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93화 (93/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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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검 (18)

희야는 긴 창을 안고 궁 담벼락을 따라 어슬렁거렸다. 오늘 밤 량풍원 순찰을 맡은 까닭이었다. 희야는 순찰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최소한 나무토막처럼 궁문 입구에 서 있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고개를 들자 담 위에 누군가가 있었다.

“어이!”

여귀진은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숙여보니 희야가 소리 없이 나무 사다리를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저하는 왜 이 야심한 밤에 안 자고 있어? 여기서 뭐 봐?”

비집고 올라온 희야가 여귀진과 나란히 사다리 꼭대기에 앉았다.

여귀진이 머무는 귀홍관과 백리욱의 량풍원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사다리에 오르면 맞은편 광경이 보였다. 마침 느릅나무 한 그루가 두 사람을 가려주어 누구도 그 둘을 볼 수 없었다. 담벼락 하나 차이인데 량풍원은 깊은 밤에도 붉은 등롱이 뜰을 환히 밝히고 있었으며 시녀들도 빙 둘러서 있었다.

“어디 만져보자…. 소소구나.”

눈을 가린 백리욱이 치맛자락을 잡았다. 치맛자락을 잡고서 달려가 소녀를 끌어안으려 했지만 허탕을 치고 말았다.

“틀렸어요, 틀렸어!”

소녀들이 큭큭 작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거짓말 마. 방금 그 치마 기억해. 분명 소소의 치마에 영사를 덧입힌 거야!”

백리욱은 날쌔게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소녀들의 목소리를 따라 이리 덮쳤다 저리 덮쳤다 했지만 모두 허탕이었다.

“아니에요! 틀렸어요!”

소녀들은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백리욱은 가만히 서서 머리를 굴렸다. 그가 움직이지 않자 소녀들도 말을 하지 않았다. 소녀들은 입술을 꼭 말아 물고서 살금살금 이동했다. 소녀들은 밑창이 부드러운 흰색 비단 신발을 신고 있어서 땅에 발을 대도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다. 백리욱은 소리가 들리지 않아 움직일 수 없었다. 소녀들은 서로 밀치락달치락하며 옆의 사람을 백리욱의 품으로 밀었다. 소녀들은 몸이 가볍고 재빨랐다. 웃음을 꾹 참으며 살금살금 다른 동료에게 복수하러 달려들었고 어느 순간 소녀들의 간지럼 태우기 놀이로 변했다. 그러나 소리를 내면 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두가 한사코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다.

“쟤들은 대체 뭐 하고 노는 거야?”

희야는 보고 있자니 지루했다. 그는 한 손으로 아래턱을 괴고서 여귀진에게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여귀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잡히면 지는 거겠지?”

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면 한 번에 서넛은 잡을 수 있는데!”

소녀 하나가 갑자기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백리욱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 소녀를 끌어안고 몸을 더듬었다.

“소소다, 소소!”

백리욱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영사는 분명 소소 치마의 겉면이래도!”

“저는 여기 있어요! 저하가 잡으신 건 제가 아니에요!”

얼굴이 동글동글한 소녀가 백리욱의 뒤에서 외쳤다. 그 소녀가 소소인 듯했다.

“다시 맞춰보세요. 틀리면 뽀뽀 안 해드려요.”

소녀들이 다시 소란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잠시 망설이던 백리욱이 소녀에게 다가가 가볍게 목덜미 냄새를 맡았다. 소녀는 간지러움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기를 쓰고 꾹 참았다.

“웃으면 안 돼, 웃기 없어.”

소녀들이 계속 떠들었다.

“일부러 지기 없기!”

“일부러 지기도 해?”

희야는 보면 볼수록 시시해져 내려가려 했다.

“알았다!”

백리욱이 외쳤다.

“유유아구나, 유유아야! 유유아와 소소가 치마를 바꿔 입었지만 향기는 바뀌지 않지. 이건 유유아 몸에서 나는 향기야!”

백리욱이 눈가리개를 떼어냈다. 그는 품안의 소녀를 놓아주지 않고 계속 끌어안고 있었다.

“유유아, 네가 졌다. 네가 졌다고!”

“저하께서 맞추셨으니 이제 유유아 차례예요!”

소녀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유유아만 곧 피를 뚝뚝 흘릴 것처럼 얼굴이 새빨갰다.

백리욱은 거침없이 다가가 유유아의 예쁜 코끝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볼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유유아는 백리욱을 밀어내려던 것인지 아니면 균형을 잃은 것인지 뒤로 몸이 젖혀졌고 그대로 백리욱과 함께 땅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주위의 낄낄대는 웃음소리는 더욱 요란해졌다. 백리욱은 유유아를 끌어안은 채로 몇 바퀴 데구르르 구르며 살며시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유유아의 치마가 뒤집혔다. 뜻밖에도 유유아는 속에 긴 바지를 입고 있지 않았다. 등롱 불빛 아래 그녀의 뽀얗고 늘씬한 다리가 드러났다.

“저하…. 저하…….”

나이 많은 여자 하인들이 가서 떼어내려는 듯했지만 실상은 곁에서 그런 시늉만 할 뿐이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유유아는 가볍게 흥, 콧방귀를 뀌었다.

희야는 고개를 돌려 제 옆의 아소륵을 보았다. 괜히 목덜미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은 주춤주춤 사다리에서 내려와 나란히 담벼락 아래에 앉았다. 여귀진은 이마를 만져보았다. 땀범벅이었다. 그는 길게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높이도 올라갔더라니…….”

희야가 여귀진을 쏘아보았다.

“아니야! 나는…….”

여귀진이 말을 더듬었다.

“난 그냥 너무 할 일이 없어서 올라간 거야. 원래 유유아와 소소는 귀홍관 시녀인데 둘 다 량풍원으로 넘어가서 이곳엔 나뿐이거든. 난 그냥 다들 뭐 하나 보고 싶었을 뿐이야.”

“네 시녀들을 욱 세자에게 빼앗긴 거구나? 그런데도 보고 싶어?”

희야가 무시하듯 코웃음을 쳤다.

“난… 그게 아니라…….”

여귀진은 뭐라 해명해야 할지 몰랐다. 얼굴이 붉다 못해 자줏빛으로 벌게진 그는 덜 익은 가지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희야가 여귀진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출궁할 수 있어? 내일 밤에 신기한 거 구경시켜 줄게.”

“신기한 거?”

여귀진이 고개를 들어 의아한 눈으로 제 친구를 바라보았다.

희야는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생은 언젠가 끝나지만, 영웅은 침대에서 생을 마치지 않나니.

빗물에 철검을 갈고, 말 타고 긴 채찍을 휘두르며 왕이라 칭하노라.”

무대의 선생이 손에 든 운판을 탁 쳤다. 맑은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오늘 이야기할 내용은 장미 황제, 영웅장취편(英雄长醉篇)입니다. 청중 여러분, 잠시 쉬고 계십시오. 목을 좀 축이고 나서 변변찮은 재주나마 최선을 다해 양관 전투에 대해 이야기해 드리지요. 10만 시신이 거꾸러지고, 패왕은 나라를 공고히 했으나, 미녀와는 애석한 이별을 했던 바로 그 전투입니다.”

말을 마친 선생은 발을 젖히고 무대 뒤로 돌아갔다.

여귀진은 희야의 손에 이끌려 시끌벅적한 곳에 발을 들였다. 사람들의 함성에 지붕이 떨어져 나갈 듯했다. 보이는 곳마다 사람으로 가득했다. 후텁지근한 공기에는 은근히 땀 냄새도 배어 있었다. 여귀진은 그저 입이 떡 벌어져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완전히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 같았다.

“빨리 가서 자리 잡아. 차 한 주전자에 말린 두부 한 접시 시켜.”

희야가 허리춤을 뒤적이며 말했다.

“누에콩도 한 접시 시키고.”

“아이고. 금군 나리 아니십니까.”

점원이 미소를 띤 얼굴로 하하 웃으며 말했다.

“안에 정말 자리가 없어요. 요즘 선뵈는 이야기는 <장미백전록>인데 유명하신 선생을 모셨거든요. 창곡(唱曲) 최고의 목청이시죠. 이전 몇 차례의 공연도 만석이었어요. 하마터면 우리 가게 마루판이 무너질 뻔했다니까요. 오늘은 ‘양관 전투’를 이야기할 차례라 손님들이 다 무리 지어 오셨지 뭡니까. 솔직히 우리 점원들도 이 얘기는 꼭 듣고 싶은데 자리를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아니면 두 분, 가에 끼어서 듣고 계시겠어요? 제가 안에 들어가 자리를 찾아보고 생기면 바로 나와서 모시겠습니다.”

한 바퀴 둘러본 희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여귀진을 끌고 앞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두 소년은 서서 이야기를 듣는 성인들 가운데 끼었다. 희야는 힘껏 어른들을 밀쳐내고 여귀진에게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이게 뭐야?”

너무나도 신기했던 여귀진은 긴장한 채 희야 곁에 바짝 붙어 까치발을 디디고 보았다.

“이야기 낭독. 하당에 왔으면 꼭 한 번은 들어봐야지.”

“이야기 낭독이 뭔데?”

“넌 어떻게 아무것도 몰라?”

희야는 툴툴대며 설명해주었다.

“이야기 낭독은 영웅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야. 책을 읽을 줄 알면 책을 보면 되지만 나처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가 들려줘야 하거든. 그리고 책 읽는 것보다 이게 훨씬 재밌어. 금(琴)을 연주하면서 노래도 불러. 뒤에서는 북으로 장단도 치지. 물론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구나!”

여귀진은 들입다 고개를 끄덕였다.

희야는 한껏 흥분한 여귀진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이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실은 오늘 내 친구를 만나게 해주려고 온 거야. 근데 너무 가까이 가지는 마. 걔가 정신줄 놓으면 다루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거든.”

“걔도 이따가 와?”

여귀진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여기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우리를 찾을 수 있을까?”

“당연하지!”

희야는 신비한 미소를 지었다.

돌연 장내에 떠들썩한 박수소리가 일었다. 누군가는 손가락을 입에 넣고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아까 무대 뒤로 들어갔던 선생이 다시 유유히 무대로 걸어 나왔다. 이번에는 장금(長琴)을 들고 나와 탁자에 놓았다. 그는 소탈하게 옷소매를 한 번 슥 훑고는 탁자 뒤편에 앉았다. 무대 한쪽 귀퉁이에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위로 운판 하나, 성목 하나, 장금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무대 앞쪽에는 가면을 쓰고 붉은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무대에는 그것이 전부였다.

“이야기를 하는 선생은 전기수(傳奇叟), 이야기꾼이고 앞에 저 사람은 배우야.”

희야가 설명해 주었다.

“선생은 이야기를 하고 악기를 연주해. 앞에 있는 배우는 노래를 하고 춤을 춰. 배우가 얼굴에 쓴 가면은 이마에 금을 바른 건데 장미 황제의 가면이야. 연극에서는 장미 황제의 가면만 이마에 금을 발라.”

이야기꾼의 손가락이 가볍게 현을 훑었다. 탁, 성목 소리와 함께 주위가 조용해졌다.

이야기꾼은 목청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향을 떠난 지 20년, 돌아갈 날은 더뎌지는데 새로운 것은 백발뿐이라. 대윤의 시조 장미 황제는 대군을 통솔해 양관성 아래까지 쳐들어갔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늦가을, 만물은 시들어가고 대군의 옷도 모두 붉게 물들었지요. 군대 안에는 휘장이 아래로 드리워진 붉은 수레가 한 대 있었습니다. 바로 장미 공주를 태운 수레였죠…….”

말을 할 때는 맑디맑던 이야기꾼의 목소리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까슬까슬 거칠게 변했다. 이따금 악기 현을 튕기며 당차게 이야기를 해나가는 그는 무대 아래의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이야기꾼의 목소리에 마력이 깃들었는지 여귀진은 넋을 놓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머릿속은 온통 전란으로 어지러운 그 시대, 장미 깃발을 든 대군이 양관성 아래까지 진군하고 모래 먼지가 일고 한 여인이 수레 위에서 천천히 휘장을 젖히고 바라보는 장면으로 가득했다. 무대 뒤의 북소리가 느렸다가 빨라지고 가벼웠다가 묵직해졌다. 이야기꾼의 이야기가 양관성 아래까지 접근한 대목에서는 먹구름이 잔뜩 뒤덮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야기꾼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빠르게 현을 튕겼다 당겼다 했다. 돌연 북소리가 멎었다. 전 군대가 멈춰선 듯했다. 다시 북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우레와도 같이 맹렬한 기세였다.

‘돌격!’

여귀진은 속으로 말하고는 숨을 죽였다. 군을 이끄는 제왕이 포효하며 승영지검(承影之劍)을 들어 올린 모습이 보이는듯했다.

북소리가 이어졌다. 이야기꾼이 벌떡 일어나 무대 뒤로 들어가자 북소리가 다시 멈추었다. “잘한다!”, “좋다!” 같은 환호가 밀물 때의 파도 마루처럼 쏟아졌다. 여귀진은 허탈했다.

“왜 멈춘 거야?”

여귀진이 다급히 희야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방금 절반이 끝났거든. 쉬러 들어간 거야.”

여귀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철렁했던 가슴이 살며시 제자리를 찾았다.

“희야. 네가 설명 좀 해줘. 나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

“장미 황제는 우리 대윤의 개국 황제야. 동륙 제일, 뭐 꼭 제일은 아닐지 몰라도 내로라하는 영웅이지. 양관 전투는 장미 황제가 좋아하던 장미 공주가 죽은 이야기야. 장미 황제에게 장미 공주는 어린 시절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어. 그가 태청각 황제 자리에 오르는 게 장미 공주의 최대 염원이었지. 그런데 당시 장미 황제는 양관 밖에서 가로막혔어. 장미 공주가 곧 죽을 것 같자 황제는 죽음과 부상도 아랑곳하지 않고 양관에 강공을 퍼붓기로 결심했어. 그 결과 10만 명이 죽었고 황제는 그 시신을 밟고 양관성 꼭대기에 올랐지.”

여귀진은 눈이 휘둥그레져 물었다.

“10만 명이 죽고서야 양관성 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다고?”

“응.”

“대가가 너무 크다.”

여귀진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장미 공주가 곧 죽게 생겼는걸? 장미 공주는 그의 일생에 가장 친한 벗이고, 그런 그녀의 평생 꿈이 장미 황제가 태청궁의 황좌에 오르는 거였으니까.”

희야가 머리를 긁적였다.

“일생의 가장 친한 벗이라…….”

여귀진은 잠시 넋을 놓았다. 저도 모르게 머뭇거려졌다.

일생에 가장 친한 벗과 10만 명의 목숨. 마음속 경중(輕重)의 기준이 순간적으로 모호해졌다.

여귀진은 붉은 비단으로 장식한 무대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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