 안으로 발을 디디며 희야는 유은에게서 벗어났다. 유은의 걸음도 가벼워졌다. 그는 어깨를 찌른 창끝을 밀어내고서 소리 없이 희야의 뒤로 돌아갔다. 희야는 호아창을 들고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희야의 몸은 굳어버린 듯했다. 눈꼬리만 살짝살짝 꿈틀거리며 경련했다.

여귀진이 주먹을 꽉 말아 쥐고 희야에게로 달려가려는데 우연이 그의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가지 마!”

우연이 큰 소리로 외쳤다.

“누가 가도 소용없어! 저건 용혈주문이라고!”

“용혈주문?”

“피의 주문이 활성화되었어.”

우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말소리도 뚝뚝 끊어졌다.

“풍산… 풍산용야음이야. 용혈의 좌(座)가 깨어났어. 깨어났다고…. 누구든 다 집어삼킬 거야!”

“무슨 말이야?”

여귀진이 힘껏 우연을 흔들며 물었다. 우연은 말라버린 잎사귀처럼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유은은 그 해골 앞에 섰다. 그는 천천히 해골이 품고 있는 검자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얼굴에는 미치광이 같은 기쁨 외에도 일종의 경외심이 서려 있었다. 사람을 먹는 야수가 신성한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것 같았다. 그의 손이 연신 떨렸다. 얼굴에는 희미한 고통의 기색이 드러났다. 유은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검을 잡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희야에게 찔린 고통보다도 그 생각이 더 강렬하게 들었다.

순환하던 피가 피의 원 중심으로 스며들었다. 피는 어느새 희야의 목구멍까지 타고 올라갔다. 피투성이가 된 희야는 끔찍한 가위눌림에 시달리는 것처럼 천천히 목을 비틀었다. 희야는 눈꺼풀을 격렬하게 달싹였지만 깨어나지 못했다. 그의 목을 넘어선 피가 머리카락으로 스며들었다. 희야의 갑옷이 터져나갔다. 갑옷 아래의 피부가 마르더니 넘쳐나는 피로 빠르게 뒤덮였다.

유은이 돌연 야수처럼 울부짖었다. 손이 곧 검자루에 닿으려 했다. 그때 이미 유은의 손 색깔은 피처럼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피부 아래의 혈맥이 요괴처럼 미친 듯이 날뛰었다. 손바닥은 보통 사람의 두 배로 커졌다. 마침내 모공에서 피가 배어 나오며 셀 수 없이 많은 가느다란 핏줄이 그의 손과 검자루 사이를 이었다. 핏줄은 검자루에 닿자마자 금속의 갈라진 무늬 속으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해골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사타구니 아래의 말 해골도 흔들렸다. 여귀진은 귀를 틀어막았지만 그 소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소리가 고막 깊숙이 달라붙은 것 같았다. 그것은 말 울음소리였고 나직한 말소리였으며 무수한 울부짖음이었다.

유은은 전력을 다해 손을 거두었다. 그는 청회색 반지를 낀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북극성의 신이자 하늘의 제왕. 그 찬란한 빛은 시작도 끝도 없으리라.”

유은이 포효하기 시작했다.

해골의 진동이 멈추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유은이 해골의 엉겨 붙은 늑골 안으로 손을 뻗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반지의 푸른빛이 반짝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해골은 단단히 감싸고 있던 흉골을 전부 열었고 봉인은 해제되었다. 거대한 검을 뽑은 유은은 검봉(劍鋒)을 땅에 댔다.

흐르던 피가 검봉을 향해 모여들었고 금속은 피를 완전히 빨아들였다. 그런데 피투성이가 된 유은의 손이 갑자기 말라가기 시작했다. 팔 전체가 청회색으로 변했다. 피가 모조리 빨려 나간 듯했다. 그러나 유은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다. 완전한 해탈을 얻은 사람처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표정이었다.

“얻었어…. 내가… 검을 얻었어!”

유은이 미친 듯이 기뻐하며 부르짖는 소리가 대전 안에 메아리쳤다.

어떻게 해낸 것인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두 손으로 칼자루를 움켜쥔 유은은 거대한 검을 들고 훌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희야의 등을 향해 검을 베었다!

“희야…….”

여귀진은 철저한 무력감에 휩싸였다.

누가 날 부르는 건가?

날 불러줘! 나를 불러줘! 조금만 더 큰 소리로! 날 깨워줘!

희야는 그 희미한 목소리를 포착했다. 시커먼 그림자 밖에서 흘러들어온 소리는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칼을 들었다. 바로 그의 등 뒤에서 칼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피할 곳이 없었다.

날 부르는 사람, 또 없나요? 다시 한 번만 나를 불러줘요. 다시 한 번만…….

“희야!”

우연의 울음소리가 대전 안을 관통했다.

채찍.

우물.

우물 안의 사람…….

그 여인의 얼굴이다…. 텅빈 눈… 부드러운 머리카락.

우물 입구로 비가 내린다. 고개를 들어 새하얀 하늘을 바라본다.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익숙한 노래를 부른다. 다시 깨어나지 못하면…….

다시 깨어나지 못하면!

죽나?

죽으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해.

순간 더없이 후련한 기분이 들면서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의 두려움이 활짝 열렸다. 사람의 마음을 먹어치우는 요괴가 긴 깃발을 들고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희야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고 위축되지도 않았다. 불현듯 웃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그의 온몸을 에워싼 피가 순간 폭발하며 혈우(血雨)로 변해 사방팔방 흩뿌려졌다. 절대 불가능한 순간, 그 속박에서 벗어난 희야는 몸을 돌려 유은의 손에 들린 거대한 검을 맞이했다. 희야는 창을 쓰지 않고 주먹을 휘둘러 검의 측면을 으스러뜨리듯 쳤다. 허공에 떠 있어서 힘을 돋움 할 곳이 없었던 유은은 그대로 비스듬히 날아갔다.

호아창이 따라 날아갔다. 희야도 변했다. 사나운 호랑이처럼, 희야에게 더 이상 두려움이란 없었다.

멀리서 어렴풋한 인기척이 들렸다.

식연이 마차 발을 휙 젖혔다. 호수 너머 저 멀리 동궁 방향이 사람 소리로 시끄러웠다. 대략 조릉이 있는 위치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바삐 뛰어다니는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익천첨이 식연의 옷깃을 홱 잡아당기며 흉악한 얼굴로 물었다.

“그 여인과 무슨 약속을 한 겐가? 자네는 나를 꾀어내 여기에서 기다리게 하고 그녀가 창운고치검을 가지고 떠나기로 한 것이야?”

“저를 믿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식연이 익천첨의 손을 밀쳐내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천구의 준칙을 받드는 천구 무사입니다! 그 여인은 그 검을 가지고 갈 수 없어요. 그녀는 매(魅)입니다. 정녕 모르십니까?”

“매?”

익천첨은 문득 깨달았다.

“보통의 여인이라면 어떻게 14년이 지났는데도 늙은 티가 전혀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매입니다. 누구보다도 그 검을 두려워한단 말입니다. 용혈골결의 주문이 촉발한 후에는 그 검 주위로 1리까지도 가기 힘든 여인입니다. 그 검을 만졌다면 순식간에 검에 기생하는 용의 혼에 완전히 집어삼켜질 거라고요! 그래서 수년 동안 그 검을 가지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은 겁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떡하나?”

“어떻게든 들어가 봐야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으니 대책도 없지요.”

식연이 마차의 고삐를 세게 잡아당겼다. 마차를 끄는 흑마가 길게 울부짖으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묘도 안에서 연기가 계속 쏟아져 나왔다. 용맹한 기병들은 속수무책으로 연신 물만 들이부었다.

“무슨 일이냐?”

식연이 인파를 헤치고 나왔다.

“장군!”

기병대 통령 하나가 놀라 허둥지둥 무릎을 꿇었다.

“조릉 안에서 갑자기 짙은 연기가 흘러나왔습니다. 안에서 불이 난 것 같습니다!”

“모든 흔적을 없애야 해!”

익천첨은 식연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바짝 다가가 나직이 말했다.

“모두 여기 있어라.”

식연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물에 적신 수건을 두 장 가져와! 내가 들어가 보겠다. 1각이 지나도 내가 안 나오거든, 호숫물이 능으로 들어가도록 조릉 안의 수문을 열어라.”

“저희도 함께 내려가겠습니다!”

“됐다.”

식연이 손을 내둘렀다. 그리고 자기 뒤편의 익천첨을 가리켰다.

“나와 이 금군도통령이 함께 내려갈 것이다. 화재가 발생한 원인만 확인하면 되니 더 많은 사람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물을 가지고 들어갈 수도 없지 않으냐.”

식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젖은 수건을 건네받아 얼굴을 가리고 횃불을 쥔 채 묘도로 들어갔다. 익천첨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밖의 타들어 가는 뜨거운 바람이 안으로 흘러들었다. 대전 안의 장막에는 이미 불이 붙었다. 여귀진은 우연을 끌고 재빨리 기둥 뒤로 몸을 피한 뒤 피의 원 안에서 싸우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비등한 실력의 결투였다. 무기를 휘두르는 양쪽 모두 기술 없이 그저 속도와 힘만으로 맞붙었다. 두 사람은 좌우로 무기를 휘둘렀다. 호아창과 거대한 검에서 눈부신 불꽃이 일었다.

폭발하는 힘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 힘은 끊임없이 두 사람의 몸 안에서 등등한 기세로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피부가 찢겨나갔다. 모두 자신들의 힘 때문이었다.

“희야! 희야!”

여귀진이 머리 위의 타들어 가기 시작한 대들보를 보며 큰 소리로 희야를 불렀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희야는 기계적으로 호아창을 휘두르며 유은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소용없어. 못 들어…….”

우연이 고개를 저었다.

“용혈 주문에 빠졌어. 유은하고 똑같아. 용혈 주문은 가장 포악한 피의 주문이야. 결국 둘 다 피의 주문에… 먹히고 말 거야!”

바닥은 이미 무기에 완전히 부서져 깨진 돌멩이투성이였다. 두 사람의 움직임은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푸른 검빛과 오금색 창의 형상이 번쩍이고 선혈이 튈 뿐이었다. 핏방울은 공기 중에서 순식간에 증발했고 그렇게 형성된 피의 안개는 거대한 검에 달라붙어 검신으로 스며들었다. 검빛은 점점 핏빛으로 변해갔다. 요괴의 눈동자처럼 새빨갛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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