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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검 (14)
대류영 안. 먼지가 일며 3천 보병이 조용히 반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기립!”
기를 게양하는 성루 위에서 누군가 기를 흔들며 소리쳤다.
반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군사들이 동시에 일어섰다. 방진(方陣)1) 속에서 먼지가 살짝 일었다.
“전진!”
무거운 군화가 누런 흙바닥을 밟았다. 연무장 안에 돌연 바람이 휘몰아친 듯 흙먼지가 군사들의 허리춤까지 피어올랐다.
“정지!”
방진이 멈추고 검은색 커다란 방패가 바닥에 놓이며 견고한 방어벽이 구축되었다.
“공격!”
선회하는 검은 깃발이 성루 위에서 내던져졌다.
검은색 큰 방패 한가운데가 활짝 열리고 검은색 갑옷을 입은 군사들이 묵직하고 힘찬 걸음으로 성큼성큼 나왔다. 바람의 기세가 돌연 거세진 듯 먼지가 성루 높이까지 휘몰아쳤다. 여귀진은 얼른 코를 틀어막았다. 휙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투창이었다. 무수한 투창(投槍)이 공중에서 호선을 그리며 휙휙 날아갔다. 벌집을 건드렸을 때 한데 싸우러 몰려나오는 일벌 같은 모양새였다. 마지막 투창이 전방의 진지에 내리꽂히기도 전에 병사들이 두 손으로 짧은 양날 도끼를 휘두르며 쏜살같이 달려 나왔다. 그들은 질주하면서 양손을 번갈아 던졌다. 뒤의 군사들은 도끼가 동료의 머리 위로 지나가도록 조절했다. 수많은 전투 도끼가 녹아 흐르는 쇳물을 이루며 날아갔다. 적진으로 돌격하던 군사들은 다시 황급히 피했고 열렸던 방패 문은 다시 닫혔다. 창군(槍軍)이 뒤에서 따라붙었다. 창대를 방패군의 어깨너머로 넘겨 창진(槍陣)을 만들었다. 모두가 일제히 포효하며 투창과 전투 도끼가 일으킨 누런 먼지 속으로 돌진했다.
포효성과 발소리가 그쳤다. 성루 위에서는 누런 먼지 속 까마반지르한 가죽 갑옷의 형상만 보였다. 흡사 땅속에 잠복하고 있는 새카만 딱정벌레 같았다.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고 여귀진은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방진 속의 무사들은 어느새 먼지구덩이였던 전쟁터에 집결해 있었다. 정면으로는 거대한 방패가 방어벽을 이루었고 다섯줄의 긴 창이 보조를 맞추었다. 측면에는 창을 던지고 도끼를 던지던 군사들이 장도를 들고 서 있었다. 길이와 폭 모두 50보를 넘지 않는 진지 내에 수백 자루의 창과 도끼가 빈틈없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여귀진은 직접 전장에 나가본 경험은 없지만 이런 공격에는 그 누구라도 절대 달아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설령 가장 날렵한 군마를 타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한 번에 수백 명의 만족 기병을 죽일 수 있는 공격이었다.
“장군의 진법이 한층 더 정교해졌군요.”
방산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말문을 열었다.
“처음 대류영에 왕림하신 여귀진 세자께 훈련 의장을 구경시켜드린 것뿐 이건 진법이라 할 수도 없지.”
식연은 칠흑 같은 긴 도포를 걸치고 허리에는 흰색 띠를 동여매었다. 기를 든 무사가 명령을 내리는 동안 이 하당 명장은 방만한 미소를 띤 채 성루 난간에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가 나무계단을 따라 성루로 올라왔다. 여귀진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자. 평안하셨습니까!”
철안과 철엽 형제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여귀진의 발아래 반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귀진은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 그들을 잡아 일으켰다. 고작 두 달 못 보았는데 그사이 두 심복은 키가 더 자란 듯했다. 세 사람은 손을 맞잡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이 지나고 철엽은 여귀진이 걸친 무거운 비단 장삼을 잡아당겨 문질러 보았다. 그러더니 또 정수리에 틀어 올린 변발을 조심스럽게 눌러보고는 중얼거렸다.
“세자 이렇게 꾸미시니 정말 동륙인 같아 보입니다.”
형 철안이 매섭게 철엽을 노려보고는 그를 잡아끌고 식연에게 가 인사를 올렸다.
식연은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여귀진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세자의 두 심복이 대류영에서 부장 열다섯을 내리 이겼습니다. 성년 무사들도 두 사람의 상대가 안 되더군요. 무예는 제가 딱히 가르칠 것이 없었습니다. 하여 오늘 마침 세자께서 군사들의 훈련 상태를 검열하러 나오신다기에 겸사겸사 군진 안에 섞여 들어가 동륙 진법을 살펴보게 하였지요. 만족 기병이라면 이런 군진에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식연의 마지막 질문은 철안에게 한 것이었다. 철안은 머릿속으로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철엽이 뭐라 말하려고 하자 철안이 철엽의 허리를 꼬집었다.
“대군께서도 세자가 동륙의 진법을 보고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당에 보내셨습니다.”
뒤돌아선 식연은 자신의 뒤편으로 군장을 하고 칼을 찬 소년 무사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제가 금군 안에 작은 군사 훈련원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학생들은 모두 금군 아이들이지요. 이미 국주께서 세자에게 군진학(軍陣學)을 전수하라 제게 명을 내리셨으니, 괜찮으시다면 훈련원에서 수업을 들으셔도 됩니다. 다만 제 성정이 방만한 경향이 있어 누군가의 본보기가 되기에는 다소 부적절하고 간혹 학생들에게 해가 되기도 합니다.”
여귀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성루 아래 훈련이 일단락된 연무장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세자 저하?”
식연은 살짝 몸을 숙여 여귀진의 귓가에 대고 그를 불렀다.
여귀진은 번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장군. 용서하십시오. 제가 한눈을 팔았습니다.”
식연이 허허 웃었다. 그는 개의치 않고 대오를 접는 금군 군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은 봉갑진입니다. 50년 전, 선대 황제께서 철선강에서는 세자의 조부와 결전을 치르고 막심한 피해를 입으셨지요. 그 후 기마병에 대항하기 위해 궁리해낸 진법입니다. 세자께서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저는…….”
여귀진이 가볍게 몸을 떨었다.
갑자기 한 사람이 봉갑진의 공격 범위 안에 들어갔을 때 어떨지가 떠올랐다. 수천 자루의 도끼와 투창, 그리고 빽빽한 긴 창이 그를 벌집처럼 못 박을 것이었다.
금군 군사 대오 속에서 누군가가 피식 웃으며 외쳤다.
“야만족이 겁먹었대요!”
식연은 미간을 찌푸렸으나 별말은 하지 않았다.
“누가 겁을 먹었다는 거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철기병은 여전히 동륙의 봉갑진을 쳐부술 수 있어.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철안이었다. 식연이 웃으며 대꾸했다.
“철 소장군. 어디 말해보게.”
철안의 눈빛이 금군 무사들을 훑자 방기소가 움찔했다. 철안은 봉갑진 대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삼면에 방패가 있고 긴 창까지 방호하고 있으니 우리 기마병이 정면에서 돌진한다면 절대 대적할 수 없습니다. 또한 전투 도끼와 투창이 위에서 공격하니 방패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막아내기가 쉽지 않고요. 하지만 기마병이 정면으로 돌진하지 않고 우회해 진의 뒤편으로 간 뒤 말 위에서 화살을 쏘면 진형을 흐트러뜨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큰 방진은 방향을 틀기가 어려우며 내부의 군사들은 바깥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지요. 철갑옷을 입은 장님이나 매한가지라 아무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훌륭하다!”
식연은 뜻밖에 박수를 쳤다.
“이리 좋은 방법을 생각했으면서 왜 조금 전에는 말을 안 했지?”
철안이 머리를 쳐들고 대답했다.
“떠나오기 전 대군께서 분부하셨습니다. 저희는 벗이 되고자 하당에 가는 것이라고요. 그러나 상대가 우리를 벗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 청양인은 싸울 것입니다!”
“훌륭한 대답이다. 병법가의 기개가 있구나.”
식연이 고개를 돌려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는 내게 봉갑진을 배웠지. 그렇다면 철 장군이 말한 대로 봉갑진을 친 상태에서 상대 기병이 우회해 뒤와 양 날개를 공격한다면 어찌 대응할 것이냐?”
학생들은 살짝 술렁였다. 몇몇은 한데 모여 귓속말로 소곤댔다.
“제가 말해 보겠습니다!”
뇌운정가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저는 기마병이 양 측면과 뒤에서 돌진해 온다면 진 뒤편에 궁수를 직선으로 줄지어 세울 것입니다. 보궁의 사정거리는 300보이지요. 봉갑진이 1보 나아갈 때 보궁 진형도 1보 앞으로 나아가는 식이면 사정거리 안에서 봉갑진의 양 측면을 충분히 망라할 수 있습니다. 돌진해 오는 기마병은 그 누구도 제 화살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맞다.”
식연이 철안에게로 몸을 틀었다.
“이럴 때 기마병은 어찌 대응할 거지?”
철엽이 가만있지 못하고 나섰다.
“보궁수는 비스듬한 측면까지밖에 대응할 수 없지요! 저는 정면에서 일부 기마병으로 적을 유인해 방진의 중심부를 정측면으로 이동시킬 겁니다. 기마병은 빠르게 움직이지만 보궁수는 활시위를 길게 당기고 있을 테니 방향을 틀 새가 없지요. 봉갑진을 공격하지 않고 먼저 보궁수 진형을 공격하면 됩니다.”
“더욱 좋군.”
식연은 여전히 웃음을 지었다.
“방법이 있습니다!”
방기소가 일어섰다.
“보궁수 진형의 양측에 녹각(鹿角)2)과 울타리를 설치하는 겁니다!”
“녹각?”
철엽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녹각은 몇 보마다 설치할 거지? 녹각을 설치하고서는 어쩔 건데? 기마병이 후퇴하면 쫓아올 수는 있고? 보궁수 진형이 봉갑진과 함께 전진하다 보면 언젠가는 녹각을 지나가야 할 때가 올 거야! 결국 그 방법은 뒤집히면 끝장인 거북이 등딱지를 제 손으로 만드는 꼴이라고.”
“누구더러 거북이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방기소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누구든 거북이 등딱지를 뒤집어쓰면 그게 거북이지!”
철엽은 조금도 지지 않았다.
남회 소년들은 상대의 뛰어난 언변을 간과했다. 철엽은 제 형처럼 어눌하지 않았다. 소년들은 만족 기마병의 전술을 몰랐다. 풍염 황제가 대규모로 북벌해 강대한 보병 진형으로 기마병의 돌격을 막아낸 뒤 초원의 무사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깨달았다. 목려는 평생 기괄과 활을 배합한 동륙인의 보병진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병법서를 쓸 만큼의 학식은 없어도 최소한 북도성의 배우기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전수해 줄 정도는 되었다.
“그만들 싸워라!”
식연이 가운데에서 중재했다.
“병술로 싸워라! 주둥이로 싸우지 말고!”
“제가 해보겠습니다!”
소년 하나가 대열에서 나와 표독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저라면 궁수를 반월형 진으로 바꾸겠습니다. 어느 방향에서 기마병이 습격해 와도 화살을 퍼부어 막을 수 있으니까요.”
철안은 소년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궁수가 직선에서 반달형으로 진열을 바꾸는데 어떻게 봉갑진의 양익을 완벽하게 엄호하지? 이 경우 전방은 봉갑진, 후방 궁수는 반월진으로 전체 진형이 길게 늘어져서 기마병이 더 쉽게 후방으로 가 공격할 수 있어. 그러면 반달진이 반대로 뒤집히게 될 텐데 과연 기마병을 막을 수 있을까?”
“봉갑진 네 개로 사방에 진을 치고 궁수가 봉갑진 사이에서 엄호하면 돼!”
“그럼 병력이 분산될 텐데. 내가 후퇴하면서 오르막으로 유인했다가 다시 돌격하면 전면의 봉갑진은 해체되어 쌍방이 혼전을 치르겠지. 후방의 봉갑진은 쓸모가 없어질 테고 궁수도 보병으로밖에 쓰지 못해”
“보궁수를 앞에 보내 선봉에 있는 기마병을 쏘아 죽인 다음 기마병을 추격하면 돼. 봉갑진은 뒤에서 따라오면서 사방을 포위할 거고.”
“보궁수 병력이 대규모가 아니라면 기마병이 말을 타고 지나가면서 다 죽여버릴 텐데. 봉갑진은 애초에 사방을 포위할 기회조차 없지.”
“대규모의 보궁수 부대를 둘 거야!”
“우리도 그만큼 인원이 많으면? 너희는 우리 기병에 몰살되겠지!”
“궁수를 장겸(長鎌)병으로 바꿔서 말 다리를 잘라버리겠어!”
“청양 기병은 활을 가지고 있어. 말 위에서 사정거리가 150보나 된다고!”
여귀진은 소년들이 침을 튀기고 삿대질을 하며 다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언쟁의 목소리는 점점 시끄럽게 변해갔다. 시끌벅적한 소리는 다시 철기가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로 변해갔다. 여귀진은 귀를 막고 싶었다. 그가 싫어하는 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말발굽 소리, 울부짖는 소리, 금속이 맞부딪치며 챙챙거리는 소리. 차가운 빛을 번득이는 군마의 철갑이 떠올랐다. 무쇠의 광채가 밀물처럼 밀려들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 * *
1) 병사들을 사각형으로 배치한 진.
2) 나뭇가지나 나무토막을 사슴뿔처럼 얼기설기 놓거나 막아서 적을 막는 장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