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주표묘록-87화 (8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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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검 (12)

익천첨은 식연의 토기 잔에 뜨거운 물을 더 부어 주었다.

“여기는 어떻게 찾았나?”

“그 아이를 따라왔습니다. 처음 희야를 보았을 때 극렬지창을 가르쳐준 다른 누군가가 있음을 알았지요. 녀석의 부친은 그럴 능력이 없으니까요. 희야가 극렬지창을 선보이기 전에는 세상에 그리 강력한 창술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맞아. 희야는 상당히 천부적이지. 나도 녀석이 하룻밤 만에 최성을 해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분화를 습득할 수 있다면 심랑까지 문제없이 익힐 수 있겠지. 다만 제 증조부처럼 용훼(龍毁)를 익힐 수 있을지는 녀석의 결심에 달렸어.”

“거대한 용을 찔러 죽였다는 전설의 용훼지창 말씀이십니까?”

익천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창은 나도 익히지 못했네. 심지어 희양이 그 기술을 시전하는 것을 본 적도 없어.”

“만약…. 녀석의 결심이 선다면 선생께서는 극렬지창의 진수를 가르쳐주실 생각은 있으신 겁니까?”

차를 마시던 익천첨이 일순 경직되었다. 잠시 그대로 멈추어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녀석을 연습시키는 걸 보았나?”

“보았습니다. 선생께서 희야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진정한 극렬지창이 아니지요. 소위 분하라 하는 것은 입문의 최성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하지만 선생께서 아까 훈련시키신 것은 그저 동작을 달리한 최성일 뿐이지요.”

“청악지검 계승자의 눈은 속일 수가 없군.”

익천첨이 찻잔을 내려놓고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요즘 들어 약간 후회가 된다네. 왜 그날 밤 충동적으로 그 아이에게 최성을 시범 보여주었을까. 희야는 타고난 재능이 너무 뛰어나지만 도무지 속내를 꿰뚫어 볼 수가 없어. 희야의 눈을 보면 가끔 몹시 불안하다네.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들여다볼 수가 없어. 고작 열셋 먹은 아이가 그런 눈빛으로 사람을 보니 두렵지 않겠나. 제 아비가 잘해 주지 않는 것은 알지만 가끔 어릴 때 일을 물어보면 까먹었다 하거나 아예 대답을 하지 않아.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는 듯해. 떠올리기에 끔찍한 일인 것 같더군.

“어린아이 하나가 푸른 바다의 매를 이리 불안하게 하는 것입니까?”

“사람을 잡아먹을 늙은 호랑이를 키우는 건지도 모르지. 내 과거에 한 번 잘못한 적이 있는데 결국 직접 주살령(誅殺令)을 내려야 했지.”

“천구의 무술과 반지를 받아들인 희야가 천구의 믿음을 저버린다면 조직의 규칙에 따라 손목을 잘라야겠지요?”

“천구가 준 모든 것을 되갚아야 하긴 하지. 내가 희야를 이곳에 자주 못 오게 하는 이유는 창운고치검을 찾는 일에 지장을 받고 싶지 않아서라네. 그리고…….”

익천첨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진짜 분하를 전수해 주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고.”

식연은 잠자코 있다가 웃으며 말했다.

“저도 선생께 힘을 보태겠습니다. 남회성의 습하고 무더운 날씨도 괜찮으시다면 얼마간 더 머무르시지요.”

12월 27일.

유풍당.

검은 옷을 입은 무사가 빠른 걸음으로 방에 들어와 발 밖에 꿇어앉았다. 돌기가 세 개인 강철 침에 꿰뚫린 왼팔을 오른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었으나 여전히 피가 뚝뚝 흘렀다. 검은색 군복은 하당 금군의 복장 같았으나 가슴을 보호하는 가죽 갑옷 위로 청색 박쥐가 압인되어 있었다. 박쥐는 날카로운 이빨로 단도를 물고 있었다. 귀복영 백부장의 표식이었다. 귀복영은 금군의 비밀 편대로 정예병들만이 선발된다. 식연은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부대를 조직하고 동륙 16국의 각 도읍에서 비밀리에 활동했다. 귀복영 역시 풍호의 31위 부대와 같은 척후 조직이었다.

“무슨 일이지?”

식연이 발을 휙 젖혔다.

“장군. 보고드립니다.”

백부장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저희의 대처가 미흡해 순국 풍호 7인이 모두 사망했습니다.”

“마지막 부대도 피하지 못했군…. 어떻게 죽었느냐?”

“저희 37명이 내내 7명을 지켜보았습니다. 숨어 있기도 잘 숨어 있었고요. 그런데 그저께 밤 주점에서 약장수로 변장한 십장 하나가 순찰하던 군사의 단속에 걸렸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휴대하던 단도를 들키는 바람에 풍호 병사들에게 정체가 탄로 났지요. 그들은 달아날 방도를 모색했으나 저희는 장군의 명령을 기억하고 아예 신분을 드러낸 채로 바짝 뒤쫓았습니다. 어제는 그들이 위장하고 온천에 목욕하러 가기에 제 부하도 어쩔 수 없이 옷을 벗고 따라 들어갔습니다. 한데 놈들은 뜻밖에도 물속에 무기를 숨겨두었고 저희 쪽에 무기가 없는 틈을 타 반격했습니다. 부하 십수 명이 다쳤고 놈들은 그 틈에 도망쳤습니다. 저희가 세 번째 길목까지 쫓아갔는데 그들 전부 나무에 목이 매달려 죽어 있더군요.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천라의 살인 수법이 그토록 빠르다는 걸 믿지 못했을 겁니다.”

“네 팔은 어쩌다 다쳤지?”

“한발 늦게 도착하긴 했지만 살수와 마주쳤습니다. 살인 후 미처 달아나지 못한 것 같더군요. 저희가 도착하자마자 기괄(機括)에서 이런 강철 침이 쏘아져 나와 연달아 두 사람이 다쳤습니다. 그림자가 담 밑에 붙어 은밀하게 이동하는 것이 보이기에 뭔가 이상하다 싶어 쫓아갔는데 역시 그림자가 아니었습니다. 살수가 그림자인 척해 달아나려 했던 것이지요. 제가 포위하려 했으나 놈의 행동이 너무 빨라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식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책할 필요 없다. 천라의 살인 기술은 너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생 살인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이 천라의 살수다.”

“저희도 그 천라 살수에게 화살을 쏘아 부상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연달아 세 골목을 쫓아갔는데 끝내 이것밖에 못 찾았습니다. 임시로 상처 부위를 감는 데 쓴 것 같습니다.”

백부장이 손에 든 흰색 천을 바쳤다.

묵묵히 받아든 식연은 손가락으로 천을 비벼보았다. 촉감이 무척 차가웠다. 염색하지 않은 얼음 비단(冰锦) 조각으로 위에는 핏자국이 번져 있었다. 식연은 천을 코끝에 가져다 댔다. 피비린내 외에 극도로 옅은 꽃향기가 났다.

여인은 단칼에 왼쪽 가슴팍의 홑옷을 잘라냈다. 화살에 맞은 부위가 드러났다. 견갑골에서 바로 2치 아래가 화살에 꿰뚫렸다.

칼날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서 살짝 힘을 주어 짧은 화살 옆의 근육을 잘라냈다. 훅 뿜어져 나온 피가 뜨겁게 흘러내렸다. 여인은 다시 반대 방향에서 칼을 그었고 짧은 화살 양쪽으로 근육 깊이 팬 칼자국이 남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화살을 움켜쥔 뒤 세게 힘을 주었다. 단번에 뽑아낸 화살을 나무통에 던져 넣고 한 손으로 붕대를 들어 그 위를 꾹 눌렀다. 몸 반쪽이 없어진 듯 통증이 극심했다. 여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고개를 돌려 이로 은박 봉지를 찢어 열었다. 안에는 얇은 연고가 한 장 들어 있었다. 흑옥 같은 반투명한 검은색 연고였다. 여인은 은박 봉지를 옆에 둔 초에 태웠다. 가닥가닥 푸른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여인은 콧방울을 활짝 열어 탐욕스럽게 그 연기를 흡입했다. 방 안 가득 따스한 기운이 퍼졌다. 연초가 타들어 간 잔향 같지만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다.

팔의 통증이 완화되었다. 나른한 마비감이 사지에서부터 가슴으로 한데 밀려왔다. 설령 다시 깨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버티지 못하고 잠들 것만 같았다. 여인은 벽에 몸을 기댔다.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자못 묵직한 발소리는 문간에서 멈추었다.

“누구냐!”

여인은 악착같이 일어서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예요!”

밖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간 갈라진 것이 변성기 소년이었다.

“유은?”

여인은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늦었는데 무슨 일로 왔니? 내 지금 몸을 닦고 있으니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렴.”

여인은 유은에게 이런 차림을 보일 수 없었다. 황급히 속에 입고 있던 연갑 띠를 풀었다. 그러나 특수한 재질의 연갑은 한 겹의 피부처럼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땀에 젖기까지 해 벗기가 여의치 않았다. 여인의 이마에 식은땀이 가득 맺혔다. 그녀는 힘을 주어 연갑 소매를 떼어냈다. 그때 소년이 입을 열었다.

“반지 가지러 왔어요. 반지만 주시면 돼요.”

여인은 흠칫 놀랐다.

“밤이 너무 늦었으니 가지 마라.”

“반지 줘요! 뻔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여인은 잠시 침묵했다.

“은아. 고집부리지 마. 그 검은 결국 너를 죽일 거야. 이미 네 아버지를 죽인 검이다.”

“그게 당신하고 무슨 상관인데요?”

약효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여인은 점점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책상을 짚고서야 간신히 설 수 있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대답했다.

“네 아버지는… 네가 무탈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목숨을 거는 짓은 그만둬! 정말 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겠니? 말끝마다 네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고 하면서 지금 넌 뭘 하고 있느냐? 도적처럼 친구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횡포를 부리고 싸움이나 하고 강도질을 하지. 고작 수백 명이 있는 동궁에서 왕이라도 된 것처럼 세도를 부리고 말이야. 동궁 주변의 점포들에서는 너희 이름을 들으면 욕부터 한다. 이게 네 아버지가 네게 바라던 일이냐?”

“상관하지 말라고 했죠! 내 반지나 내놓으라고요. 지금 당장!”

소년은 또박또박 말했다. 특히 ‘내 반지’에 더욱 힘을 실어 말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여인은 가슴 앞의 은사슬을 뜯어냈다. 그녀는 사슬에서 반지를 빼내 창살 밖으로 밀어 넣었다.

소년은 반지를 집어 들고 몸을 돌려 떠났다.

“유은…….”

소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닥쳐요! 우리 유씨 가문의 일은 당신과 상관없어요! 당신이 내 어머니도 아니잖아요! 당신은 그저 우리 아버지가 주워온 여자일 뿐이야!”

유은의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여인은 완전히 지쳐 벽에 기댄 채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약물의 온기가 오래도록 자욱하게 퍼져갔다. 온몸이 뜨거운 물에 잠긴 듯 나른해지며 제멋대로 풀어졌다. 누군가가 그녀를 안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오래전 팔송에서 만난 그 사내였다. 우람한 흑마를 탄 사내는 가끔 잔혹했고 가끔 경박했다. 또 가끔은 그저 묵묵히 먼 곳을 바라보았다.

“나를 왜 구하는 거죠?”

여자가 발버둥 쳤다. 이렇게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길가의 얼어붙은 뱀이 불쌍해 품에 안고 녹여 주었는데 따뜻해지자 뱀이 깨어나 그이를 물어 죽였다더이다. 그래서 시험해 보려고 하오.”

“그건… 이유가 안 됩니다.”

“난 그들의 말을 믿지 않소. 여자 뱀? 뱀은 눈물을 흘리지 않지. 아무리 봐도 내 눈엔 고양이 같소만?”

남자는 살며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남자의 손에 눈물이 닦여나갔다.

고양이…….

“야옹아. 너는 도망 못 간다. 내가 내기에서 이겼으니 너는 내 것이다.”

“야옹아. 정말 나와 함께 가고 싶지 않으냐? 내가 알기로 아주 먼 곳에 큰 산이 있다. 그 산에는 청동색 거대한 문이 있는데 그것을 열면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야옹아. 너는 어찌 늘 내게 들러붙어 있느냐? 내게 시집이라도 오고 싶은 것이냐?”

“야옹아. 너는 아느냐…. 많이 지치는구나…….”

“야옹아. 어서 가라! 돌아보지 마라! 내가 전에 했던 말들은… 다 거짓말이다!”

투명한 달빛 아래, 벽면이 책으로 가득한 방. 사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상체를 드러낸 여인이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으나 뺨 옆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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