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02화 (102/360)

102

6장. 검 (27)

달빛 아래 호수 가득했던 연꽃이 전부 졌다. 바싹 마른 연꽃 무더기에 눌려 축 늘어진 연줄기는 다소 스산해 보였다.

잡초가 무성한 공터에는 희야의 호아창이 꽂혀 있고 세 아이는 다리를 흔들며 물가에 앉아 있었다.

“죽상이랑 언제 보기로 한 거야? 왜 아직도 안 온대?”

기다림이 지루해진 우연이 물었다.

“약속한 시간은 벌써 지났어. 계속 안 오면 우리도 가자. 일대일로 붙자고, 마지막으로 제대로 겨루자고 해놓고 끝까지 날 인정 안 할 모양이야.”

“죽상 요즘 좀 이상하지 않아? 걔 꼴을 보면 곧 아사할 것 같아.”

“몰라. 그래도 힘은 정말 세.”

희야가 자기 팔꿈치를 만지며 말했다.

“저번에 연무장에서 녀석과 대련했을 때 팔을 다쳤어. 남회성에서 내 적수는 진짜 그 녀석뿐이야.”

“여긴 진짜 괴상해!”

우연은 황량한 연못을 쳐다보았다.

“목소리 낮춰!”

희야가 우연의 머리를 내리누르며 말했다.

“누가 순찰 돌고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여기는 화란원이고 이 연못의 물은 봉황지와 연결되어 있어서 여름에는 정말 아름다워. 지금은 연꽃이 져서 그래. 이따가 둔덕에 가서 연방을 따줄게. 서리 내리기 한 달 전의 연방이 가장 맛있어.”

“많이 먹어봤어?”

“이 연못의 연방 절반은 내가 먹었어.”

희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차피 따는 사람도 없는걸.”

“먹보! 매번 대추는 나눠가면서, 연방은 가져와서 맛보여 주지도 않냐!”

우연이 희야의 귀를 잡아당기려하자 희야가 얼른 피했다.

“가지고 나가기가 쉬운 줄 알아? 다음에 이것보다 큰 갑옷으로 바꾸면 가슴에 몇 개 숨겨서 나가볼게.”

“됐거든! 네 땀 묻은 걸 어떻게 먹으라고. 아소륵이랑 나눠먹으면 되겠네.”

“나도 먹어봤어.”

여귀진이 한쪽에서 대꾸했다.

“너도 먹어봤다고?”

“아까 희야가 절반을 먹었댔잖아.”

여귀진이 작게 속삭였다.

“나머지 절반은 내가 먹은 거야…….”

“아유! 지루해 죽겠다. 이렇게 몰래 숨어 있을 필요 없지 않아? 한참이 지났는데 개미 한 마리 안 지나가잖아.”

우연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다리 아래 그늘에서 목을 내밀었다.

“여기 정말 동궁 맞아?”

여귀진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동궁은 원래 이래. 넌 동궁이 어떤 줄 알았는데?”

“너희 얘기를 듣고 난 천지에 금사가 너풀거리고, 궁 안이 운무로 가득하고, 곳곳에 향기가 나고, 예쁜 궁녀들이 무리지어 다니는 곳인 줄 알았지! 이렇게 후미지고 으슥한 곳이라고 말했으면 봉황지에 가서 새우 낚시나 할 건데!”

“욱 세자의 궁전은 네가 말한 것하고 비슷해. 하지만 밖은 다르지. 로 선생님께서 그러는데 여기가 원래 백리 국주 선조의 유산이고 세자가 조상의 유산을 지키는 거래. 많은 곳에 전고(典故)가 있어서 함부로 수리도 못한댔어.”

“나 그럼 욱 세자의 침궁에 가볼래!”

“그건…….”

여귀진은 난감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이따가 무기고에 가서 금군 갑옷을 두 벌 훔쳐올게. 욱 세자가 잠들면 네 거처의 담을 넘어서 훔쳐보면 괜찮을 거야.”

희야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가서 연방 따올게. 너희는 일단 나오지 말고 있어.”

희야가 허리를 굽히고 재빨리 나갔다. 조심스럽게 좌우를 살피고는 가볍게 발을 들어 궁륭형 다리 위로 올라갔다. 다리 맞은편 얕은 물웅덩이의 연방이 따기가 가장 쉽다는 걸 희야는 알고 있었다.

다리 위로 올라간 희야는 흠칫 놀랐다.

유은이 다리 맞은편에 서 있었다. 새하얀 옷을 입고 머리에는 흰색 띠를 동여맸다. 넓은 옷이 바람에 펄럭였다. 대나무 장대에 옷을 걸쳐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유은은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그저 희야를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었다. 희야는 속으로 살짝 떨었다. 어째서인지 몸에 끈적끈적하게 식은땀이 흐르는듯했다.

“유은! 너 늦었다!”

희야가 큰 소리로 외쳤다.

유은은 대답없이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야, 뭐 하는 거야?”

희야는 쫓아가려 했으나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몹시도 찜찜한 기분이 발을 붙잡았다.

유은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입가에 음산한 미소를 땐 채 오른손을 들었다.

“북극성의 신이자 하늘의 제왕, 그 찬란한 빛은 시작도 끝도 없으리라.”

희야는 벼락에 두드려 맞은 기분이었다. 유은의 엄지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희야는 반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다만 천구의 표식이 저런 이의 손에 들어가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유은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갖고 있는 거 알아. 사슬에 걸어둔 거 봤어. 너와 난 반드시 승부를 내야 해. 따라와.”

유은은 다시 뒤로 돌아 걸음을 옮겼다.

소리를 듣고 따라나온 우연과 여귀진은 다리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 있는 희야를 보았다. 희야는 갑자기 뒤돌아 풀밭에 꽂아둔 호아창을 뽑아 들더니 앞서가는 유은의 뒤를 바짝 쫓았다. 우연과 여귀진도 희야의 뒤를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유은은 그리 빨리 걷지 않아서 아직 모퉁이를 돌기 전이었다. 심지어 잠깐씩 세 사람을 기다려주기도 했다. 다만 항상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다. 유은을 따라가면서 세 사람은 동궁의 지형이 거대한 거미줄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용되지 않고 버려진 긴 복도의 출입구가 수도 없었지만 유은은 전혀 힘들이지 않고 통로를 찾아내며 세 사람을 미지의 장소로 데려갔다. 보통 량풍원 주위로만 드나들었던 여귀진은 점점 방향을 잃어갔다.

유은은 불이 켜지지 않은 궁전의 문 앞에 섰다. 이곳은 거의 옛 궁전의 중심으로 개구리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했다. 유은은 걸음을 멈추고 싸늘하게 세 사람을 한 번 쳐다보았다. 달빛 아래 유은의 눈에서 흰빛이 반사되는 것 같았다. 유은은 대문을 밀어 열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희야와 세 사람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보고는 뒤따라갔다. 대전 문 앞을 지날 때였다. 여귀진이 몸을 바르르 떨며 높은 곳의 현판을 가리켰다.

“미… 미란궁!”

희야가 여귀진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정말 ‘미란궁’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마음속에 극도로 불길한 예감이 일었다. 무언가가 심상치 않았다. 희야가 여귀진에게 물었다.

“방금 그 길 알아?”

“몰라.”

“미란궁은 너도 와봤고… 나도 와 봤어.”

희야는 머리털이 쭈뼛쭈뼛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왜 길이 다르지?”

“동궁 안에 미란궁이 몇 개야?”

우연이 다가와 물었다.

“하나뿐이야.”

우연은 묵묵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 한가운데에 보름달이 높이 걸려 있었다.

우연이 중얼거렸다.

“종이로 발라놓은 달 같네…….”

“우리 따라 들어가지 말자. 유은의 행동이 좀 이상해.”

“퇴로를 찾기 힘들 거야…. 이건 ‘안(安)’이거든.”

우연이 작게 말했다.

“환술(幻術)의 결계지. 이 주위로 누가 강한 환술을 걸어놨어. 오늘은 보름달이 뜰 때가 아니야. 우리가 지나온 길도, 본 것도 사실 다 가짜야. 우리는 그저 궁 안을 빙빙 돈 거지. 죽상한테 속은 거라고.”

여귀진은 황급히 몸을 돌려 등 뒤의 문을 밀어보았다. 그제야 문이 전혀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이 들어온 뒤 떠다니는 그림자가 조용히 문을 걸어 잠근 것 같았다.

“동궁은 정말 요상한 곳이군!”

희야가 호아창을 꽉 움켜쥐었다. 우연이 겁 없이 말했다.

“우리 따라가 보자. ‘안’ 자체는 별로 무섭지 않아. 그냥 우리가 분별할 수 없을 뿐이지. 어쩌면 정말 매복을 심어놨을지도 몰라. 내가 뭐랬어? 저 자식은 제일 못 믿을 놈이라고 했지!”

세 사람은 서로 등을 맞댄 채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미란궁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귀진은 먼저 고개를 들어보았다. 백리욱이 서까래에 걸어두었던 금사는 없었다. 똑똑히 확인하려 눈을 재차 비벼 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진짜 같았다. 우연이 말한 ‘안’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우리더라 따라 내려오라는 건가봐.”

희야가 궁전 가장 안쪽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우연과 여귀진도 쫓아갔다. 벽돌 바닥에 사각형 입구가 열려 있었다. 좁고 긴 통로가 아래로 깊숙하게 나 있고 통로 양쪽으로는 혼을 불러오느 등롱 같은 촛불이 켜져 있었다.

여인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둥글게 감아 머리 위로 올리고 은테를 뿌리 쪽에 끼웠다. 그녀는 동 거울 속 자기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차분하고 망연했다. 물로 연지와 분을 지워내고 나니 깨끗한 얼굴만 남았다. 항상 머리를 높이 틀어 올렸었는데 생머리를 한데 동여 묶은 모양으로 바꾸자 얼굴이 조금 작아 보였다. 훨씬 어려보이기도 했다. 14년 전 팔송에 있었을 때 같았다. 여인은 살며시 자기 얼굴을 만져보았다. 환각인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꽤 오랫동안 여인은 생각했었다. 자신도 많이 늙었으니 곧 남회성의 먼지에 묻히게 될 것이라고. 그런데 지금 예전의 모습을 하고 보니, 아직도 자신에게서 젊음이 느껴져 놀라웠다.

몸을 일으킨 여인은 책상에 놓인 은도를 몸에 달라붙는 검은색 갑옷의 허리띠에 끼워 넣었다. 점잖으면서도 화려한 궁중 치마는 구석에 던져 두었다. 한 치의 틈도 남기지 않고 여인의 온몸을 바짝 죈 연갑(軟甲)은 몸매를 그대로 드러냈다. 약간 요염하면서도 표범처럼 날렵해 보였다. 여인은 문을 벌컥 열고서 달빛 아래 밤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공기가 안으로 들어가자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목구멍에서 일며 모든 먼지를 씻어내는 것 같았다.

여인은 문턱에 올라섰다. 방을 떠나기까지 마지막 한 걸음만이 남았다. 여인은 십수 년을 머물렀던 방을 둘러보았다. 꼭 달팽이 껍데기 같았다. 주위는 매우 조용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말을 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고요했다.

“야옹아. 앞으로 가. 돌아보지 마…….”

“야옹아. 날 보지 마! 내가 있는 여기는 길이 없단다!”

“야옹아. 산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잊어라. 원래 너는 자유로웠어야 해!”

문턱에 서 있던 여인이 불쑥 고개를 돌렸다!

“야옹아…….”

눈앞의 모든 광경이 서서히 흐릿해졌다. 그 사내의 혼백이 아직도 주위를 가볍게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깊은 밤 누군가가 침대 맡에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는 듯해 손을 뻗어 잡아 보면 손안이 텅 비어 있었던 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여인은 가슴이 미어지는 그런 쓸쓸함이 두려웠다. 그녀가 떠나면, 그 사내의 혼도 텅 빈 침상을 마주한 채 아무것도 잡히지 않음에도 계속 잡으려 손을 뻗게 될까.

여인은 이 작은 방으로 되돌아가 다시 모든 것을 걸어 잠그고 싶었다.

“떠나시오. 모든 것을 잊고 말이오. 그대는 자유로워야 하오.”

또 다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형상이 높이 뜬 밝은 달 아래 서 있었다. 그의 느른한 미소에는 따스함이 어려 있었다.

여인의 눈에서 마침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를 악물고 훌쩍 뛰어 나간 여인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별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자유로워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