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6장. 검 (20)
빛이 보였다. 어둠 속에 불이라고는 그 작은 부싯깃 한 가닥이 다였는데 활짝 핀 연꽃처럼 배우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배우는 한 손으로 부싯깃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붉은 비단을 감고 있었다. 지붕 가운데에 비끄러매진 비단은 원래 무대 중앙에 매달려 있던 비단 구(球)였다. 배우는 그 비단을 잡고 그네를 타듯 뛰었다. 그녀는 완전 높은 곳에서 가면을 벗고 머리를 풀어헤쳤다. 여귀진의 눈에는 그 순간이 바로 햇살이 쏟아지는 광경처럼 보였다. 긴 금발이 쏟아져 내리며 등불을 비추자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런 햇살 아래에서 소녀는 붉은 비단을 잡고 그네를 타듯 허공을 왔다 갔다 했다.
우족이었다. 그것도 우족의 어린 소녀.
소녀는 여귀진 옆에 착지했다. 어둠 속에서도 시야가 또렷한지 단번에 여귀진 뒤쪽의 탁자에 숨어 있던 주인장을 끄집어냈다.
“이봐요. 품삯은 계산해 줘야죠.”
“얼레. 이 아가씨야. 네가 벌인 이 사달은 어떻게 셈할 건데? 나한테 돈을 줘도 모자란다고!”
주인장이 우거지상을 했다.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소녀는 온 힘을 다해 주인장을 흔들며 눈을 부라렸다.
“누가 저런 쓰레기를 들여보내래요? 품삯뿐만 아니라 배상도 받아야겠네요.”
“무슨 배상?”
“저런 자식들 보면 난 구역질이 난다고요!”
“돈을 준 거잖아. 배우한테 돈 보내고 꽃 보내는 게 뭐 잘못이야? 저놈들 돈은 됐다면서 왜 내 돈은 달래!”
“그나마 당신을 사람대접해 주니까 돈도 내놓으라는 거예요!”
“돈 없어!”
“구두쇠 같으니라고. 재물을 그리 밝히는 사람이 돈을 쓰려니 아까워 죽겠지! 난 당신 같은 늙다리 남색이 속 쓰려 죽는 꼴을 봐야겠네요!”
인내심을 잃은 소녀가 시원하게 주인장의 얼굴 한가운데로 주먹을 날렸다. 주인장은 눈이 뒤집혀 기절하고 말았다. 소녀는 사내의 허리춤을 더듬더니 신나서 말했다.
“찾았다, 찾았어.”
소녀는 묵직한 가죽 자루를 손에 들고 무게를 가늠해 보더니 싱글벙글 웃었다.
“됐다. 다 내 거야.”
소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당하게 번 돈, 전부 내 손에 넣었다! 어… 너 희야 친구지?”
여귀진은 벌벌 떨며 소녀의 팔을 툭툭 쳤다.
소녀는 경계하듯 팔을 거두었다.
“뭐 하는 거야?”
“우리… 희야 구하자.”
“아차차!”
소녀가 소리쳤다. 그제야 희야가 아직 무대 위에서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동궁 소년들과 싸우고 있음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여귀진은 최선을 다해 어둠속을 살펴보려 했지만 희야와 소년들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좌우를 둘러보더니 무언가가 번뜩 떠오른 듯 여귀진의 소매를 붙잡았다.
“자, 나랑 같이 이 줄을 잡아당기는 거야.”
소녀는 무대 위에서 풀어낸 아까 그 붉은 비단을 여귀진의 손에 건넸다.
“이거 당겨서 뭐 하게?”
여귀진은 얼떨떨한 채로 소녀와 함께 힘주어 줄을 잡아당겼다.
그때 주인장이 어릿어릿 정신을 차렸다. 두 사람이 붉은 비단을 잡아당기는 모습을 본 그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건 잡아당기면 안 돼! 잡아당기면 안 된다고!”
“으쌰!”
소녀가 구호를 외쳤고 두 사람은 힘껏 끈을 당겼다.
기괴한 울림이 들리고 이어 끼이이익 소리가 났다.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든 여귀진은 고개를 돌려 소녀를 보았다.
“우리…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끈은 판잣집 꼭대기에 매어져 있거든. 원래 대충 설치한 건물이니까 힘껏 잡아당기면 무너지겠지.”
“무너진다고?”
“응.”
소녀는 갑자기 안쪽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희야. 조심해. 판잣집이 무너질 거야!”
“우연. 너 대체 무슨…….”
희야의 목소리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굉음이 울렸다. 여귀진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봉황지.
달빛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수면 위로 푸르스레한 물결이 일렁였다. 네모진 배 한 척이 봉황지 근처에 멈추었다. 밤빛 아래, 보통 배보다 큰 선체가 뚜렷이 드러났다. 갑판 위에서는 말이 달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봉황지는 순풍거(順風渠)와 통하며 건수강 지류와도 연결되어 있다. 강을 다니는 큰 배는 물길을 따라 그대로 남회성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봉황지는 수심도 깊어서 큰 배 중에서도 바닥이 얕은 경우 대체로 수용할 수 있었다.
배 위의 사람이 손을 들었다. 건장한 수부(水夫) 하나가 기다란 장대로 선채를 떠받친 채 천천히 배를 물가에서 밀어냈다. 이렇게 큰 배는 출항이 쉽지 않았다. 돛이 너무 커서 배를 돌릴 수 있을 만큼 수심이 깊은 곳에 닿지 않으면 돛을 펼치기가 어려웠다.
어둠 속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큰 배는 이미 뱃도랑에서 깊은 물가로 점점 미끄러져 나갔다. 수부들이 고개를 돌려보았다. 선실 안에 있던 용맹하고 날랜 무사들도 칼을 들고 기척을 살피러 나왔다.
말 한 마리에는 뜻밖에도 세 명의 아이가 빽빽이 붙어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에서 내렸다. 큰 배를 보자마자 소녀 하나가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멈춰요! 멈춰! 저희가 뛸 수 있게 판자 하나만 걸쳐 주세요!”
봉황지의 유람선들은 대부분 아이를 기피하지 않고 공짜로 배에 탈 수 있게 해 주는 오랜 풍속이 있었다. 그것을 널뛰기라고 불렀다.
“이건 유람선이 아니다.”
무사가 거절했다.
“운중으로 출항하는 배란 말이다!”
“유람선이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우리 좀 살려주세요!”
소녀가 손을 입가에 모으고 목청껏 소리쳤다.
소녀의 목소리를 따라 쫓아온 듯 어둠 속으로 드문드문 횃불을 든 누군가가 보이고 어지러운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쫓아오는 것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선실 발이 젖혀지고 안에서 청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지?”
“아이들 몇이 쫓기고 있나 봅니다.”
무사가 대답했다.
“쫓아 보내시죠.”
“올라오게 판자를 내줘.”
청년이 느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애 목소리가 참 예쁘네.”
“알겠습니다!”
무사가 즉시 손을 흔들어 신호했다.
배 위의 선원이 부목(浮木)과 밧줄로 만든 부교(浮橋)를 물가로 던졌다. 부교는 물가에 딱 알맞게 닿았다. 선체를 고정하기 위해 선원들이 돛을 반쯤 올렸다. 어렴풋하게 보이는 돛은 전체가 청회색이었다. 거대하고 오래된 상징 문양이 바람에 펄럭였다. 우연을 선두로 희야, 여귀진이 뒤를 따랐다. 세 아이가 부교를 걸어가 뱃전 가장자리의 밧줄을 잡자 부교는 즉시 거두어졌다. 물가에서 배를 밀어내는 수부들이 다시 힘을 주자 커다란 배 전체가 물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와! 살았다, 살았어!”
우연은 물에 젖은 치마와 신발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바람이 나 손을 높이 들었다.
여귀진과 희야는 지쳐서 뱃전 좌우에 쓰러졌다.
쫓아오던 준마들은 물기슭에서 급히 멈추어 섰다. 멀리서 보니 오륙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온갖 집기를 들고 있었다. 쇠칼을 든 사람도 있고 걸상 다리를 든 사람도 있었다.
앞장선 이들은 금군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상인 차림이었는데 하나같이 분을 참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유은은 수부 하나를 호되게 발로 걷어차 물에 빠뜨리고는 표독스럽게 배 위를 바라보았다. 유은의 뒤에서 서관 점원도 배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퍼부었다. 다른 수부들이 다가가 그들을 에워싸려 했으나 도리어 금군 소년들은 칼을 들고 위협했다.
“쫓아와 봐! 쫓아와 보라고!”
우연은 끝까지 가만 안 있고 물가에 대고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요것아. 대체 얼마나 큰 사고를 쳤기에 저리 많은 사람들이 쫓아와 널 곤란하게 하는 게야? 선한 부류 같아 보이지 않는데.”
선실 안의 청년은 나오지는 않고 그저 나직이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우연은 안쪽을 몇 번 흘끗거렸지만 사람이 안 보이자 하는 수 없이 물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두꺼비 한 무더기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요!”
우연의 말에 물가에 있던 사람들이 격노했다. 뇌운정가와 팽련운은 함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누구더러 두꺼비래? 죽고 싶냐?”
우연이 멀리 인파 뒤편에 있는 방기소를 가리켰다.
“바로… 저어기… 저 두꺼비요. 두꺼비가 백조 고기를 먹으려 하다니 분수를 알아야지!”
새로 배운 동륙 속담이 떠오른 우연은 득의양양함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 방기소를 쳐다보았다. 방기소는 성난 수탉처럼 얼굴이 벌게졌다. 그는 체면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길길이 날뛰며 배에 대고 소리쳤다.
“야 이 추잡한 계집애야,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착각하지 마! 우리 집에 불 피우는 할망구도 너보다 예뻐. 우리 집에는 내가 죽을 때까지 데리고 놀아도 다 못 놀 만큼 미녀가 줄줄이 있거든? 그냥 너 기분 좀 좋으라고 띄워준 것뿐이야. 근데 누구더러 두꺼비래?”
“오. 나 기분 좋으라고 띄워준 거였어?”
우연은 화내기는커녕 물가에 대고 또 한바탕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희야에게 다가와 그의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
“실망스러워 어쩐다! 그럼 난 집안일로 신경 쓸 게 많은 방 공자께서 장가오는 거 안 기다리고 다른 사람 찾아가야겠네!”
방기소는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물에 머리라도 처박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치욕은 난생처음이었다. 더구나 자신이 집도 없고 돈도 없는 ‘서출 잡종’에게 졌다는 사실은 더더욱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우연은 신이 났다. 희야에게 한 행동은 너무 모호했다 싶었는지 여귀진의 여자아이 같은 예쁘장한 얼굴을 보고는 냉큼 입술을 가져다 슬쩍 문질렀다. 그러고는 계속 물가의 방기소를 향해 짓궂은 얼굴 표정을 지었다. 결국 참다못한 방기소는 털썩 주저앉아 엉엉 대성통곡했고 그 모습에 주위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여귀진은 우두커니 그곳에 선 채 멍하니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는 우연이 잔꾀를 부린 것뿐임을 알기에 얼른 귓가 부근을 슥 닦았다. 입맞춤도 아니고 완전히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자아이와 이렇게 가깝게 붙어본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전에 소마가 같은 장막에서 잠을 자곤 했지만 그게 온당하지 못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귓가에 뿜어진 우연의 미세한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은 발그레해졌지만 몸은 날아갈 수도 있을 만큼 가벼웠다. 방기소가 주저앉아 엉엉 우는 동안 여귀진은 들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정말 화근이로구나.”
선실 안의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누가 화근이란 거예요?”
우연은 불쾌해졌다.
“화내지 마라. 화근이 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니. 얼굴이 예쁜 것만으론 부족하다. 자태도 일생이 뒤바뀔 만큼 아리따워야 하고 슬픔과 기쁨에도 고유의 아름다움이 느껴져야 해. 그 화를 입으면 적게는 수십 년, 많게는 수백 년까지 영향이 미쳐야 비로소 화근이라고 할 수 있지.”
선실 안의 사람이 웃으며 설명했다.
“칭찬이다. 화근이란 10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인데 우연히 만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지. 평생 60년밖에 못 사는 인생. 화근도 한 번 만나보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아깝지 않겠느냐? 내가 오늘 너희를 구한 보람이 있구나.”
“정말요?”
우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근이라 할 만한 사람으로는 장미 공주가 있지. 벌써 700년이다. 이야기꾼들도 아직까지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지. 천년이 지나도 그녀의 악영향은 다하지 않을 게다. 근데 넌 대체 무슨 사고를 쳤기에 저리 많은 사람들이 쫓아온 게냐?”
우연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사실 저희가 동궁 무사들이랑 원한이 좀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도망치면서 서관이었던 판잣집을 무너뜨려서 그런 것뿐이고…….”
“그런 것뿐이라…….”
선실 안의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핑계 한번 훌륭하구나. 그럼 우리 거래를 하자. 구해준 데 대한 보답인 셈치고 내게 노래를 한 곡 불러다오. 그럼 내가 그 판잣집을 물어주마.”
“안 부른다고 쫓아낼 거 아니죠?”
“안 쫓아낸다.”
선실 안의 사람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배가 못 가운데에 이르렀을 때 수영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
“까짓 거 부르죠, 뭐. 근데 그 판잣집 말이에요. 엄청 크거든요. 물어주려면…….”
“백리 공작의 궁전을 무너뜨린 게 아닌 이상에야 다른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게 돈이 많아요?
선실 안의 사람이 껄껄 웃으며 되물었다.
“이름이 무어냐?”
“우연이에요.”
우연은 옆에 있는 희야를 잡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얘는 희야고…….”
다음으로 여귀진도 잡아당겼다.
“얘는…….”
“아소륵.”
희야가 작은 소리로 말해 주었다. 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아소륵. 우리 셋이 친구예요.”
“다 좋은 이름이구나.”
“당신은 이름이 뭐예요?”
“나는 강가(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