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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검 (21)
“희야! 용기 있으면 내려와! 배 위에서 거북이처럼 움츠리고 있지 말고!”
유은의 싸늘한 목소리가 물가에서 전해졌다.
“거북이는 여기 있어! 여기야!”
우연이 여귀진의 손을 높이 들고 유은을 향해 소리쳤다.
“거북이 빼앗아가고 싶으면 올라와! 여기 달도 있고 바람도 불고 춥지도 않아서 우리는 내년 여름에나 물가에 내려갈까 생각 중이거든!”
젊은 사내의 웃음소리와 함께 배의 돛이 전부 펼쳐지며 거대한 그림자가 모든 사람의 위로 드리웠다. 주범(主帆)의 거대한 상징이 희야의 눈앞에 완전히 드러나자 희야는 전율하며 올려다보았다. 원형의 휘장(徽章) 같은 도안이었다. 천 리를 부는 거센 바람에도 날개를 활짝 펼치고 구름 속을 선회할 수 있다는 전설의 영웅이 가느다란 구름무늬 속에 알아채기 어렵게 숨겨져 있었다. 바람을 타고 갑자기 속도를 올린 큰 배는 두터운 파도를 넘으며 나는 듯이 달빛 속을 흘러갔다.
커다란 배를 한 번도 타본 적 없던 여귀진은 그야말로 놀라 넋을 잃었다. 그는 갑판 맨 앞으로 달려가 바람을 맞으며 멀리 내다보았다.
가녀린 노랫소리가 바람 속에서 돌연 높이 솟아올랐다. 낭창낭창하게 몇 바퀴 맴돌던 소리는 바람이 흐르는 방향을 타고 아득히 먼 곳으로 날아갔다. 여귀진은 고개를 돌렸다. 우연이 가로놓인 돛대에 기대 알아듣지 못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서관에서 우연이 맨 마지막에 불렀던 그 노래 같았다. 거센 바람에 우연의 치맛자락이 펄럭이고 머리칼이 휘날렸다. 사뿐사뿐 까치발로 걷는 우연은 언제든 바람을 타고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귀진은 하마터면 가서 우연을 붙잡을 뻔했다. 하지만 그리하지는 못하고 제자리에서 묵묵히 노래를 듣고만 있었다. 수부와 선원, 선실 입구를 지키는 무사도 침묵했다. 여귀진은 전에 청주 땅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푸르른 숲에 가을이면 누렇게 시든 낙엽이 떨어지는데 그중 하나가 바람 속에 빙글, 빙글, 빙글 돌며…….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아득하고 덧없는 감정처럼.
여귀진의 얼굴이 다시금 발그레 달아올랐다. 붉어진 얼굴에 바람이 불어왔다. 술을 마신 것처럼 하늘하늘 들뜨는 기분이었다.
“우연이 부르는 노래, 무슨 뜻이야?”
여귀진은 옆에 있는 희야에게 물었다.
“이런 뜻이야. 보랏빛 회화나무 꽃이 피는 계절에 사랑한다 말하게 해주오. 흩날리기 좋아하는 민들레도 떠나려 하니 노래를 부르게 해주오. 노래하는 소나무가 열매를 맺으려 하니 우리 영원히 함께하게 해주오. 사랑한다 말하게 해주오. 노래 부르게 해주오. 우리 영원히 함께하게 해주오.”
희야는 노래에 소질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저 듣기 거북한 소리를 계속 흥얼댔다.
“이거… 우족 노래야?”
여귀진은 동경하며 말했다.
“우족은 저렇게 노래를 부르는구나. 희야는 정말 대단하다. 우족 문자도 알고.”
희야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내가 우족의 신사문을 어떻게 알겠어. 그냥 우연이 부르는 걸 맨날 듣다 보니까…….”
노랫소리 속에 나직한 탄식이 어렴풋이 흘렀다. 그리고 노랫소리와 함께 바람 속으로 흩날려갔다.
어제까지 검은 머리 흩날리던 그대, 백골이 되어 묻혔구나
어둑한 달빛 내려앉은 밤, 외로이 그대 향한 그리움을 노래하네
기뻐도 슬퍼도 눈물이 흐르지 않으니, 사람은 늙고, 용사도 재가 되기 마련이라
금 소리 쓸쓸히 울려 퍼지고, 현의 울림 잦아들자 가을바람 슬피 우네, 처음일랑 묻지 마오
영웅도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으니, 천하의 천년 묵은 술로도, 그 시름 달래지 못하리!
“이… 이 무슨 저잣거리의 엉터리 시를 가져와 고상한 척하는 겁니까?”
로 선생이 화가 나서 시험지를 매섭게 내던지고는 발로 밟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시를 지어낸 여귀진을 쏘아보았다.
로 선생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창가의 소년은 그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머리를 괸 채 창밖을 바라보는 소년은 입가에 홀린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창밖의 백목련이 하얀 꽃송이를 피워냈다. 여귀진은 소녀가 가면을 벗던 찰나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던 금발이 떠올랐다. 석양 아래의 철선강처럼 너무나도 따스하고 그리운 순간이었다.
* * *
[역사]
역사상 윤말섭초는 끊이지 않는 전쟁으로 점철된 20년이었다. 막대한 군비 지출과 부역, 징집에 동륙 땅은 집 잃고 가족 잃은 사람들의 통곡으로 가득했다.
서남의 완주는 상회에서 거액의 자금을 지원한 덕에 난세에도 유일한 낙원이었다. 고향을 잃고 살길이 막막해진 유랑민들은 대거 완주로 피난을 와 거리에서 날품을 팔거나 구걸하거나 도둑질을 해 먹고살았다. 그러나 사실상 완주의 번화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것도 일시적으로 그럴듯하게 꾸민 허울에 불과했다. 남회성의 경우에도 건물이 빽빽이 들어선 자량가를 지나면 거리 뒤편의 으슥한 곳에는 오수로 숨이 막힐 듯한 악취가 진동했고 굶주린 눈빛의 유랑민들이 낡은 처마 밑에 모여 있었다. 개중에는 그대로 굶어 죽는 이도 있고, 품에 비수를 지닌 채 사냥감을 관찰하는 눈빛으로 오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섭초에 출간된 <섭하한서·풍물지>에서는 당시 완주의 실상을 날카롭게 폭로하면서도 남회는 낙원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굽힐 줄 모르는 기세로 유명한 섭나라의 사관 중에서 이렇게 결점을 덮기 위해 꾸며낼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에 대해 묘사한 야사(野史)에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다.
신무 3년에 쓰인 <섭하한서·풍물지> 제1편이 <남회성지>다. 당시 섭우열왕이 사관을 불러 자기가 어린 시절에 본 남회성을 직접 묘사했다고 한다. 섭우열왕은 이렇게 말했다.
“남회는 번화하고 조용한 성이었네. 삶은 풍족하고 안락했어. 무력을 중시하지 않으며 민풍은 유약했지. 비유하자면 수놓은 비단 같다고나 할까. 강인함은 부족하지만 휘황찬란했네. 봄이면 집집마다 정원에 오색 꽃이 피었고 거리에는 꽃을 파는 사람이 있었어. 아이들은 항상 남의 집 정원에 들어가 몰래 꽃을 꺾어다가 꽃장수에게 팔았는데 꽃을 심은 집에서는 무뢰한이라며 꽃장수를 욕할지언정 아이들에게는 화를 내기 곤란해했지…….
섭우열왕은 계단 아래에서 귓속말하는 사관들을 눈치채지 못했다. 제왕의 눈에는 동경의 빛이 반짝였다. 섭우열왕이 계속 이야기해 나갔다.
“여름이면 배를 타고 놀았어. 호수에는 항상 꽃배가 줄지어 있었지. 한눈에 그 수를 다 헤아릴 수도 없었네. 당시에는 열다섯이 안 된 아이들은 공짜로 배를 탈 수 있었어. 그걸 속어로 널뛰기라고 했지. 나중에 배가 물가에 가까워졌을 때 배를 기슭에 끌어다 놓는 걸 도와주기만 하면 되었네. 그때 널뛰기해 배를 탄 소년들은 무희들이 벗어둔 옷을 훔쳐다가 전당포에 맡기곤 했지. 훔치다가 들키면 배에서 뛰어내렸는데 그건 속어로 물수제비뜨기라고 했네.”
섭우열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아주아주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 20년 전의 그 계절로 돌아간 것처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널뛰기하고 물수제비뜨는 무뢰한 소년들의 활달한 모습이 보이고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가을은 남회에서 가장 좋을 때였어. 십 리가 붉게 물들었지. 돈 있는 사람들은 배를 띄우고 꽃구경을 했는데 오전 내 구경해도 봉황지의 가을 장미를 다 보지 못했어. 가을이면 남회에는 안개가 자주 일었는데 안개 속에서 가을 장미의 색깔은 특히 더 고왔지. 대추도 다 익어서 나뭇가지가 각 집의 담벼락 밖까지 뻗어 나왔다네. 장대를 가져다가 나뭇가지를 치면 뒷사람이 따라다니면서 광주리 가득 대추를 받았지. 우린 그걸 삥뜯기라고 했어. 겨울이 되어도 남회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네. 이따금 서리만…….”
“대도호!”
마침내 사관도 더는 기록해 나갈 수가 없었다.
“사서는 후세에 귀감이 되어야 합니다. 숙고해 주십시오!”
“숙고?”
우열왕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이가 가장 많은 사관이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나와 고했다.
“전대 왕조의 희황제 9년, 그 한 해에만도 남회성에는 굶어 죽은 유랑민이 9천이며 성 밖의 연고 없는 묫자리도 꽉 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당시 남회는 기루에 들일 열여섯 된 소녀를 사는데도 돈을 낼 필요가 없고 곡물 다섯 되만 주면 되었답니다. 열여섯 해를 길러준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부모 공양미라 하였다지요. 완주는 겉으로는 번화해 보였지만 사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곳이었습니다. 대도호께서도 과거 난세의 혹독함 속에 가장 힘든 것은 빈곤한 백성이라 말씀하시며 검을 뽑아 들고 천하통일의 포부를 밝히시지 않았습니까. 한데 남회에 대해 이리 미화하시면 해골을 치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무엄하다!”
우열왕이 버럭 화를 냈다.
“내 눈으로 직접 본 남회이니라. 학궁(學宮) 안에서 수양이나 하는 그대들 같은 학자가 고작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록을 근거로 어찌 내게 해골을 치장한다느니 지껄이는 것인가!”
“대도호께서 죽이신다 하여도 소신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대도호께서는 정녕 천하의 모든 이가 맹인이며 대도호께서 본 것만이 진짜라 여기시는 겁니까? 소신도 본적(本籍)이 남회입니다. 저도 직접 보았습니다. 흉년에 성 밖의 사람들은 굶어 죽었고 성안으로는 들어오지도 못했지요. 이 또한 거짓인 겁니까?”
“고얀!”
우열왕은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백발의 청년이 사관 앞을 가로막았다.
“서문, 비켜라!”
노한 우열왕이 호통쳤다.
흠천감의 서문 박사가 우열왕의 검을 내리눌렀다. 서문 박사가 입을 열었다.
“대도호께서 기억하시는 바는 모두 가짜입니다!”
“서문…….”
우열왕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대도 나를 안 믿는가?”
“제가 믿으면 어떻고 안 믿으면 어떻습니까?”
서문 박사의 목소리는 오래된 연못의 깊은 물처럼 일말의 떨림도 없었다.
“남회가 그때의 남회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대도호와 꽃을 훔치고 널뛰기를 하고 대추를 따던 사람들은 이제 없습니다.”
우열왕은 말없이 대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댕그렁.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잠시 후, 그는 사관의 손에서 기록해 나가던 종이뭉치를 빼앗아 들고 성큼 서재로 돌아갔다.
이튿날, 내감이 조회를 청하러 서재에 갔을 때 그는 탁자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팔 아래에는 직접 써 내려간 <남회성지>가 눌려 있었다. 제왕은 고집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남회는 속세의 낙원이라. 기근도 없고 골목에는 자주 웃음소리가 들렸으며 등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유일한 해로움이라면 소년들의 장난이 심하다는 점이었으니…. 매년 봄이 오면, 언제나 꽃을 훔치는 아이들, 참새를 쏘아 잡는 아이들, 낚시하는 아이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