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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검 (23)
그러자 순식간에 횃불이 전부 꺼졌다. 아까보다 더 귀를 찌르는 듯한 벌 소리가 사방팔방에서 몰려들었다. 쏟아져 내리는 은색 달빛 속에서 익천첨은 깨달았다. 자신이 포위되었다는 것을. 움직이는 순간 거미줄에 절단이 날 것이며 움직이지 않으면 봉침에 찔려 죽게 될 것이었다.
스승님이 설명해 주었던 거미줄의 끔찍함이 떠올랐다.
“그늘에 완전히 숨겨진 살인 무기다. 다리를 움직이면 다리가 잘리고, 손을 움직이면 손이 잘리지. 네가 전력을 다해 피하면 그 힘에 네 몸이 산산이 조각날 것이다. 단… 거미줄을 보고 그것을 따라가 거미를 잡으면 살 수 있다.”
익천첨은 순간 몸을 동그랗게 움츠리며 몸을 낮추었다!
봉침이 머리 위로 허탕을 치고 날아갔다. 익천첨은 고개를 들었다. 검은 형체들이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가닥가닥 별하늘을 가르고 있는 은색 줄들이 보였다!
그는 벌떡 뛰어올라 오른손으로 희미하게 번쩍이는 은색 줄을 잡았다. 은색 줄은 그의 손을 베지 못했다. 그는 거미줄 전체를 손바닥에 쥐고서 힘껏 잡아당겼다. 어둠 속에서 여인의 나직한 비명이 들려왔다. 익천첨은 거의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손에 쥔 채 그것을 따라 빠르게 걸어갔다. 다리 바닥의 나무판 하나가 갈라져 있었다. 그 안에 숨어 있던 ‘거미’가 당겨져 나왔다. 익천첨에게 붙잡힌 채 거미는 바닥에서 몇 걸음을 굴렀다. 익천첨은 돌아서며 커다란 매처럼 거미를 덮쳤다. 그는 창을 사용하지 않고 손에 쥔 거미줄로 상대를 칭칭 휘감은 다음 호되게 매쳤다!
달빛 아래 익천첨과 여인은 마주한 채로 가만히 멈추어 있었다.
“빛이 한 종류밖에 없을 때 거미줄은 형태가 드러나지. 그래서 다리 사방에 횃불을 켜두었을 테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비밀은 천라의 살수만 아는 게 아니야. 정체가 뭐냐?”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익천첨의 눈에 보이는 것은 원망 어린 눈뿐이었다.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네가 창운고치검의 수호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 사실 어떤 사람인지 늘 궁금했었지.”
여인이 몸에 두른 검은 갑옷은 어느새 하락인이 단조한 가느다란 금속 줄에 옥죄어 망가졌다. 몸에 달라붙는 검은색 가죽 갑옷은 얇게 벗겨낸 무소 가죽에 안쪽으로 상어 가죽을 덧댄 다음 약수(藥水)에 담갔다가 볕에 말리기를 수십 번 하여 만든 것으로 검과 창을 다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익천첨이 재차 힘을 가한다면 그녀는 자신의 거미줄에 피투성이가 될 터였다.
익천첨은 여인의 너울을 떼어내고 담담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종주께서 이기셨습니다. 절 죽이시지요.”
“내 마음이 약해질 거라는 생각은 버려.”
익천첨이 냉담하게 웃었다.
“나는 유장길이 아니야. 네 아름다움에 연민을 느끼지 않아!”
“마음 약해지실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인의 목소리는 가냘팠다.
“천무자, 사달극 성방의 주인, 푸른 하늘의 매. 너무나도 위대하신 분이지요. 그 누구도 가엽게 여기지 않고 당신의 천구와 그 뜻만을 중시하지 않습니까. 자, 죽이세요. 이미 명을 내려 내 낭군을 죽였잖습니까. 이제 나를 죽이세요. 그럼 모든 게 끝납니다.”
“어리석군!”
익천첨이 여인의 멱살을 잡아채 들어 올렸다.
“천구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아느냐? 창운고치검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 부군을 위해 내게 복수하겠다고? 한데 너는 유장길에게 시집을 가기는 했었느냐? 너는 유장길의 아내가 아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고 있어!”
여인은 아연해졌으나 이내 큰 소리로 외쳤다.
“압니다!”
“웃기는군!”
익천첨이 검정 외투 안의 나무틀을 가리키며 말했다.
“넌 저 꼭두각시나 다를 바 없다. 유장길 손바닥 위의 꼭두각시! 유장길은 자기가 궁지에 몰렸을 때 네가 그를 대신해 그 검을 지켜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때 그는 의지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거든. 네가 그의 유일한 조력자였지. 그런데 넌 무엇을 위해서였느냐? 사랑? 그것이 네가 그를 위해 저지른 수많은 일에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익천첨을 노려보았다.
“안 믿는 것 안다. 하지만 생각해 봐라. 내가 네 존재를 어찌 알며, 또 어떻게 그해 유장길의 행적을 따라 창운고치검을 찾으러 올 수 있었겠느냐? 이 모든 것이…….”
익천첨이 어조를 높여 말을 이었다.
“네가 낭군이라 부르는 자가 내게 직접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뇌성벽력이 머리 위로 내리치기라도 한 듯 아리따운 여인의 눈이 돌연 커다래졌다. 눈빛은 온통 공허해졌다.
여인은 돌연 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약간 기이하게 뒤틀린 듯한 목소리였다.
“거짓말!”
“거짓말일까?”
익천첨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유장길이 너를 속일 리 없다고 생각하느냐? 그럼 죽기 전에 그가 이미 혼인했던 것도 알고 있느냐? 갓 낳은 자식도 하나 있었던 것은 알아? 이 모든 사실을 알고서도 너는 그가 너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믿느냐? 유장길이 네게 한 가지를 속일 수 있었다면 두 가지도, 더 많은 것도 속일 수 있는 것이다. 너는 매(魅)다, 맞느냐? 사람의 마음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아. 여기는 네가 올 곳이 아니다.
널 죽이지는 않으마. 하지만 다음은 없다. 검은 내가 반드시 가져갈 것이다! 유장길은 내게 검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누군가를 남겨두기 위해 네게 검을 지키도록 한 것인지도 모른다!”
달빛 아래 여인의 공허한 눈 속에서 익천첨은 돌연 희미한 반짝임을 보았다. 고요하고 심원한 여인의 눈빛은 망연히 다가가 뛰어들고 싶어지게 만드는 비통한 호수 같았다. 익천첨은 붙잡고 있던 여인을 손에서 탁 놓았다. 그는 커다란 외투로 여인의 드러난 몸을 덮어주고는 뒤돌아 떠났다. 한참을 가다가 그는 다시 돌아보았다. 달빛이 쏟아지는 다리 위,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공허한 두 눈은 밤하늘을 향한 채로.
익천첨은 생각했다.
‘나타날 것은 다 나타났군. 청동의 문이 곧 열리겠어…. 천구의 승리로 가는 문일까, 멸망으로 통하는 문일까.’
8월 4일.
유풍당.
“숙부님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
식원이 웃으며 말했다.
“근데 아마 네가 직접 찾아야 할 거야.”
희야는 식원이 웃는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했다. 식연의 거처인 유풍당으로 오라는 명령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명목상 식연의 근위병이기는 하지만 연무장에서 몇 번 본 것이 전부였다. 대나무 속에 가려진 원형 문을 돌아가자 앞이 갑자기 확 트였다. 정원 안에 빽빽하게 자라 있던 오래된 오동나무가 이곳에서는 단 한 그루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적자색 꽃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꽃잎 마다마다 흩뿌려지는 정오의 햇살에 꽃잎이 투명하게 빛났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희야는 남회성 안의 금싸라기 땅에 이토록 큰 화원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번화가 내의 이 정도 큰 땅은 적게 잡아도 금수 십만 냥의 가치가 있을 터인데 작디작은 유풍당 정원 뒤에 숨어 있어 누구도 알지 못했다.
희야는 드넓은 꽃밭을 보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장군!”
희야는 아득히 넓은 보랏빛 꽃밭에 대고 소리쳤다.
“허허.”
꽃밭에서 웃음기 베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디어 이곳으로 오는 길을 찾았구나.”
허리 높이의 꽃밭 속에서 돌연 한 사람이 일어섰다. 검은색 도포를 걸친 사내는 도포 자락을 허리춤에 끼우고 있었다. 옷 위로 연보라색과 담홍색 꽃잎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긴 천 조각으로 뒤통수에 질끈 묶고 있었다. 식연은 세심하게 꽃을 떼어내며 꽃밭에서 걸어 나왔다. 발가락이 드러나는 미투리를 신은 발에는 흙탕물이 잔뜩 묻어 있었다.
“장군…….”
희야는 이런 모습의 식연이 낯설었다.
“꽃을 심고 있었다. 너는 이곳이 처음이니 구경시켜 주마.”
식연이 손짓을 해 보였다.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바로 이 꽃들이다. 너는 내 근위병이니 몰라서는 안 되겠지.”
“전장에서 세운 공로가 아니라요?”
“전장에서 세운 공로는 먹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는데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는 것에 어찌 비하겠느냐?”
식연이 보라색 꽃밭을 가리켰다.
“자림추라 한다. 가을에 피는 꽃들 중에서 가장 생명력이 강하고 가장 강렬하게 피어나지. 얇디얇은 꽃잎을 봐라. 진북의 산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야생화라고 누가 믿겠느냐?”
“네…. 자림추.”
“무척 향기롭단다.”
식연이 한 송이 꺾어 희야에게 건넸다.
“하지만 향기가 멀리 퍼지지 못하지. 아주 가까이 다가가야 맡을 수 있어. 진북에서 꽃을 가꾸는 사람이 그러더구나. 장미는 명사(名士)의 향기로 그 향이 날카롭고 강렬해 멀게는 천 리까지 퍼져나가지만 자림추는 국사(國士)의 향기라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며 저만의 곧은 기개가 있다고.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우리 하당의 꽃을 가꾸는 상인들과 달라. 하당 상인들은 야래향(夜來香)이야말로 국사의 향기라고 하지. 깊은 밤에 피어도 알아서 그 향기를 맡고 오는 사람이 있다면서 말이야.”
“야래향은 향이 어떤데요?”
희야가 물었다.
“당연히 사창가의 향이지.”
식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깊은 밤에 피어도 알아서 그 향기를 맡고 오는 사람이 있다지 않으냐. 말하고 보니 정품에는 들지 못하겠구나.”
희야는 조심스럽게 꽃잎을 코끝에 가져다댔다. 바짝 다가가야만 맡을 수 있을 만큼 엷은 향기가 그윽하게 코끝을 맴돌다가 금세 사라졌다. 네 장의 나비 날개 같은 연보랏빛 꽃잎이었다.
“저쪽은 십리상홍(十里霜紅)이다.”
식연이 조금 먼 곳의 붉은색 꽃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하당은 가을 장미로 유명하지만 이 세상에서 남회성에만 피는 꽃은 저 한 종류뿐이다. 한 달 반이 지나면 서리가 내리는데 서리가 내린 꽃잎은 붉은색과 흰색, 두 가지 색을 띤단다. 얼음 위에 불을 지핀 듯한 보기 드문 절경이 펼쳐지지…….”
해그림자가 어느덧 하늘 한가운데를 지나갔다. 희야는 식연의 뒤를 따라가며 그가 주절주절 늘어놓는 원예 이야기를 들었다. 머릿속은 점점 오리무중이 되어갔다. 최근 희야는 우연, 여귀진 두 사람과 함께 남회성 안에서 못된 짓을 일삼고 다녔다. 동궁의 무뢰배들보다 더 불량했다. 그러다 갑자기 이곳에 불려왔기에 장군이 질책할까 봐 걱정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자신이 가꾸는 꽃 얘기만 했다. 주머니에 군영에서 가져온 찐빵 반 개가 있었다. 희야는 빵을 꺼내 먹으면서 장군의 이야기를 들었다.
빵을 다 먹었는데도 장군의 이야기는 그칠 줄 몰랐다. 그는 담뱃대로 먼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