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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검 (26)
9월 4일. 한밤중. 황월방.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느다란 바람이 지면을 따라 흐르며 대로를 쓸고 지나갔다. 검은 덮개를 쓴 마차가 조용히 방문(坊門) 아래 멈추어 섰다. 수레바퀴 아래에는 바람에 휩쓸려온 낙엽이 약간 쌓여 있었다. 어느새 가을이 가까워져 밤이면 바람에 약간의 한기가 감돌았다. 마차를 끄는 검은 말은 야북의 웅장한 만마(輓馬)로 긴 갈기와 말꼬리는 다듬어져 단정하게 묶여 있고 몸에는 두툼한 검은색 마의가 걸쳐져 있었다. 긴 시간의 기다림에도 말들은 경각심을 낮추지 않았다. 연신 콧망울을 실룩이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대한 말발굽이 이따금 지면을 두드려 달그닥 소리가 났다.
흑마들이 나직하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달그닥 소리는 점점 다급해졌다.
손 하나가 마차 발 뒤에서 뻗어 나와 말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이며 경계하는 말을 달랬다. 검은색 인영이 방문 뒤편에서 번쩍하고 나타났다. 발걸음이 매우 민첩한 자였다. 그자는 단번에 마차 횡목으로 뛰어오르더니 발 뒤로 사라졌다.
“익 종주.”
안에서 기다리던 이가 손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손님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쓰개를 벗고 은빛의 긴 머리칼과 수염, 눈썹을 드러내며 느릿느릿 앉았다.
“식 장군.”
식연은 웬일로 장삼을 입고 있지 않았다. 온몸에는 새카만 무소 가죽 갑옷을 두르고 급소는 얇고 단단한 강철 조각으로 보호했다. 묵직한 검은 허리춤에 비끄러매지 않고 등 뒤에 단단히 묶어 두었다. 흡사 유랑하는 무명의 무사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마차 방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여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건가?”
익천첨이 차갑고 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 시간이 있어서요.”
“자신 있는가?”
잠자코 있던 식연이 믿음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익천첨은 식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회청색 눈동자에는 유달리 날카로운 기색이 어려 있었지만 식연은 피하지 않고 눈을 맞췄다.
익천첨이 손을 뻗었다.
“나도 담배 한 대 피워도 되겠는가?”
순간 멍해진 식연이 웃으며 말했다.
“우족은 담배를 안 피우는 줄 알았는데요.”
익천첨은 의아한 식연의 눈빛은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연초를 담아둔 가죽 자루를 가져가더니 허리 뒤쪽에서 담뱃대를 하나 꺼냈다. 원색의 흑단 나무 막대기였는데 너무 많이 만지작대서 반질반질해져 있었다.
익천첨은 익숙하게 연초를 쑤셔 넣고는 식연의 담뱃대를 빌려와 자기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식연은 익천첨이 오른손을 장포 소매 안에 가린 채 아기를 안은 것처럼 가슴 앞으로 단단히 오므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익천첨은 연기를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가느다란 선으로 엉긴 담배 연기가 멀리 흩날려갔다. 익천첨은 마침내 안정된 손을 편안하게 무릎에 내려놓았다.
“일반 우족은 담배를 피우지 않지. 청주는 연초가 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나는 달라. 그렇지 않다면 사달극 성방의 반역자가 되지도 않았겠지. 칠십 먹은 역당이라니, 너무 늙은 것 같지 않나?”
익천첨이 비싯 웃었다.
식연은 불현듯 그가 좀처럼 웃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당이라뇨? 왜죠?”
“나는 천구니까. 그리고 내 친아우를 죽였으니까.”
노인의 눈에는 너무 많은 사연이 숨겨져 있었으나 식연은 읽어낼 수 없었다. 식연은 고개를 숙이며 가볍게 푸른 연기를 한 모금 뱉어냈다. 연기가 피어올라 사위가 아물아물해졌다. 두 사내는 잠자코 담배를 피웠다. 이내 마차 안은 숨이 막힐 정도의 지독한 담배 연기로 가득 찼다. 식연은 담배 연기가 흩어지도록 손으로 마차 창문의 발을 젖혔다. 맑디맑은 빛 한 줄기가 눈앞을 휙 스쳤다. 거울처럼 반지르르한 봉황지가 식연의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없는 배 한 척이 나부끼듯 지나가고 있었다. 못 수면에 반사된 달빛 아래로 문묘의 높은 탑이 우뚝 서 있었다.
종소리가 멀리서 전해져 왔다. 종소리는 공허하고 낮게 울려 퍼졌다. 종소리의 울림 때문이었을까, 바람 때문이었을까. 봉황지에 소리 없이 물결이 일며 물속에 비친 달이 부서졌다.
잠자코 있던 식연은 조용히 감탄하며 말했다.
“봉황지는 정말이지 남회성의 보배입니다. 어느 날 제가 이곳을 떠나게 된다면 제 꽃밭 외에 이 연못의 종소리가 그리울 겁니다. 술에 취했을 때마다 이곳에 오면 술이 깼지요. 물속의 달빛을 마주하면 어쩐지 이번 생에 잘못한 일이 너무 많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 여인을 포함해서 말인가?”
식연이 불쑥 고개를 들자 담뱃대가 움칫했다. 타들어 간 담뱃재가 흩날리며 공기 중에서 반짝했다가 꺼졌다.
익천첨이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내가 곧 썩어 문드러질 그런 늙은이 같아 보이지는 않겠지? 이래 뵈도 젊었을 때 사달극 성방에서 가장 인기 많은 사내였네. 그때는 150보 밖에 있는 여인의 머리 위 사과도 단번에 쏘아 떨어뜨렸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어. 소녀들은 너도나도 내 과녁이 되려 했지. 그런데 딱 한 번… 실수로 한 소녀의 이마를 다치게 하고 말았네.”
“예뻤습니까? 그 후에는요?”
“그 후에 나는 푸른 바다의 매가 되었고 그녀는 내 아우의 부인이 되고 사달극 성방의 안주인이 되었지.”
“그 일 때문에요?”
“복잡한 사연일세. 사실 아주 오래전 일이지.”
익천첨은 돌연 웃으며 창가에 담뱃대를 툭툭 털었다.
“천구의 종주 둘이 마차 안에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랑 얘기나 나누고 있다니, 밖으로 새어 나가면 웃음거리가 되겠군. 오늘밤 계획에 대해서나 다시 얘기해 봄세.”
“이 마차에는 홍려시 표식이 있어 서문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가 수비군 중에 믿을 만한 심복을 몇 명 심어두었는데 그들이 조릉 입구 근처를 순시할 것이니 왕릉에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유일한 걱정이라면 순찰 도는 자류영 군사들이 알아채는 것입니다. 조릉에는 크지 않은 입구 하나뿐이라 그들에게 가로막혀 칼부림이 일어나면 종주 둘이 문제가 아니라 종주 일곱 명이 다 있어도 빠져나오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하 궁전에 들어가 검을 가지고 나와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안내를 해줄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지요. 종주께선 준비되셨습니까?”
“어쩌면 이것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기회겠지. 내 최선을 다할 걸세.”
익천첨은 천천히 오른팔을 덮고 있던 소매를 걷었다.
“이것은…….”
식연이 깜짝 놀랐다.
우족의 사자(使者)를 본 적 있었다. 그들은 나무 조각이나 겹겹이 칠해 붙인 삼베로 만든 가벼운 갑옷을 입었다. 우족의 몸은 가벼워서 무거운 금속 갑옷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익천첨은 오른팔 전체에 수면(獸面)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식연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갑옷이었다. 교묘하게 몸 전체를 감싸면서도 관절을 움직일 수 있는 형태였다. 주먹 덮개와 연결된 부분에서는 기이한 짐승의 송곳니 같은 날카로운 장침이 나왔다.
익천첨은 손바닥을 펼쳤다가 주먹을 힘껏 쥐어 보였다. 관절 부위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내 선조의 갑주라네. 전대 동륙 황제가 하사한 선물이지. 비갑(臂甲)1)뿐이지만, 하락의 장미금과 탁은을 섞어 거듭 단조해 만든 것이네. 창운고치검처럼 이 자체에 주술이 걸린 무기지. 단조할 때 장미 문양을 따라 비술 대가의 힘을 갑옷에 영원히 봉인해두어서 보통 무기보다 충격과 찔림에 강해. 그 외에도 불가사의한 점이 많은 물건이네.”
익천첨은 믿기 힘든 표정을 하고 있는 식연을 쳐다보았다.
“창운고치검의 검자루를 쥐러 가면서 혼백이 빨릴 각오를 어찌 안 할 수 있겠나? 확실히 내 의지만으로도 검 가까이 다가갈 수야 있지만 검자루를 쥐고 그것을 가지고 나오는 일은 도무지 자신이 없네. 주인을 잃은 창운고치검은 속박에서 풀린 악룡이나 마찬가지야. 그 검에 죽임을 당하고 빨려 들어간 영혼은 이미 의식을 잃고 영혼 가장 깊은 곳에 낙인처럼 박힌 원한만 남은 상태야. 창운고치검은 천구의 성물에서 사악한 무기로 타락했어. 이 비갑이 그것의 원한에 대항할 힘을 주기를 바란다네.”
식연은 손으로 비갑을 쓸어보았다.
“따뜻하군요.”
“맞아. 손상된 부분도 알아서 천천히 회복된다네. 이걸 착용했던 내 아버지는 학설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고 결국 비갑 전체가 꿰뚫렸었어. 그런데 그 후로 15년 동안 나는 이것이 하나하나 자라나는 것을 직접 보았네. 이젠 그때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게 되었지.”
식연은 깊게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대비가 되어 있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저는 창운고치검에 다가가기가 그리 어려울 줄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자네는 유장길이 그 검을 물려받을 때의 의식을 보지 못했으니 그리 말할 수 있지. 절대 창운고치검을 한 덩이 금속으로 보지 말게. 그것은 살아있어. 분노할 때는 검 전체가 녹아내리듯 흐른다네. 그것에 닿는 모든 물건이 갈려 나가고 금속은 함께 녹아 버리지. 마치…….”
익천첨이 얼굴을 살짝 구기며 말을 이었다.
“수천수만의 원혼(冤魂)이 지옥에서 한데 깨어나… 닿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하는 것 같다네!”
익천첨의 목소리는 낮지만 힘이 있었다. 식연은 그의 목소리에서 저항하기 힘든 중압감을 느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식연은 익천첨 같은 이도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어쨌든 검이지 않습니까. 억제할 방법이 정녕 없는 것입니까?”
“혼이 새겨진 무기는 영혼의 힘을 빌리지. 미혹술이 떠도는 영혼의 원한을 빌리는 것처럼 말이야. 자네가 굳센 의지로 영혼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은 자네에게 파고들지 못하고 실패하게 돼. 그때 자네에게 굴복하고 주인으로 받아들인다네. 하지만 검을 잡는 사람의 마음이 그늘 없이 수정처럼 깨끗해야 해. 마음속에 남아 있는, 남들에게는 말 못할 모든 일이 죽은 영혼에게는 자네 몸을 집어삼킬 돌파구가 되니까!”
익천첨은 갑자기 식연을 쳐다보며 웃었다.
“한번 시험해 보겠나? 어쩌면 단숨에 천구를 주재하는 미래의 대종주로 부상할지도 모르잖나.”
식연은 아연해졌다. 잠시 후, 그는 실소하며 대답했다.
“시도야 해볼 수 있겠지만 자신은 없습니다…….”
“농담이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익천첨은 다시 비갑을 덮으며 말했다.
“사람은 오래 살수록 자주 흔들리곤 하지. 태어날 때는 마음이 수정처럼 투명하지만 차츰 검게 변해 더는 들여다볼 수 없게 돼. 천구든 진월이든 똑같아. 식연, 자네도 후회하는 일이 있겠지. 전장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겠지만 개중에는 죽어 마땅한 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가 있을 거야. 종국에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호해지고 가늠할 수 없게 된다네. 평생 잘못한 일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했었지. 한데 사람이 어떻게 젊은 시절의 꼿꼿함을 평생 견지할 수 있겠나?”
“이 생에 잘못한 일이 너무나도 많지요…….”
식연은 묵묵히 담배를 피웠다.
“유장길이 이 검을 이어받았을 때는 올곧은 천구 무사였겠지요?”
식연은 푸른 연기를 뱉어내고 말했다.
“지금의 우리보다 올곧았을 겁니다.”
* * *
1) 팔을 보호하는 갑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