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100화 (100/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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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검 (25)

성제 원년. 9월 초사흘.

유풍당.

가을 초입에 들어선 여름의 끝 무렵. 오동나무는 까매 보일 정도로 짙푸르렀다. 시커먼 나무 그늘이 유풍당 전체를 뒤덮었다. 식연은 창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수풀이 무성한 못을 바라보았다.

그의 곁에 선 식원이 물었다.

“숙부. 오늘 청앵사(聽鶯舍) 연회는 조정 대신들이 각각 얼마씩 돈을 내어 만든 자리래요. 하당의 고위 관리들도 열 분이나 되고요. 숙부께선 정말 안 가실 겁니까?”

“안 간다. 네가 대신 알려라. 나는 오늘 기다릴 사람이 있다.”

식원은 얼이 빠진 얼굴로 제 숙부를 한참 쳐다보았다. 어쩐지 오늘 숙부가 좀 이상했다. 무전도지휘사 식연이 누군가를 기다렸던가? 대략 국주밖에 없지 않았나?

“식원. 꽃은 다 졌느냐?”

“아뇨. 국화가 곧 필 겁니다. 오늘 아침에 제가 비료도 주고 물도 뿌려줬어요. 올해 국화 대회에서 우리 국화가 분명히 1등할 거예요.”

“음.”

식연은 무심하게 대꾸하고는 물었다.

“자림추는?”

“자림추는 졌지요. 자림추는 국화보다 못해요. 꽃이 피어 있는 시기가 너무 짧습니다. 내년에는 차라리 작약으로 바꾸시지요.”

“원아. 남회성보다 따뜻하여 일 년 내내 꽃이 지지 않고 항상 울긋불긋 꽃이 피어 있는 곳이 있더냐?”

식원이 머리를 긁적이며 한참을 막연해하다가 대답했다.

“남회보다 따뜻한 곳이라면… 아마 월주뿐이겠죠? 숙부, 월주로 가시게요? 그곳에는 뱀과 벌레가 횡행하고 장독(瘴毒)도 있고 무당들이 고술(蠱術)도 쓴다던데요.”

식연이 식원을 흘끗 쳐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바보 같은 녀석.”

동궁, 서배전 뒤의 작은 가옥.

여귀진은 조용히 문을 두드린 뒤 문을 열었다. 여인이 손을 볼에 괸 채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턱에는 자줏빛 꽃 화분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소 첩여. 저번에 빌린 책 돌려드리려고 왔어요. 다 읽었거든요.”

여귀진이 공손하게 말했다. 소 첩여는 책을 받아들고 여귀진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다 읽으셨습니까?”

“네. 로 선생님께서 요사이 발전했다며 칭찬해 주셨어요.”

“원래 열심히 하시잖아요.”

소 첩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자는 착한 아이십니다. 제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세자와 같은 아이였으면 좋겠어요.”

여귀진은 쑥쓰러워졌다.

“혹시 기분 안 좋은 일 있으세요?”

그를 칭찬하는 여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약간 어려 있었지만 어쩐지 여귀진은 그 미소가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 편치 않았다.

여인은 살짝 멍했다가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일 없습니다. 다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해가 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어도 모르겠어서요.”

“결정요?”

소 첩여가 고개를 돌려 여귀진을 보았다. 쏟아지는 해질녘 태양빛에 곱고 아름다운 옆얼굴의 윤곽이 반투명하게 드러났다.

“세자…….”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한 사람은 일생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좋아할 수 있을까요? 세자도 좋아하는 이가 있으십니까? 많은 걸 해주고 싶고 그 일이 얼마나 힘들든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으신지요?”

여귀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생각했다.

“아버지, 어머니, 대합살, 소마, 희야, 우연…. 그리고 유모와 아마칙도 있어요. 제가 다 좋아하는 사람들이에요.”

여인이 웃었다.

“너무 많잖습니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리 넓겠어요. 고작 몇 사람 좋아할 수 있을 뿐인걸요.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 생각이 들만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있으십니까?”

“있죠.”

여귀진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어릴 때는 커서 가륜첩 유모에게 장가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유모요?”

여인이 아연해져 물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파막로 숙부가 그러셨거든요. 가륜첩 유모가 나중에 시집을 가면 제 유모를 할 수 없다고요. 자기 남편이랑 살고 자기 자식을 키워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여귀진은 쑥쓰러운 마음에 바닥에 비비적대고 있는 자기 발끝을 보며 말했다.

“제가 유모에게 장가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럼 유모가 평생 나랑 살 수 있을 테니까요.”

소 첩여가 또 웃음을 터뜨렸다. 여귀진은 소 첩여가 그리 많이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소 첩여가 여귀진의 손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건 언제 이해하게 되셨는데요?”

“나중에… 유모가 죽었어요.”

여귀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영원히 저와 함께할 수 없게 됐죠.”

“가엾어라…….”

여귀진은 다시 웃어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전 운이 좋은 편이죠. 아버지도 계시고 어머니도 계시고 소마도 있으니까요. 나중에 아버지께서 영씨 부인을 제 유모로 보내셨는데 부인도 제게 무척 잘해 주셨어요.”

여인은 아연해졌다.

“그럼… 가륜첩 유모가 아직 생각나세요? 혼자 죽어서 많이 외롭고 쓸쓸할 거잖아요.”

“생각하죠. 그래서 처음에는 영씨 부인을 유모라고 부르기 싫었어요. 하지만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가륜첩 유모는 살아 돌아오지 못해요. 가끔은 무섭기도 해요…….”

여귀진은 창턱에 기어 올라가 자림추 화분 두 개를 쳐다보며 말했다.

“서서히 유모를 잊게 될까 봐요.”

소 첩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잊지 않으실 겁니다. 어떤 일은 평생 잊히지 않기도 하죠.”

“첩여도 누군가 떠올랐나요?”

“네.”

소 첩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어떤 이가 있었습니다. 제게 살날이 하루라도 더 있는 한, 그를 따라 세상 끝까지 가겠노라고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그는 죽었습니다. 꿈에서 늘 그를 보고 아직도 그의 목소리가 제 주위에 맴도는 것 같아요. 이제 떠나려고 생각하니 그의 영혼이 이곳에 남아 배회하고 배회하다가 저를 못 찾고 외로울까 봐 걱정이 되어서요.”

소 첩여는 무언가를 떨쳐내고 싶은 듯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많이… 외로울까 봐.”

“돌아와서 보면 되잖아요.”

여귀진이 말했다.

“저는 초원에 돌아가면 가륜첩 유모를 위해 커다란 묘를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매년 봄이 되면 보러 갈 거예요. 그때면 파지국이 피는데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의 황금빛이 끝없이 펼쳐지죠. 가륜첩 유모도 무척 좋아할 거예요.”

“그것으로 될까요?”

여귀진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대합살이 그랬어요. 자꾸 슬퍼하지 말라고요. 저도 나중에 대합살처럼 늙은이가 될 텐데 그때가 되면 다 까먹을 거라고 했어요. 저야 잊고 싶지 않지만 가륜첩 유모도 제게 그랬거든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고요. 사실 즐거운 일들은 언제고 많이 생겨요. 처음 남회에 왔을 때는 저 혼자 외로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벗이 둘이나 생겼어요.”

“벗이라…….”

여인이 나직하게 탄식했다.

“세자도 참. 세상 일이 그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첩여는 왜 그리 우울해해요?”

“세자도 많이 울적해하시잖아요. 그래도 여기 머무는 동안은 매일 즐겁게 지내세요. 기왕 좋은 벗도 생기셨으니까요.”

순간 희야와 우연이 머릿속에 떠오른 여귀진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를 돌보는 법을 배우면 삶이 즐거울 거예요.”

소 첩여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세자 말씀이 맞습니다. 아침의 태양을 볼 수 있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어요?”

소 첩여는 여귀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얼굴을 그의 얼굴에 가볍게 비비듯 문질렀다.

여귀진은 그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담담한 말속에서 이별의 기색이 느껴졌다.

“숙부. 문밖에서 누군가 서신을 던졌습니다.”

식원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식연은 의아해하며 다가갔다. 먹으로 시원하게 그려낸 산수화였다. 거울 같은 커다란 호수에 호숫가 옆으로는 호수를 향해 창이 난 작은 집이 그려져 있었다. 마침 날씨가 습한 탓에 먹물이 완전히 마르지 않아 그림 위로 물빛이 어렴풋이 반짝였다. 그림을 잘 모르는 식원은 그저 깨끗하고 아득한 곳의 풍경이구나 싶었다. 인간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경치 같았다.

그림 옆에는 작은 해서체로 쓰인 글귀가 있었다.

창밖의 산은 눈으로 뒤덮이고

천추(千秋)의 호수는 잔잔하구나

깊은 숲 오랜 벗이 찾지 않으니

앉아서 서리 가득한 길만 보누나.

식연이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숙부, 이것이…….”

“진북국의 풍광이다. 대추나무 숲속의 작은 집과 창밖에 있는 청야호를 그린 것이지.”

“숙부께서는 가보셨습니까?”

식원이 의아하게 제 숙부를 쳐다보며 물었다. 식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가보았지. 매우 조용한 곳이다. 참, 연회는 거절했느냐?”

“대인들 계신 곳에 가서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그만둬라. 거나한 술자리가 펼쳐지는 연회가 아니냐. 생일이기도 하니, 내 연회에 참석해야겠다.”

“기다리는 이가 있다지 않으셨습니까?”

식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보 같은 녀석. 그이는 이미 왔다. 이 그림 속에 있잖느냐.”

식연은 성큼성큼 문을 나섰다. 대관절 무슨 소리인지 궁금해진 식원은 그림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그제야 창가의 묵적이 창가에 기대 호수를 바라보는 인영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들었다.

튀어나온 기다란 나뭇가지에 앉은 희야는 반동하는 나뭇가지 힘으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그는 물 한 단지를 창날에 뿌리고 숫돌로 호아창 창날을 갈았다.

“희야. 그만 흔들어. 우리 다 떨어지겠어!”

더 높은 곳의 나뭇가지에서 우연의 청색 치맛자락이 희야의 머리칼까지 드리워졌다. 우연은 맨발로 희야의 머리를 툭툭 밟았다.

우연과 나란히 앉아 있던 여귀진은 살짝 긴장하며 엉덩이 아래 나뭇가지를 꽉 붙잡았다. 줄곧 높은 곳을 무서워하던 그였지만 우연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억지로 끌려 올라와 함께 먼 곳을 구경하고 있었다.

희야가 우연의 발을 잡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냉큼 발을 거둬들인 우연이 나뭇가지에 쪼그리고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희야를 향해 혀를 비죽 내밀었다.

“남의 발을 만지려고 하다니. 낯가죽이 성벽보다도 더 두껍네! 너 또 뭐 하러 가려고 창을 갈아?”

“곧 동궁을 떠나거든. 장군께서 아까 오후에 명령하셨어. 모든 금군은 내일 밤에 쉬고 모레 있을 연무 대회를 준비하라고 말이야. 내가 연무 대회에 못 가게 되니까 유은이 쪽지를 주더라. 내일 밤에 마지막으로 한판 겨뤄보자고.”

“정말 그 죽상이랑 겨루게? 누가 이기면 어때서? 어차피 너는 동궁을 떠나잖아. 그리고 그 죽상이 애들 한 무더기 데리고 매복하고 있으면 어떡해?”

여귀진이 끼어들었다.

“괜찮아. 넓은 장소를 찾았거든. 안 되면 도망칠 수도 있어. 나도 희야 곁에서 망을 봐줄 거고.”

“아유. 그래. 알았다, 알았어.”

우연은 고개를 돌리더니 여귀진의 팔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잘됐다, 아소륵. 나 태자가 사는 곳에 가보고 싶어.”

“어?”

여귀진이 머뭇거렸다.

“거기는 동궁이야. 금군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어서 출입이 쉽지 않아.”

“그러니까 잘됐다는 거지. 내일 밤에는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 아냐?”

“하지만 궁문 수비군이랑 욱 세자 처소, 조릉의 금군은 철수하지 않아.”

“나 궁에 갈래! 꼭 갈 거야!”

우연이 눈을 부라리며 여귀진을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순간 넋이 나간 여귀진은 그만 발아래 균형을 잃고 아래로 고꾸라졌다.

깜짝 놀란 희야가 황급히 두 팔을 벌려 여귀진을 받으려는데 이미 위에서 우연이 여귀진의 옷깃을 그러잡았다. 여귀진은 그 힘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다시 몸을 뒤집어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다시 나뭇가지 위로 올라간 여귀진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우연. 말썽 좀 부리지 마!”

희야도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

우연은 불퉁하게 대꾸하고는 안심시키듯 여귀진의 머리를 토닥였다.

“우연? 우연? 나는 괜찮으니까, 화내지 마.”

여귀진은 우연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 먼 곳을 바라보기만 하자 도리어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냥 갑자기 아버지가 생각나서.”

우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

“아니.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 벌써 돌아가셨다고 들었어. 가장 높은 나무에서 뛰어내리셨대.”

우연은 까치발을 디디고 서서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 저무는 태양 아래 우연의 피부와 눈썹 언저리가 투명한 흰색과 금빛으로 물들었다. 자그마한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담담했다.

여귀진은 고개를 들어야 우연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바람이 고요히 우연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귀진은 불현듯 우연도 맨날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내가 궁에 데려갈게.”

여귀진이 말했다.

“저리 가시지!”

희야가 흘겨보며 말했다.

“너는 길치잖아. 궁 안의 길은 나보다도 모르면서. 내가 너희들 데리고 몰래 들어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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