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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검 (17)
그때, 목소리 하나가 연무장 전체를 관통했다.
저 멀리 하늘에서 내리치는 천둥 같았다. 누구도 덮쳐오는 소리의 정체를 분간하지 못했다.
여귀진은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소리에서 드넓은 초원의 바람 소리가 들렸다. 거인 하나가 대지 깊은 곳에서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모든 군마가 그 순간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사자마도 유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쇠발굽은 희야의 1척 앞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온몸의 맥이 풀린 듯 무릎을 꿇었다. 유은이 연달아 몇 번 말의 배를 걷어찼지만 말은 일어나지 못했다. 내달리던 만족 무사들도 통제력을 잃었다. 어릴 때부터 말 등에서 자라온 이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제 군마 하나조차 단속할 수 없었다. 모든 군마가 무언가에 몹시 놀란 듯했다. 말들은 귀를 쫑긋 세운 채 주인의 명령은 듣지 않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나직하게 코투레질을 했다.
“이건…….”
여귀진은 아연해졌다.
“용혈마예요!”
철엽이 깨달았다.
“그 새끼 수컷 말요! 녀석이 깨어났어요!”
말의 울음소리가 맞기는 했다. 여귀진도 이내 깨달았다. 초원에서 나고 자란 그였지만 이런 말 울음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묵직함 속에 사나운 광기를 머금은 그 소리는 사자의 포효와도 같았다.
“금장국에서 바친 용혈마입니다.”
대류영 군사 하나가 의아해하는 식연을 보고 다가와 설명했다.
“현지 암말과 교배하려 했는데 성질이 지나치게 거칠어 암말이 가까이 다가가지를 못합니다. 매일 오후 잠에서 깨면 저리 길게 우는데 주위의 말들이 다 놀라서 날뛰지요. 말이라고는 하지만 독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말의 왕인가?”
식연이 작게 중얼거렸다.
식연은 대에서 검은 깃발 하나를 뽑아 힘껏 성루 아래로 던졌고 대류영의 군관도 동시에 징을 쳤다. 훈련 종료 명령이었다. 추격전을 벌이던 무사들도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포위되었던 만족 무사들도 신속하게 철수했고 하당 보병들도 대오를 접고 제자리에서 기다렸다.
유은은 장대를 쥔 채 망설였다.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포위에서 벗어난 철엽이 가슴 앞의 비수를 뽑아 화살촉이 없는 우전 앞부분을 비스듬히 한마디 깎아내고는 활시위에 걸고 유은을 똑바로 겨누었다. 유은은 철엽의 활솜씨를 알고 있었다. 철갑을 입고 있으니 쇠화살촉이 없는 화살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지만 철엽은 오른쪽 눈을 다치게 하지 않고 정확히 왼쪽 눈만 앗아갈 수 있는 명궁수였다. 자신이 공격하기만 하면 철엽의 화살이 자신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것임은 명백했다.
유은은 분개하며 창 두 자루를 내던지고 빠르게 말을 몰아 본진으로 돌아왔다.
성루 위, 식연이 한숨을 돌리고 여귀진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번 전쟁은 기마병의 패배로 보이는군요.”
여귀진도 마음이 놓였다.
“승패는 상관없습니다. 다들 무사하면 됐어요.”
“세자께서 그 전술을 말했을 때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용격진황과 세자의 당숙인 9왕 여표은 전하의 결전에서 용격진황은 패배해 죽었지요. 한데 왜 세자께서는 용격진황의 전술을 쓸 생각이 드셨는지요?”
여귀진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사실 숙부와 사촌 형님의 일전에서 사촌 형님은 마지막에 100명의 기마병을 이끌고 숙부의 중진으로 돌격했습니다. 다만 제 숙부에게 닿기까지 50보를 남겨두고 화살에 맞아 낙마하셨지요. 저는 기마병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빠르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사촌 형님께 50명만 더 있었더라면, 말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식연은 잠시 침음했다.
“세자께서는 용격진황과 참으로 돈독한 사이셨나 보군요.”
식연은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소년들은 분주히 철수하는데 희야만 그곳에 서서 묵묵히 용혈마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넋이 나간 것 같았다.
화란원의 연못은 오후의 찌는 듯한 더위에도 서늘했다. 연꽃이 곧 지려 하고 있었다. 시들어 거꾸로 드리워진 연잎 아래로 물비늘이 반짝였다. 희야는 다리를 쭉 펴고 돌다리 아래 그늘에 기대어 손에 든 연방(蓮房)1)을 벗겨내고 있었다. 연밥심까지 발라내고 향긋한 연밥을 입에 문 희야는 흡족해하며 책을 펼쳤다. 희야는 어느덧 동궁 생활에 익숙해졌다. 변두리의 커다란 동궁은 조릉을 비롯해 욱 세자와 여귀진 세자의 거처를 제외하면 전부 황폐했다. 당직도 금군의 명문가 소년들 몇 명만 서는 까닭에 무단이탈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불현듯 희야는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보았다. 다리 위에서 소년 하나가 희야에게 팔을 흔들고 있었다. 여름이었지만 소년은 여전히 손목에 흰색 표범 모피를 두르고 있었다.
“아소륵?”
희야는 여기에서 만족 세자를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난… 청형방을 지나서 서고에 책 가지러 가는 길이야.”
여귀진이 설명했다. 여귀진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사실 여귀진은 동궁을 한참 돌아다닌 끝에 희야를 찾은 것이었다. 오후가 되자 시중을 들던 두 시녀는 또 백리욱 세자를 따라 놀러 갔다.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람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려왔지만 여귀진은 높디높은 궁 담벼락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동궁 내 유일한 친구인 희야가 떠올랐다. 사실 자기가 희야와 친구인지는 긴가민가했다. 까만 눈동자의 동륙 소년에게선 만족 세자는 비교도 안 될 오만함이 묻어났다. 매번 여귀진이 말을 걸면 희야는 늘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희야. 요즘에도 유은이 너 괴롭혀?”
여귀진이 다리에서 내려와 희야 앞으로 갔다.
“자주 못 봐. 뭐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어. 장군께서 저번에 화를 내셨으니 아마 겁 좀 먹었겠지? 근데 솔직히 싸울 일이 없으니까 꽤 심심하네.”
희야가 입을 실쭉거리며 책만 쳐다보았다.
“유은이 없으니까 방기소랑 팽련운도 주둥이만 나불대.”
“희야. 무슨 책 읽어?”
희야가 책표지를 보여주었다. 책표지는 손을 많이 탔는지 약간 가스러져 있었다. 책 제목은 <경룡전전(驚龍全傳)>이었다.
“무슨 책이야?”
“너 이것도 안 봤어?”
희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벌써 다섯 번이나 봤는데. 흔치 않은 훌륭한 책이야. <사주장전록(四州長戰錄)>보다 훨씬 재밌어.”
“무슨 얘기인데?”
“장미 황제 이야기야. 장미 황제가 천계에서 종군할 때부터 황위에 오를 때까지가 가장 근사한 대목이고 뒷부분은 갑갑해. 분봉(分封)이니 동세(同稅)니, 완주 상회와의 동맹 이런 얘기라 재미없어. 그 책은 뭐야?”
여귀진은 쑥스러워하며 손에 든 책을 뒤집었다. 로 선생의 수려한 필체로 쓰인 책 제목은 <정전(政典)>이었다. 희야가 책을 가져가 질풍 같은 속도로 뒤적여보더니 고개를 들어 의구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여귀진은 점점 더 멋쩍어졌다.
“별 재미없는 책이야. 로 선생님께서 시킨 숙제거든. 오늘 밤에 또 ‘전맥편(田陌篇)’을 시험 본대. 서고에 다시 가서 해설집 두 권을 찾아 최대한 빨리 읽어보려고. 아무 답도 못 써서 무시당할 수는 없으니까.”
“‘전맥편’은 무슨 얘기인데?”
“어떻게 토지를 측량하고 지방에 맡겨 관리하게 할 것인지, 세금은 어떻게 걷을 것인지, 풍년에는 얼마를 걷고 흉년에는 얼마를 걷을 것인지, 몇 살 이상의 노인은 세금을 면제해 줄지 이런 얘기들이야. 역대 토지세도 나와 있어.”
희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농사짓는 책이구나.”
두 사람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희야는 열심히 자신의 <경룡전전>을 펼쳐 보았다. 여귀진은 희야가 자신을 상대해줄 시간이 없나 보다 싶어져서 눈치껏 빠져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서서 작별인사를 건네려 망설이는데 희야는 책으로 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책 찾으러 간다면서?”
책 너머로 시선을 옮긴 희야가 자신의 책을 쳐다보고 있는 여귀진을 보며 물었다.
“보고 싶어?”
희야가 뭔가 눈치를 챘는지 매우 관대하게 옆에 놓아둔 책 몇 권을 전부 여귀진에게 건넸다.
“너 가져가서 봐. 난 앞에 몇 권은 다 봤으니까. 잃어버리지 마라. 책방에 반납해야 하거든.”
“토지세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부유한 자는 4분의 1, 빈곤한 자는 7분의 1을 거둔다. 흉년이 들어 수확량이 절반을 넘지 못할 시에는 선별해 세금을 면제한다. 황무지를 개간했을 때는 5년간 세금을 거두지 아니하며, 산에 있는 밭은 경작이 힘들므로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 그러나 지방의 공량(公糧)2)은 납부하여야 한다. 공량은 홀아비와 과부, 고아를 구휼하는 데 사용하며 국가에서 4할을 내고 지방에서 6할을 내 모두를 먹여 살릴 수 있게 한다.”
백리욱의 목소리가 대전 안에 메아리쳤다. 목소리는 점점 고조되어 우렁차졌다. 로 선생의 찌푸린 눈썹이 차츰 풀어졌다. 마침내 그는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욱 세자께서 ‘전맥편’을 정말 열심히 공부한 듯하여 매우 기쁘군요.”
로 선생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수염을 매만지더니 별안간 눈을 부릅떴다.
“다만 량풍원의 하인이 저하께서 한가할 때 쓰신 사곡(詞曲)을 올렸는데 읽어보니 참으로 실망스러웠습니다! 가사는 온통 방탕하고 곡조도 퇴폐적이더군요. 또한 <동궁명옥집(東宮名玉集)>이라 하여 여인의 용모를 품평하고 명문가의 여인들을 전부 기루의 천한 여자로 만드셨더이다!”
백리욱은 말대꾸하지 못하고 그저 입속으로만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하는 우리 하당의 세자이십니다! 제왕의 도를 익히고 가슴에 강산을 품으셔도 모자랄 시간에 여인을 품을 여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저하의 공부와 일상을 보살피기 위해 선별을 거쳐 입궁한 여인들인데 용모가 무에 대수랍니까? 온순하고 선량한지가 중요하지요!”
로 선생은 몹시 화가 나 씩씩댔다.
“계속 이리 지내시면 훗날 백리 가문의 선조들을 무슨 낯으로 뵈실 겝니까?”
대전 안이 고요해졌다. 백리욱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고개를 들자마자 스승의 비분강개한 눈과 마주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순간 작은 웃음소리가 로 선생의 엄숙한 분위기를 깨트렸다.
휙 고개를 돌린 로 선생이 눈을 부릅뜨고서 표독스럽게 여귀진을 쏘아보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여귀진은 황급히 시선을 책상에서 옮겨 공손하게 로 선생을 쳐다보았다.
“여귀진 세자께서는 왜 웃으셨는지요?”
로 선생은 자세를 바로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와 눈을 살짝 비스듬히 내리깔고 여귀진의 책상을 보았다.
“이게 뭡니까?”
로 선생의 낯빛이 돌변해 여귀진 앞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여귀진은 고개를 갸웃한 채 로 선생을 쳐다보았다. 로 선생은 뇌에 장애라도 온 사람처럼 벌벌 떨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희끗희끗한 수염이 절로 움직였다.
“이건 귀국(貴國)의 대영웅인 장미 황제의 전기(傳記)인데요.”
여귀진이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오늘 막 얻었어요. 정말 좋은 책이더라고요. 한번 읽기 시작하니까 손을 뗄 수가 없어서 가지고 왔어요. 용서해 주세요.”
“이… 이것이… 어찌 우리 대윤의 역사란 말입니까. 이것은 시정잡배들이나 읽는 연의 소설입니다!”
로 선생이 흥분하며 내지르는 소리에 대전의 문과 창문이 울리며 진동했다.
“야만족! 야만족이로다!”
“스승님. 이러지 마세요. 친구에게 빌린 거예요…….”
로 선생이 나가며 쾅 닫은 문이 아직도 울리고 있었다. 백리욱이 다가와 여귀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늘도 네 덕분에 살았다.”
백리욱은 희색이 만면해 달려 나갔다. 여귀진만이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아 떨어지는 종잇조각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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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꽃 열매가 들어있는 송이.
2) 현물 세금을 대신해 납부하는 식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