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04화 (104/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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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검 (29)

여귀진은 살짝 떨리는 손 하나가 더듬어오는 것을 느끼고 왼손으로 붙잡았다. 부드럽고 자그마한 손바닥이 여귀진의 손을 맞잡았다.

“우연. 무서워 마.”

여귀진은 작게 말하면서 눈을 떠보려고 했다.

눈앞의 광경에 여귀진은 저도 모르게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돌벽은 양쪽으로 열려 있고 등불 빛은 날카로운 검처럼 세 사람의 눈을 비추었다. 빛은 돌벽 뒤편의 으리으리한 건축물도 비추었는데 거의 광장에 흡사했다. 평평한 네모 벽돌이 깔린 길이 사방팔방으로 수백 보 거리까지 쭉 뻗어 나갔고 맞은편에는 장엄한 대전이 있었다. 대전은 웅장하고도 고요했다.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자진전과 건물 양식이 완전히 똑같았지만 다른 장식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굵직한 녹나무 기둥과 들보, 뛰어난 솜씨로 만들어진 문과 창은 목재 원색으로 더욱 장엄해 보였다. 길이와 폭이 수십 장(丈)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포목이 대전 정면에 걸려 있었다. 석문이 열리며 밀려든 바람에 거대한 천이 물결치는 파도처럼 일렁였다. 천은 원래 흰색이었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옅은 황색으로 바랬다. 그 위로 온통 짙은 갈색 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는데 무슨 그림인지는 정확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음전(陰殿).”

여귀진은 로 선생이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곳은 하당 백리 가문 릉의 음전으로 돌아가신 수많은 선조들을 모시는 곳이었다.

빛은 광장 정중앙의 유등(油燈)에서 흘러나왔다. 여귀진은 이 등이 얼마나 오래 타오르며 망자의 전당을 조용히 밝히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등잔마다 불씨는 콩알만 한데 등유를 채운 자기(瓷器) 항아리는 두 사람이 함께 끌어안아야 할 정도로 커다랬다. 수백 개의 이런 항아리가 한데 모여 있는 까닭에 빽빽한 불은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났다.

“이 등… 아직 타고 있어?”

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서 봤어. 이건 만년등이야. 청유 한 항아리에 인어족 몸에서 정제한 인어 기름 한 승(升)을 섞는데 등불 심지 하나만 있으면 수십 년 동안 꺼지지 않는다고 해.”

“희야. 아소륵. 뭐가 보여?”

우연은 한 손으론 희야를, 다른 손으로는 여귀진을 꼭 붙잡고 있었지만 눈을 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귀진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차분하면서도 경계하는 눈빛으로 묵묵히 전방을 바라본 희야는 여귀진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기 뒤편으로 슬쩍 눈짓을 했다.

희야의 눈짓을 따라 시선을 옮긴 여귀진은 순간 몸을 바르르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문 밖의 바닥에는 시체들이 무질서하게 너부러져 있었다. 어쩌면 50구, 어쩌면 100구일지도 모르고 더 많을지도 몰랐다. 이미 바짝 마른 핏자국이 돌바닥에 흩뿌려져 검붉은 얼룩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 시체들은 세 사람이 아까 묘도에서 보았던 시체처럼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죽은 지 오래된 것이 분명한데 썩지 않고 죽기 직전의 처참한 상태로 유지되어 있었다. 다수의 시체는 정수리부터 내리 찍힌 뒤 약간 옆으로 빗겨 어깨까지 베어졌다. 여귀진은 대체 어떤 자가 사람을 한가운데에서 반으로 가르는 무시무시한 검법을 쓸 수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여귀진은 다른 어둠 속에 있는 노인이 떠올랐고 초원에서 자신이 늑대왕을 향해 휘둘렀던 그 검이 떠올랐다.

여귀진은 이 상황을 짐작은 하고 있었다. 희야가 시신을 밟았을 때 여귀진도 밟았으니까. 여귀진은 희야가 초를 떨어뜨린 이유를 알았다. 그래야 우연이 당황해 도망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희야가 맨 앞에 걸어가기로 한 이유도 시체를 밟을 때마다 피해가기 위함이었다.

여귀진의 마음은 돌연 이 친구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해졌다. 희야의 까만 눈동자에 깃든 결연함에 별로 무섭지 않았다.

여귀진은 긴장하며 침으로 마른 입술을 적시고는 희야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우연. 우리 앞으로 가자.”

희야가 나직하게 말하며 우연의 어깨를 밀었다.

“돌아보지 마!”

“왜 그래?”

우연은 못마땅해 고개를 돌리려 했다. 희야는 두 손으로 우연의 볼을 붙잡고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했다.

“앞으로 가.”

“아소륵. 넌 왜 그러는데?”

우연이 한쪽의 여귀진을 흘끗 쳐다보았다. 여귀진은 자신의 등 뒤를 보고서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빠… 빨리 가!”

여귀진은 칼자루가 휘어 부러질 만큼 세게 움켜쥐었다.

“너…….”

모두 입을 다문 그때, 우연은 등 뒤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낮은 소리는 헤진 자루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 같기도 하고 사람이 극도로 지쳤을 때 몰아쉬는 숨소리 같기도 했다. 이어 발소리가 들렸는데 이상하리만치 무거웠다. 쇠 신발을 신고 걷는 것 같았다. 우연은 차가워진 희야의 손을 느낄 수 있었다. 천지를 다 뒤덮을 만큼 커다란 그물 같은 공포가 그녀를 휘감았다. 우연은 만년등 불빛 속으로 몇 걸음 달려간 뒤에서야 고개를 돌려보았다.

우연은 저도 모르게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바닥이 온통 시체였다. 하지만 우연을 더 두렵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끔찍하게도 회황색 목내이(木乃伊)1)들이 천천히 일어나 앉기 시작했던 것이다. 메마른 눈이 느릿하게 움직이더니 끝내 빛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것들은 하나하나 일어나 만년등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매우 느리고 묵직했다. 시체 한 구는 오른팔이 어깨 절반과 함께 베어져 나가 약간의 살점만이 남아 있었다. 그 오른손에는 쇠칼을 쥐고 있었는데 그가 일어나자 쇠칼이 바닥에 끌리며 댕그렁 소리가 울렸다.

“강시… 정말 강시야!”

우연은 눈을 비볐다. 눈앞에 지옥이 펼쳐진 줄 알았다.

“문 닫아!”

희야가 우연을 밀쳐내고 달려가 있는 힘껏 문을 밀었다.

여귀진도 희야를 도와 문을 밀었다. 하지만 아까 손을 대자 활짝 열렸던 돌문은 장난처럼 갑자기 뻑뻑해져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행시(行尸)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말라비틀어진 눈구멍에는 물기가 쏙 빠진 대추처럼 말라비틀어진 눈동자가 박혀 있었다.

“나 따라와!”

우연이 소리쳤다.

두 소년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우연의 뜻을 이해했다. 세 사람은 가장 가까운 만년등으로 달려갔다. 힘을 합쳐 간신히 100근이 넘는 기름 항아리를 들어 문가로 옮겼다. 등 심지의 불꽃을 기름 표면에 갖다 대자 항아리 전체에 기름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희야는 창으로 항아리 가장자리를 찔렀다. 타오르는 기름이 콸콸 쏟아지며 문가로 질펀하게 흘러갔다. 끝으로 희야는 발을 날려 깨진 항아리 전체를 걷어찼다.

선두에 선 행시가 어느새 문 앞에 도착했다. 행시는 문가에 뿌려진 등유에 화들짝 놀랐다. 고통을 느끼기라도 한 듯 몇 걸음 물러나다가 뒤편의 행시들에 부딪혀 한데 굴렀다. 불길이 쭉 번져 주위의 행시들에 전부 불이 붙었다.

“빨리 문 닫을 방법을 찾아!”

희야가 소리쳤다.

“알았다! 사개2)가 끼어 있었어!”

여귀진이 문지도리의 먼지를 불자 정교한 사개가 드러났다. 여귀진이 사개를 잡아당기자 뻑뻑했던 문은 희야와 우연이 미는 힘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가뿐하고 빠르게 닫혔다.

세 사람이 미처 환호를 지르기도 전, 불에 타고 있는 팔 하나가 문틈으로 밀고 들어와 우연의 어깨를 잡았다.

문을 완전히 닫을 수 없었다! 더 많은 행시가 그들의 상황을 알아챘다. 문틈으로 더 많은 행시가 화염을 넘어 돌문으로 덮쳐오는 모습이 보였다. 행시들은 갑자기 움직임이 바람처럼 빨라졌다.

“악!”

우연이 비명을 질렀다. 희야는 두 손으로 우연의 어깨를 붙잡고 재빨리 물러났다.

가슴 앞의 청사를 뽑아 든 여귀진이 성큼 나아가 말라붙은 팔을 잘라버렸다. 희야가 바로 따라와 문을 발을 찼고 마침내 돌문이 완전히 닫혔다. 여귀진은 온 힘을 다해 커다란 빗장을 밀어 문을 걸어 잠갔다. 기진맥진한 세 사람은 문에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에 어떻게 진짜 행시가 있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우연이 소리쳤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까 넘어진 것도 저 시체가 내 발목을 붙잡아서 그런 거였어!”

오랫동안 참았던 땀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는지 희야는 온몸이 물에 빠진 듯 축축했다. 희야도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그럼 내 다리를 만진 사람도…….”

우연이 말을 더듬었다.

“사람이 아니야. 행시라고! 빨리 가자. 다른 길을 찾아! 저 문이 놈들을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

돌문 밖에서 묵직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많은 손이 문을 두드리는 것인지 돌문이 흔들리며 부슬부슬 먼지가 떨어졌다. 언제 무너질지 모를 일이었다.

“대전 안으로 들어가자!”

희야가 음전을 가리켰다.

“가서 다른 출구가 있나 보자!”

“저기 뒤에는 뭐가 있어?”

우연이 거대한 포목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시체 싸는 염포(殮布)인데…….”

“저렇게 큰 염포가 어디 있냐? 무슨 시체를 싸길래 저렇게 큰 염포를 써?”

“음번(陰幡)이라고도 해. 이야기꾼 선생이 말한 적 있어. 왕태비의 시신을 싸는 염포가 아니라 릉 건설이 끝나고 따라 죽은 장인들을 싸는 거야.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이 큰 천을 안에 깐 다음에 한 사람씩 죽이고 안에 던졌대. 그 시체들의 피가 표면에 자국처럼 남아서 음번이 된 거지. 망자들의 혼이 왕태비의 관곽(棺槨)3)을 지킬 수 있도록 음번은 음전의 맨 앞에 걸어.”

“왕태비라고? 마귀할멈이겠지!”

우연이 소리쳤다.

“왕태비가 마귀할멈이든 아니든 우린 일단 들어가서 다른 출구는 없는지 확인해 봐야 해. 돌아가 저 행시들과 맞서는 건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야!”

“왕태비가 바깥의 행시들보다 몇백 배는 더 무시무시할지도 모르잖아!”

“다행인 건.”

여귀진은 우연의 어깨를 잡고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단경왕태비는 일흔여섯에 죽었다고 들었어. 늙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니까 행시라고 하더라도 그리 무섭지는 않을 거야.”

우연은 물끄러미 여귀진을 바라보더니 한참 만에야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뗐다.

“아소륵. 이런 상황에 그런 농담을 하다니. 네가 우리 중에 간이 제일 크네!”

머리 위에서 거대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염포가 나풀나풀 떨어져 내리고 음전 전체의 진면목이 눈앞에 드러났다. 음전에는 문이 없어 그대로 내부의 모든 것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 이건…….”

세 사람의 일생에서 잊기 힘든 장면이었다.

두 줄의 만년등이 밝게 비춘 지면은 핏빛 붉은색으로 지옥의 도살장 같았다. 엎드린 시체도 있고 움츠린 시체도 있었다. 죽을 때의 모습 그대로라 당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의 피는 이미 메말라 있었다. 바닥에는 종이에 뚝뚝 떨어진 먹처럼 제멋대로 흩뿌려진 붉은색이 남아 있었다. 아까의 행시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어떤 무기에 살해되었는지도 알아볼 수 없었다. 어떤 상처는 마치 끌로 가슴을 파낸 것 같았다. 또 어떤 것은 무언가에 몸의 일부가 깨물린 듯하기도 했으며 녹아버린 것 같은 상처도 있었다.

모든 시체가 대전 중앙의 원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전 중앙에는 기이하게도 핏빛 한 점 없이 텅 비워진 공간이 있었다. 누군가가 저 시체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원을 그리는 제도기로 직경 1장 남짓한 제한선을 그려둔 것 같았다. 원의 정중앙에는 시체 한 구가 당당한 제왕의 자세로 이미 백골이 된 말 등에 타고 있었다. 이미 죽었음에도 그자와 말은 다른 시체와는 다른 위엄을 풍겼다. 말은 뒷다리가 부러졌으나 앞다리는 꼿꼿하게 땅을 디디고 있었다. 시체의 갈비뼈는 서로 얽혀서 푸른색 거대한 검에 달라붙었고 검자루가 그의 아래턱에 괴어져 있었다.

시체가 죽은 후에도 고개를 높이 쳐들고 있도록 바로 저 검이 떠받치고 있었다!

“저자의 검이야! 저 검이 모두를 죽인 거야…….”

여귀진이 제왕 같은 고검을 가리켰다.

“저런 검만이 낼 수 있는 상처야!”

“단경왕태비인가?”

우연이 덜덜 떨며 물었다.

“아… 아닌 것 같아…….”

여귀진이 대답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 없어.”

희야가 두 사람의 어깨를 밀며 말했다.

“일단 들어가! 이 시체들이 되살아날지 모르니까.”

희야가 긴 창을 휘둘러 기름 항아리를 깨부수었다. 청유가 물처럼 사방으로 튀며 음전 한쪽 바닥이 불바다로 변했다.

“놈들이 돌문을 때려 부순다고 해도 한동안은 버틸 수 있을 거야.”

희야가 고개를 돌려 흔들리는 돌문을 바라보았다.

“그럼 우리도 못 돌아가잖아!”

우연이 말했다.

“돌아가도 어차피 죽어. 이쪽은 길이 없는 게 확실해.”

희야가 먼저 음전 앞의 거대한 국화가 새겨진 계단으로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빨리 가자!”

우연이 여귀진을 밀며 말했다.

여귀진은 번득 정신이 들었다.

“아소륵. 뭘 넋을 놓고 있어?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나…….”

여귀진의 낯빛이 조금 이상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

* * *

1) 안 썩고 마른 상태로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인간이나 동물의 시체. 미라를 가리킨다.

2) 모퉁이를 끼워 맞추기 위하여 서로 맞물리는 끝을 들쭉날쭉하게 파낸 부분.

3) 시체를 넣는 속 널과 겉 널을 아울러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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