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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검 (15)
“나라면 봉갑진을 쌍봉어린진(雙鋒魚鱗陣)으로 바꾸겠어. 공격할 때는 측면 대열을 봉갑진으로 편성해 투창과 전투 도끼를 무기로 쓰고, 방어할 때는 측면 대열을 어린진으로 편성해 양 날개를 뿔로 삼고 궁수로 후방을 지원하는 거지. 기마병이 깊이 파고들려고 하면 뿔로 기마병의 진형을 길게 늘어뜨린 다음 정중앙에서 일거에 섬멸할 거야!”
음산하고도 험악한 목소리가 현장을 압도했다.
철안과 철엽은 모두 아연해졌다. 둘 다 쌍봉어린진이나 뿔 같은 말을 대략 알고는 있었지만 동륙 진형의 변화에 대해서는 어쨌든 잘 알지 못했다. 공격용 봉갑진과 방어용 쌍봉어린진을 합치면 골치 아파지는 게 사실이었다. 형제는 한동안 귓속말로 속닥속닥 이야기했지만 결국 대안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소년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
소년의 목소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게 거슬렸다. 음험한 기색을 띤 목소리는 좀처럼 가시지 않고 유유히 귓가를 맴돌았다. 그 소년은 줄곧 모두의 맨 뒤에 서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걸음을 떼자 소년들은 약속이나 한 듯 길을 내주며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소년은 열네댓 살 남짓 되어 보였지만 주위 아이들과 비교하면 아이라 할 수 없었다. 푸른빛의 얼굴에는 한 줄기 창백함이 어려 있었고 두 뺨은 깊이 패었다. 광대뼈는 높고 날카로워 두 눈이 더욱 움푹 들어가 보였다.
철엽은 그 소년의 눈을 보자마자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등골이 오싹했다.
“유은!”
철안도 소년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는 연무 대회 때 가장 마지막에 출전할 예정이었던 동륙 소년이었다. 원래 철안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자신을 가장 애먹일 상대라고 생각했기 때문. 그러나 끝내 유은과는 겨룰 기회조차 없었다. 당시 철안은 소년의 몸에서 풍기는 음산한 분위기에 눈이 갔었다. 그때도 얼굴은 푸른빛을 띠었지만 지금처럼 창백하지는 않았다. 고작 몇 달 사이에 급격히 야위었고 몸집도 빈약해졌다. 하지만 쇠처럼 단단해 보였다. 입고 있는 검은색 금군 전투복이 바람에 들리면 가슴팍에 튀어나온 갈비뼈가 보일 듯했다.
“야만족! 말해보시지! 우리의 봉갑진을 뚫고 쌍봉어린진까지 무너뜨릴 수 있겠어?”
방기소가 조롱하고 멸시하는 말투로 떠들었다.
“초원의 영웅호걸은 이기지 못하는 싸움이 없다며? 너희들 입으로 그러지 않았어?”
“기마병 한 부대가 진의 가운데를 뚫고 들어가면 돼. 진의 가운데로 직진해 들어가 군을 통솔하는 대장을 잡으면 진법은 쓸모가 없어지지.”
누군가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시선이 그곳으로 모였다. 철안과 철엽도 깜짝 놀랐다. 그리 말한 사람은 뜻밖에도 그들의 세자였다. 병법은커녕 말타기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세자. 여귀진은 혼자 중얼거리는 것처럼 고개도 들지 않고 나직하게 말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줄 아나?”
소년들은 인정하지 못한다는 듯 떠들어댔다.
“그리 말하신 데는 세자 저하만의 이유가 있겠지요?”
식연이 진지한 얼굴로 여귀진을 쳐다보았다.
“그냥 혼자 생각한 거예요. 누가 말해준 것도 아니고요. 믿을 만하지 못해요.”
여귀진은 매우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9왕이 호표기를 이끌고 진안부와 결전을 치렀을 때 얘기를 들었어요. 그때 외사촌 형님에게는 기마병이 별로 없었는데 제 숙부의 대군(大軍)은 쫓아오지 못했대요. 결국 숙부는 진을 쳤어요. 병력은 외사촌 형님보다 훨씬 많았고 활과 화살도 있었죠. 외사촌 형님은 결국 100명의 기마병을 이끌고 직접 숙부의 진 중앙으로 돌진을…….”
“그 전투에 대해서는 저도 들었습니다. 실전에서 자료를 얻는 것은 병법의 정도(正道)이지요.”
식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병서에 보면 전쟁에 나가 나라를 정벌함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싸워 이긴다는 말이 있지요. 하지만 직접 돌격해 보지 않고 흩뿌려지는 적의 뜨거운 피를 몸에 묻혀보지 않고서 어찌 전장의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장군. 그렇다면 저희가 뭐라 말을 하든 다 부질없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 이 아래가 연무장이니 차라리 말을 타고 시험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은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세자는 금장국의 귀빈이다. 어찌 함부로 연무장에 내려가 무력을 쓸 수 있겠느냐?”
식연은 단칼에 거절했다.
“장군께서는 저 야만족의 편을 드시는 겁니까?”
“누가 야만족이란 거지?”
식연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것은 금장국에서 온 귀빈을 가르치라는 국주의 명뿐이다. 야만족이 웬 말이냐. 야만족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군.”
“장군께서 야만족이 아니라면 아닌 게 됩니까?”
유은은 꼭 폐에 구멍이 난 것처럼 목소리에 바람 소리가 어렴풋하게 묻어났다.
“그럼 풍염 황제의 북벌은 무엇을 위해서였습니까? 저희가 무술을 배우고 군에 몸 바치는 것 또한 무엇을 위해서란 말입니까? 정말 저 아이는 자기가 귀빈이라 생각하는 겁니까?”
“저 새끼가!”
철안과 철엽이 일제히 여귀진의 앞을 가로막아서며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유은은 물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철안과 철엽을 몰아붙이듯 한 걸음 더 나왔다. 철안은 이를 악다물고 쿵 발을 구르며 한쪽 발을 고정했다. 철엽은 살짝 뒤로 물러났다. 철엽은 호흡이 거칠어지고 얼굴도 시뻘게졌다. 청양부의 명예가 달린 중대 고비였다. 제 형처럼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평소 자신의 칼에 자부심도 있고 여기서 유은과 반목하는 것도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그러나 유은이 다가오는 순간, 억누르기 힘든 전율이 느껴졌다. 음산한 기운이 덮쳐오는 듯했다. 그 안에서 퀴퀴한 곰팡내가 나는 듯해 구역질이 났다.
하당 소년들도 담이 커졌다. 유은의 뒤를 쫓아서 한 걸음 나오더니 하나같이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유은!”
식연이 엄한 목소리로 낮게 호통쳤다.
여귀진은 정말 철안과 철엽이 칼을 뽑아들기라도 할까 봐 양손으로 칼을 쥔 두 사람의 손을 각각 붙잡았다. 그는 마른기침을 한 번 하고는 입을 뗐다.
“난 뭘 배운 적도 없어서 아무것도 몰라. 그냥 내 말은 흘려 들어. 아까 그건 내가 아무렇게나 한 말이니까 무효야. 난 몸이 안 좋아서 전쟁에도 못 나가. 내가 졌어.”
“유은. 넌 아픈 애를 괴롭히고 부끄럽지도 않냐?”
싸늘한 목소리가 소년들 무리 밖에서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저 멀리 성루 한구석에 깃발을 든 소년이 묵직한 창을 짚고 홀로 서 있었다. 소년이 몸을 돌렸다. 도발의 빛을 띤 새카만 눈동자로 여귀진의 얼굴을 훑고는 방향을 바꾸어 유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안이 벙벙해진 여귀진이 중얼거렸다.
“희야?”
“희야!”
식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희야도 유은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까만 눈동자와 흉악한 이리 같은 눈이 맞부딪쳤다. 유은이 얼굴을 구기며 천천히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희야는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하지만 둘의 시선은 내내 비껴 나가지 않았다.
“그럼 안 아픈 네가 대신해 보든가. 뼈 부러질 걱정은 말고.”
유은이 눈꼬리를 치켰다.
“그래! 전장에서 날 죽일 날만 기다리고 있는 네게 기회를 주지.”
“서출 잡종!”
희야는 대꾸하진 않았지만 안면 근육이 움찔했다.
“좋아!”
철엽이 가만있지 못하고 외쳤다. 희야의 창술은 믿을 만했다. 그는 당연히 희야가 유은을 제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닥쳐!”
철안이 철엽을 홱 잡아당겼다. 철안은 제 동생보다 주도면밀했다. 흥분이 가라앉고 보니 눈앞의 상황은 이미 엉망이 되어 수습하기가 어려웠다. 청양과 하당은 이미 동맹이었다. 정말 연습 훈련을 하게 되면 누가 이기고 지든 난감해질 것이 자명했다.
“장군. 어서 그만두라 명하십시오.”
방산은 조금 당황했다.
“국주께서 아시면 장군은 괜찮으실지 모르나 윗분들을 모시는 저희만 죽어납니다요. 사소한 말싸움이니 장군께서 일축해 버리십시오.”
그러나 식연은 표정을 느긋이 풀더니 아래턱을 만지작댔다.
“훈련을 시켜보는 것도 재미있겠어…….”
“장군! 장난치지 마십시오!”
방산이 화들짝 놀랐다.
“내 어찌 장난을 치겠나?”
식연은 그저 웃으며 말했다.
“내 청영위가 나를 따른 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말을 했네. 그것도 이를 갈면서 말이야. 분명 둘 사이에는 진즉부터 원한이 있었겠지. 천하에 당당히 선 사내대장부가 원한이 있으면 풀어야 하는 법. 이게 어찌 장난이란 말인가?”
식연이 두 사람 사이로 걸어갔다.
“희야! 유은! 너희가 말한 대로 각각 100명의 군사를 주겠다. 희야에게는 전부 기마병으로, 유은에게는 봉갑진 보병 50명, 궁수 50명을 주지. 무기는 장대만 쓸 수 있고, 화살은 촉을 뺀다. 문제 있나?”
“없습니다.”
유은이 냉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장대를 쓰면 다치지 않기가 힘들 것 같은데 그때 가서 누가 대신 나선 걸 후회하진 않으려나 모르겠네.”
희야가 제 옷깃을 잡아당겨 젖혔다. 가슴팍의 커다란 멍이 드러났다.
“내가 후회하는 거 본 적 있어?”
희야는 유은의 등 뒤에서 목을 길게 뺀 소년을 보며 말했다.
“뇌운정가. 너 얼굴이 아직도 부어 있네?”
뇌운정가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희야에게 삿대질을 했다.
“좋아! 겨뤄보자고. 내가 봉갑진 보병을 하겠어!”
“나도 봉갑진 보병!”
“나도 도전할래!”
의욕에 불타오른 소년들은 뒤질세라 앞다투어 나왔다. 희야의 앞으로 인간 장벽이 한 줄 늘어났다. 반원으로 늘어선 장벽에 여귀진 일행의 시선이 가려졌다. 희야는 창을 더욱 힘주어 쥐며 명백한 적의를 띤 상대의 얼굴을 훑었다.
“나도…….”
철엽이 참지 못하고 나서려 했다.
누군가가 철엽의 팔꿈치 안쪽을 세게 쥐었다. 고통에 말을 끝마치지 못한 철엽이 고개를 돌려 보았다. 바위 같은 제 형, 철안이었다.
“나는 그냥…….”
철엽은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만족 사내의 문제가 어쩌다 동륙 소년들 사이의 문제로 변했단 말인가.
철안은 제 아우에게 아무 말 말라며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묵묵히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기왕 동륙의 봉갑진과 우리 만족 기마병의 대결이니 진짜 만족 기마병을 쓰면 어때? 마침 우리에게 만족 무사 100명이 있는데.”
갑자기 사기가 높아진 철안이 성큼 나와 제 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나도 포함이야!”
“당연히 너도 포함이지!”
철안은 제 아우를 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는 100명뿐이지만 두려울 게 없어!”
철안은 제 아우와 함께 인파를 헤치고 지나가 희야와 한편에 섰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101명이다!”
더 말을 보태는 이는 없었다. 식연이 맹렬한 기세로 손을 휘두르자 소년들이 일제히 성루 아래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